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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84화 (84/125)

#84

오래전 일을 기억하는 것도 모자라 불새를 이용해 서신을 따로 전달하기까지!

‘집요하다, 집요해.’

새삼 몰랐던 것도 아니나 겪을수록 놀라웠다.

다른 시녀님들이 말하는 ‘황태자’인 카드릭과 내가 아는 카드릭이 어지간히 달라야지.

내게 서신을 전달한 불새는 제 할 일이 끝났다는 듯 곧바로 휙 날아갔다.

초청장을 받고 한참 고민하던 나는 비번인 날에 카드릭의 선물을 미리 준비하고자 외출을 결심했다.

‘그날이 오늘이고.’

이왕 외출하는 김에 마리 언니도 보러 갈 계획이었다. 언니와 보육에 줄 선물도 가득 사 들고 말이다.

‘룩스.’

―응?

신나게 바닥을 굴러다니던 룩스가 귀를 쫑긋거리며 쳐다본다.

‘오랜만에 나갈 건데 같이 가줄 수 있어?’

―지금 나온 거 아니야?‘

‘여기 말고, 시가지로 나갈 거라서. 마리 언니도 보고.’

―나는? 왜 룩스한테만 묻고 나는 안 물어봐?

‘가려는 곳에 애들도 많은데 괜찮아?’

―생각해 보니 난 여기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슈가의 재빠른 대꾸에 나는 풋, 웃음을 참지 못했다.

‘룩스, 너는?’

―갈래!

다행이다. 룩스가 안 가면 대공가의 기사를 동원해야 했는데, 그건 그것대로 불편했다.

언니한테 줄 선물들을 사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기에 나는 룩스한테 작게 변해 달라고 부탁해 바로 외출했다. 샤비도 함께였다.

‘우선 날씨가 추우니 무난하게 목도리부터.’

아마 마리 언니는 비싼 것보다 내가 직접 떠주는 걸 더 좋아하겠지만…….

‘내 손재주로 만들었다가는 망한 선물이 될 게 뻔해.’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물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손재주 하나는 정말 없는 편이라.

쇼핑하는 중간중간 샤비로부터 도움을 받아 마리 언니한테 줄 선물과 보육원 아이에게 줄 장난감까지 사자 어느덧 이른 저녁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은 때가 됐다.

“더 늦으면 좀 그렇겠지?”

“조금이나마 일찍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샤비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릭의 선물 고민은 다음에 봐야겠다.’

조금만 더 있으면 해가 뉘엿뉘엿 질 기세라 나는 보육원부터 방문하기로 했다.

* * *

펠리시타스 보육원.

마리 언니가 직접 ‘행복’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로 지은 보육원은 내 옛 기억과 똑같았다.

세월이 지난 흐름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한 외관은 물론, 보육원 밖까지 넘어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나는 괜히 감탄했다.

‘역시 마리 언니.’

예산을 빼돌리며 보이는 곳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놓던 이전 원장이 꾸리던 보육원을 떠올리며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짜증 나!”

다소 험악한 외침이 내 귓속을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니 내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보인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딴 평민 애새끼들 뒤치다꺼리나 해야 하는데!”

“도, 도련님! 진정하세요!”

“이거 놔! 더는 못 해 먹겠다고! 벨로크 공녀는 안 보이지, 애새끼들은 시끄럽기만 하지!”

벨로크 공녀라면 나……?

소년의 외침에 그 옆에 있던 하인이 그를 말리려 애썼다. 전혀 소용없는 듯했지만.

“다른 데서 만나면 눈도 못 마주칠 것들이, 감히 내게 이딴 일을 시키다니!”

기어코 소년이 손에 쥐고 있던 헝겊을 내팽개쳤고, 때마침 주변을 뛰어가던 여자아이가 그걸 밟고 미끄러졌다.

쿵!

크게 미끄러진 여자아이가 울먹이다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시끄러워! 왜 울고 난리야!”

“셰리!”

뒤에 있는 줄도 몰랐던 소녀가 달려와 급히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간소하나 깨끗하고 단아한 드레스를 입은 소녀는 누가 봐도 귀족이었다.

대체 귀족가의 영식과 영애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내가 잠시 멍하니 있는 동안 소녀가 아이를 정성스레 보살폈다.

“괜찮아? 많이 다쳤, 세상에! 피 나잖아!”

“으앙……!”

소녀의 말대로였다. 아이가 입은 치마의 무릎 부근이 붉은 얼룩으로 번져 있었다.

“겨우 넘어진 것뿐인데 다치면 얼마나 다쳤겠어? 유난은.”

“유난이라니! 네가 헝겊만 안 던졌어도 셰리가 넘어질 일은 없었어!”

“쟤가 달려와서 혼자 넘어진 건데 왜 내 탓이야? 그보다 너, 지금 나한테 반말했냐?”

“왜? 너도 반말하는데 난 하면 안 돼?”

“이게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건방지게……!”

내내 빈정거리던 소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저러다 사달 날 것 같은데.

중재해줄 사람이 없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봤으나 어린아이가 대부분이었다.

보육원에서 일하는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있긴 했으나 귀족 간에 싸움이다 보니 선뜻 끼어들지 못하고 곤란해하는 눈치가 강했다.

끝내 분을 참지 못한 소년이 손을 올려 들었다.

‘룩스!’

내 부름에 룩스가 서리 바람을 내뿜었다. 갑자기 불어온 서리 바람에 놀란 소년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쟤 넘어졌다! 바보!

“뭐, 뭐야!”

―뭐긴, 내가 내뿜은 바람이지! 바보!

‘쉿, 들키면 곤란해.’

어차피 룩스의 말이 들릴 리 없겠지만, 그래도 의심의 싹이 룩스한테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내게 룩스는 귀여운 친구일 뿐이나 객관적으로는 룩스는 마수니까.

괜한 트집 잡히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룩스가 잘 조절해줘서 다행이야.’

다급해져 룩스를 부르긴 했지만, 만약 룩스가 바람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저 소년의 손은 지금쯤 커다란 얼음덩어리로 변해 있었을 터였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어물쩍 넘어가지 못하고 다른 변명을 생각해내야겠지.

난데없이 나타난 바람에 소년이 두리번거렸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원인을 모르는 모양이지만.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네가 보기엔 괜찮아 보여? 내 바지가 지저분해졌잖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그리고 이 바닥은 대체 언제부터 얼었어? 분명 방금까지 멀쩡……!”

“날씨가 추워서 바닥이 얼어 있었나 봐.”

나는 하인한테 바락바락 성질내는 소년의 근처로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혼자 넘어지던데.”

“넌 또 뭔데……! 누, 누구십니까?”

내게도 윽박지르려던 소년이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날 바라봤다.

‘왜 저런 반응이지?’

예의 없게 굴 땐 언제고 갑자기 공대라니.

음, 내 드레스가 수수해도 비싼 거란 걸 알아봤나?

“먼저 자신을 소개하는 게 우선 아닐까?”

나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아빠의 후광이긴 해도 어쨌든 현재 제국에 나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고는 황족뿐이었다.

그중에 내 또래의 황족은 황태자인 카드릭뿐이고.

“샤비, 애 데리고 들어가서 치료하고 있을래? 이분도 도와드리고.”

“네, 아가씨!”

나는 소년이 가만히 있는 동안 뒤에 있는 소녀와 여자아이를 눈짓했다.

샤비가 소녀와 여자아이를 부축하는 동안 가만히 있던 소년이 예의 바른 척 인사했다.

“밀리엔 자작가의 차남, 테드입니다. 이제 귀공녀의 이름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베로니카 벨로크.”

“예?”

밀리엔 자작가의 차남이라는 소년이 얼빠진 얼굴로 읊조렸다.

“베, 벨로크, 공녀?”

존칭 안 붙이네.

딱히 대공가의 영애라고 거들먹거리고 싶은 마음도, 그럴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내내 ‘공녀님’으로 대우받다 바로 앞에서 하대 받으니 꽤 거슬렸다.

“정말 벨로크 공녀님입니까?”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그, 그럴 리가요! 생각보다 예쁘셔서……! 다시 인사드립니다. 테드 밀리엔입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소년이 벌떡 일어나 내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예법대로라면 저 손에 내 손을 올려 인사를 받아줘야겠지만…….

“내 손이 더러워지는 건 질색이라.”

나는 소년의 손을 힐끔 보며 “이해하지?”하고 덧붙였다.

룩스가 잠깐 얼린 바닥은 금세 녹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로 인해 소년의 바지는 물론 손바닥이 흙투성이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사실은 여자애한테 손찌검이나 하는 놈과 인사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한 말이지만.

“예, 그, 그럼요.”

아무래도 전자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소년이 빨개진 얼굴로 제 손을 뒤로 황급히 숨겼다.

이렇게 된 거 아예 내쫓는 게 좋겠지.

“공자의 행색이 엉망이네. 그러다 감기 걸릴 텐데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

“제가 감기 걸릴까 걱정해주시다니 공녀님께서는 마음도 천사시군요!”

으, 응? 도대체 어느 부분이? 걱정한 게 아니라 비꼰 거였는데……?

내 당혹감과 별개로 소년이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걱정해주셨지만 전 괜찮습니다! 이래 봬도 튼튼하거든요! 일도 잘합니다!”

“그런 것치고는 하기 싫다고 화내면서 헝겊을 던지던데.”

“그, 그건……!”

“덕분에 저 애도 넘어져서 다쳤고.”

“저 애가 혼자 달려와 넘어진 겁니다!”

“헝겊을 던지지 않았다면 그럴 일도 없었겠지?”

이번에는 내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랬는데도 못 알아들었다면 정말 눈치가 심각한 수준이겠지만.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문 채 씩씩거리며 날 노려보다 몸을 휙 돌려 나갔다.

그때였다. 뒤에서 다급히 뛰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 건.

“난동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세요?”

반가운 목소리에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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