#82
“생일이었어? 언제?”
“올해 생일은 몇 달 뒤고.”
몇 달 뒤라면서 벌써 선물 얘기를 하는 거야?
어이없어 그를 쳐다보는 사이 카드릭이 입을 열었다.
“지금 말하는 건 내 열한 살 때 생일 선물.”
카드릭이 열한 살이던 때라면 내가 아홉 살이었을 텐데 그게 언제 적 일이야?
게다가 그때 그 사건도 같이……. 아.
뒤늦게 나는 카드릭이 무얼 말하는지 깨달았다.
그래, 기억났다. 깃펜 세트.
페리드 경의 배신으로 이용당한 뒤 선물하기도 애매해져 버리라고 했지.
“생일 연회에 온다고 해놓고 결국 못 왔고.”
끄응, 이건 진짜 할 말이 없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긴 했지만, 약속을 못 지킨 건 사실이니까.
게다가 이후의 내 행보를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너한테 섭섭한 거 많아.”
“미안.”
“괜찮아. 앞으로는 계속 만날 테니까.”
순간 나는 무언의 압박을 느꼈다. 분명 얼굴은 웃고 있는데, 전해져오는 말의 무게는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까.
“바, 바쁘지 않아?”
“널 만날 시간 정도는 있어.”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내가 바쁠 수도 있잖아? 황후 폐하의 시녀인걸.”
“안 바빠 보인다고 하면 화내려나?”
카드릭이 여전히 웃음기 어린 눈으로 책을 들고 있는 내 손 쪽에 시선을 주었다.
‘책 읽는다고 이러는 거야?’
나도 모르게 세모 모양으로 변하려는 눈에 억지로 힘을 주던 그때였다.
“엘피다라……. 타국에 관심 있는 줄 몰랐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욕심에 눈이 멀어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지 생각 못 했으니까.
“나중에 여행이라도 갈까 싶어서 읽는 거야.”
나는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말하며 설핏 웃었다.
“여행?”
의미 없는 읊조림이란 걸 안다. 그런데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눈치챘을 리 없어.’
카드릭에게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능력은 없으니 절대 내 속셈을 짐작 못 할 것이다.
또한, 이러니저러니 해도 현재 나는 벨로크 대공의 딸이다.
아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처지이니 망명을 준비하는 줄 모르겠지.
“나쁘진 않아. 답답할 땐 다른 나라 구경도 좋을 거야.”
역시.
예상한 답변에 나는 남몰래 안도하며 책을 고쳐 안았다.
‘그래도 빌리는 책 목록에 다른 분야를 섞는 게 좋겠지.’
계속 빌려오던 목록을 돌연 싹 바꾸면 그것대로 수상할 테니 차차 바꾸는 수밖에.
지방에 있을 때나 대공저에 있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황궁은 다를지도 몰랐다.
‘카드릭처럼 내 행동을 눈여겨보고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자가 나올지도 몰라.’
그럴 가능성은 적겠지만, 그래도 내 망명 계획과 연관 짓게 되면 곤란했다.
“황태자 전하!”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외침에 돌아보자 옅은 금발의 남자가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는 게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무슨 일이야?”
“전하의 마나 파장이 느껴져 왔습니다.”
“경이 신경 쓸 건 아니야. 사소한 마법을 쓴 것뿐이라.”
“다행입니다.”
나는 카드릭과 대화하는 남자를 바라봤다.
멀리서 볼 땐 커다란 신장 때문에 막연히 성인인 줄 알았던 남자는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어렸다.
분명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건 분명한데, 그렇다고 어른이라고 하기엔 애티가 보인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왠지 낯익어.’
예전에 분명 만난 적이 있는 듯한데 저 남자의 신원이나 어디서 만났는지까지는 기억이 안 났다.
좀 어두운 창고? 같은 곳에서 봤던 것 같은데……. 내가 그런 곳에 간 적이 좀 많아야지.
회귀 전에 본 사람인가? 아니면 회귀 후?
남자가 카드릭에게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헉, 너무 빤히 바라봤나?’
미처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빛을 받아서일까. 태양처럼 선명하면서도 찬란한 황금색 눈동자가 콱 틀어박힌다.
‘저 눈빛, 분명 봤는데.’
그때 시야에 무언가 급히 끼어들더니 그늘이 드리웠다.
정면에 보이는 건 어느덧 남자가 아니라 카드릭의 등이었다.
‘얘, 뭐 해?’
내가 나와 남자 사이를 가로막은 카드릭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였다.
“궁금해할 것 없어.”
“그렇습니까?”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카드릭보다 훨씬 낮고 진중한 목소리.
그런데 카드릭은 저 남자가 아니라 나한테 한 말 아닌가?
“보다시피 내겐 아무 이상 없으니 경은 돌아가도록 해. 나도 금방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남자의 발소리가 멀어져가자 나는 카드릭에게 물었다.
“저 사람 누구야?”
“내 호위 기사 겸 놀이 상대.”
아니, 그런 거 말고 이름을 알고 싶은 거였는데.
그보다…….
“놀이 상대라고?”
카드릭의 입에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단어에 나도 모르게 반문부터 했다.
“친구는 아닌데, 친구 하라고 붙여둔 거지. 나보다 한 살 많지만 또래라고.”
“너보다 한 살 많으면……. 아직 성년이 아닌데 호위 기사를 할 수 있어? 물론, 나도 황후 폐하의 시녀이긴 하지만 난 특수한 상황이잖아.”
“미하엘 경도 비슷해. 검술 실력과 출신 가문을 고려해 작위를 주고 내게 붙인 거지.”
미하엘 경이면 이름이 ‘미하엘’인 건가? 아니면 기사 작위를 받으며 얻은 작위명?
미하엘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도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내가 어디서 봤다고 착각한 건가?
“그럼 또 보자, 베리.”
“응……. 어?”
생각에 잠겨 카드릭의 말을 반쯤 흘려듣던 나는 마지막 단어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금 애칭으로 부른 거야?’
그러나 카드릭은 이미 멀어진 후였다.
* * *
카드릭과 헤어진 뒤로 내 머릿속에는 미하엘 경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단순히 지나친 정도가 아니라 분명 어떠한 대화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억이 안 날까.
“오셨어요, 아가씨?”
“응.”
―왔다!
―베리!
쌀쌀해진 날씨에 겉옷을 벗어 첼시한테 건네는데 룩스와 슈가가 달려왔다.
둘을 맞이해주는데 내 품에 안겨 있던 룩스가 킁킁,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베리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나!
‘이상한 냄새?’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코끝으로 갖다 댔으나 이상한 냄새는커녕 데보라 부인이 즐겨 쓰는 향수인 아이리스 향기만 은은하게 났다.
시녀가 된 이후, 룩스도 몇 번 맡아봤으니 새삼 이걸 이상한 냄새라고 칭할 리 없을 텐데……. 그렇다고 별다른 냄새는 없는데?
“왜 그러세요? 혹시 뭐 묻으셨어요?”
“아니야. 룩스가 냄새를 계속 맡길래 궁금해서 그런 거야.”
“혹시 황궁에서 다른 동물을 만나셨나요? 완자도 제가 룩스와 놀아주고 돌아가면 제게 안겨 계속 냄새를 맡더니 샘내더라고요.”
그런가? 하지만 오늘 딱히 다른 동물을 본 적 없는데.
그러나 룩스는 방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떨어지라 해도 힘을 주며 완강히 버텨서 결국 나는 이따가 옷을 갈아입겠다고 첼시를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너 왜 그래?
―누님은 이 냄새 안 나?
―무슨 냄새?
―음……. 먹던 씨앗을 뱉어내게 만드는 냄새?
도대체 그건 어떤 냄새야?
하지만 룩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건 나뿐이었나 보다.
―무서운 냄새?
―맞아! 비슷해!
―베리, 너 독수리 만났어? 아니면 뱀?
‘둘 다 본 적 없는데.’
―그렇다는데?
―동물 냄새 아니야! 아! 그 냄새야! 그 냄새!
드디어 룩스가 내게서 떨어지며 외쳤다.
―베리랑 사탕 가게 갔을 때 맡은 냄새!
―뭐어어어? 너희 나 빼고 사탕 가게 다녀왔어? 언제!
최근에 언제 사탕 가게를 다녀왔느냐고 묻기도 전에 슈가가 방방 날뛰었다.
―누님도 갔는데? 그때 베리가 사탕 사줬잖아. 기억 안 나?
“잠깐만. 룩스, 네가 말하는 그때가 언제야?”
―베리가 나보다 조금 큰 때!
나는 물끄러미 룩스를 바라봤다. 저택 안이라 일부러 덩치를 줄인 상태긴 하지만, 저것보다 내가 조금 더 크던 때면 한참 옛날이라는 건데……. 그때 사탕 가게에서 맡을 게 뭐가 있지?
“사탕 가게 말고 다른 곳에서 맡은 적 없어?”
―있어! 베리가 좋아하는 인간 여자 있는 곳이랑 우리가 쫓겼던 거기!
마리 언니를 말하는 건가? 그럼 보육원?
“우리가 쫓겼던 거기가 어디야?”
―무서운 여자가 고양이 들고 우리한테 화냈잖아. 그래서 우리 도망치고 그랬는데.
말롱 부인에 의해 암흑 시장에 납치당한 그때인가?
룩스의 말을 들으니 가물가물하던 기억의 실마리가 차차 잡혀간다.
오크 통으로 가득하던 어두운 창고, 그리고 꼼짝없이 들켰다고 생각하던 그때 날 모른 척해주며 탈출구를 알려줬던…….
‘빠져나가면 잊도록 해.’
“아!”
기억났다. 그 남자애!
걔도 미하엘 경이라던 남자처럼 옅은 금발에 금색 눈이었어!
‘그런데 미하엘 경이 그 남자애라고?’
암흑 시장에 있던 애가 어떻게 카드릭의 호위 기사가 된 거지?
‘미하엘 경도 비슷해. 검술 실력과 출신 가문을 고려해 작위를 주고 내게 붙인 거지.’
카드릭이 해준 말을 떠올린 나는 아, 나직이 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