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예상대로, 그곳에는 마리 언니가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덧그려졌다.
“애니, 아니…… 베리?”
마리 언니 역시 날 알아보고 눈을 휘둥그레 뜬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언니가 작게 탄식하며 다가왔다.
“베리, 정말 너구나! 이렇게 예쁘게 컸을 줄 몰랐어. 아, 네가 안 예쁘게 클 줄 알았던 건 아닌데.”
“알아, 언니. 무슨 말인지.”
언니의 횡설수설한 모습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온다.
갑자기 황후의 시녀 일만 떠맡게 된 게 아니라면 좀 더 일찍 찾아왔을 텐데.
아니지, 시녀가 돼서 수도로 올라올 수 있었으니 욕할 건 아닌가.
“더 일찍 찾아와야 했는데, 미안.”
“아니야. 그보다 정말 많이 컸구나, 우리 베리. 내 허리까지도 안 올 때가 엊그제 같은데.”
에이.
내가 아무리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편이라 해도 언니의 허리 근처까진 왔던 것 같은데……. 아, 아닌가?
아니지, 이게 뭐가 중요해. 지금은 그때보다 큰걸!
“그보다 다친 곳은 없니? 난동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괜찮아. 몇 마디 해주니 가버리던데?”
사실상 신분 차이로 내보낸 거지만 뭐 어때?
원래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어야 하는 법이다.
“별일 없다니 다행이다. 셰리, 아, 아까 넘어진 애도 크게 다친 것 없이 괜찮거든.”
“다행이야. 그런데 귀족 자제들이 여기 왜 있는 거야?”
“말하자면 긴데 들어가서 얘기할까? 춥잖아.”
“좋아.”
마리 언니는 날 원장실로 안내했다.
주인을 닮아서인지 원장실은 검소하면서도 포근했다.
“새로 키우는 여우니?”
“여우?”
마리 언니가 내 품에 안긴 룩스를 눈짓했다.
아, 룩스 얘기구나.
순간 언니한테 사실대로 털어놓아야 고민되었다. 예전에 내가 데리고 있던 생쥐가 지금의 마수로 변한 거라고.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믿어줄지 안 믿어줄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말롱 부인에게 납치되었던 것부터 말해야 하는데 마리 언니라면 분명 내 걱정에 가슴 아파할 테다.
“여우가 아니라 마수야.”
“마, 마수? 이게?”
“위험하진 않아. 이거 보이지? 언제든 통제할 수 있는 마법이 걸린 마도구야.”
나는 룩스의 목에 있는 목줄을 가리켰다.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 룩스는 위험한 존재로 보일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마리 언니만 봐도 한껏 놀라다 못해 조금 무서워하는…….
“마수가 이렇게 귀여울 수 있구나.”
으, 응?
―내 얘기인 거지? 내가 귀엽다는 거지?
룩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작은 귀를 쫑긋 세웠다.
“마수인데 귀여워?”
첼시는 좀 이상한 취향이라 그렇다 쳐도 마리 언니까지?
물론 룩스가 작게 변신해 있을 때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안 위험하다며? 이렇게 작기까지 한데 귀엽지.”
맞는 소리긴 한데……. 그래도 너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거 아닌가?
‘그러면 나야 좋지만.’
조심스레 손을 뻗은 마리 언니가 룩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 손길이 좋은지 룩스는 그릉그릉 소리를 내며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귀족 자제들은 왜 있는 거야?”
“맞다. 그 얘기 하려 했지.”
마리 언니가 룩스를 만지던 손을 거두며 말했다.
“음, 사실 예전부터 꽤 있었어.”
“예전?”
“한 7년? 8년 됐나?”
“그 정도면 보육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아니야?”
“맞아. 그래서 곤란한 일들이 좀 많았어. 다행히 대공 전하께서 계속 신경 써주셔서 별일은 없었지만.”
“아빠가?”
“응. 정기적으로 후원해주시는 것도 있는데 경비 인원에 마법사와 치료사도 보내주셨거든.”
마리 언니가 제 목 언저리를 매만졌다.
예전에 카드릭이 준 마도구였다. 목소리를 대신 내줘서 마리 언니한테 선물한.
“쓰면서 고장 난 적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면서 꾸준히 보내주시더라고.”
이쯤 되니 지난 내 행적을 반성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건데 저것도 생각 못 했다니.
별개로 아빠의 배려에 가슴이 찡해졌다. 가만 보면 정말 세심하다니까.
“그러다 네가 수도를 떠난 뒤로는 좀 뜸해졌는데……. 최근 들어 다시 방문이 많아졌어.”
문득 아까 내가 내쫓은 소년이 한 말이 떠오른다.
‘이거 놔! 더는 못 해 먹겠다고! 벨로크 공녀는 안 보이지, 애새끼들은 시끄럽기만 하지!’
설마 날 만나려고 보육원에 대신 기웃거리는 건 아니겠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하지만 최근 방문이 늘었다는 걸 생각하면……. 진짜 나 때문이야?
“확실한 건 아니지만, 여기가 널 만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나 보더라.”
대체 왜?
사실 짐작 안 가는 게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정말 날 만나려고 여길 온대?”
“그렇대도. 전부 다 네가 귀여워서 그런 거 아닐까?”
악, 내가 귀여워서라니!
순간 나도 모르게 펄쩍 뛸 뻔했으나 겨우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마리 언니 눈에 콩깍지가 낀 게 틀림없다!
“그럴 리 없잖아.”
“왜? 네가 얼마나 귀여운데.”
“나 다 컸는데?”
“다 큰 거야 알지. 아까 너 보고 깜짝 놀랐어. 뒤에서 보니 정말 숙녀더라.”
“앞에서 보면?”
“숙녀지.”
말과 달리 웃음기 서린 언니의 얼굴은 여전히 귀여운 애를 보는 듯했다.
‘틀렸어.’
무슨 말을 해도 마리 언니한테 있어 나는 여전히 아홉 살 먹은 어린애인 모양이다.
한숨을 내쉰 나는 차라리 다른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여길 방문하는 귀족들을 어쩌면 좋지?’
언니의 말마따나 내가 원인이라면 본의 아니게 마리 언니를 비롯해 보육원 전체에 폐를 끼치는 셈이었다.
아까처럼 행패 부리는 귀족이 결코 한둘이 아닐 테니까.
‘내가 보육원과 상관없다고 소문내봤자 안 믿겠고……. 차라리 방문을 못 하게 할까?’
어차피 날 보는 게 목적으로 오는 거라면 보육원에 도움 안 될 텐데.
심각하게 고민하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작게 열린 문 틈새로 샤비가 얼굴을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저희 아가씨, 아, 여기 계셨군요! 다친 곳은 없으시죠?”
“응. 룩스가 있으니까. 그리고 몇 마디 해주니 가더라고.”
―맞아! 내가 있다고!
샤비가 “다행이에요.”라며 안도했다.
“참, 아까 사신 것들은 어떡할까요? 지금 가져올까요?”
아! 맞다! 선물!
뜻밖의 소동에 잊었던 선물들을 떠올린 나는 지금 가져오자며 샤비와 함께 나갔다.
마리 언니와 아이들한테 주려고 열심히 고른 건데 하마터면 전달하는 걸 잊은 채 돌아갈 뻔했다.
디저트부터 장난감에 인형들을 나눠주니 다들 신이 났다.
그러나 몇몇 아이들은 새 장난감보다는 룩스에 더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얘는 무슨 여우예요?”
“바보야. 여우가 아니라 강아지야! 보면 모르겠어?”
“저게 강아지라고? 아무리 봐도 여우인데?”
―둘 다 아닌데!
티격태격하던 아이들은 곧 룩스의 종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룩스와 놀고 싶어 했다.
차라리 아이들만 놀고 싶어 했다면 단호하게 거절했을 텐데 룩스도 옆에서 같이 거든다.
―나도 놀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룩스의 모습에 나는 결국 룩스를 내려놓았다.
‘크게 변하면 안 돼. 함부로 능력 쓰면 안 되고.’
―나만 믿어!
룩스가 아이들과 함께 멀리 사라지자 마리 언니가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겠어? 아이들이 힘들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네.”
“음, 괜찮을 거야. 그리고 자! 이건 언니 거!”
나는 마리 언니에게 선물을 떠안겼다.
“내 거까지 산 거야?”
“응. 그동안 언니도 나한테 많이 보내줬잖아.”
“돌려받으려고 선물한 거 아니야. 그리고 그냥 왔어도 상관없었는데……. 이미 대공님도 많이 도와주고 계시고…….”
“아빠는 아빠고, 나는 나잖아. 그리고 나도 언니한테 주고 싶어서 주는 거야.”
“……고마워. 잘 쓸게.”
작게 덧붙여진 감사 인사에 내가 배시시 웃었다.
검소한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언니는 너무했다.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좋을 텐데.
마리 언니가 선물을 갖다 놓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저어, 공녀님?”
“……?”
갑작스러운 부름에 돌아보니 아까 본 귀족 소녀가 보였다.
“넬레 남작가의 이리스 넬레입니다. 인사가 늦었어요.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이리스가 내게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덩달아 그녀의 검붉은색의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흐트러져 내렸다.
‘검붉은색이네.’
내 머리카락 색만큼이나 흔하지 않은 색이다.
옛날 내 호위……. 그러니까 페리드 경이 생각나게 하는 머리 색이었다.
“제가 결례를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내가 재빨리 손사래 쳤다. 이리스의 입장에서는 그리 오해할 만도 했다. 아무 대꾸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했으니.
“잠깐 아는 사람이 떠올라서요. 결례는 제가 범했네요.”
“……그러셨군요. 그보다 말씀 놓아주시겠어요?”
앗, 초면인 데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아서 예의를 차린 건데 불편했나?
그래도 이리스가 내 말투에 더 집중해서 다행이다.
만약 자신을 보고 떠올린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면 사실대로 답해주기 어려웠을 테니까.
페리드 경은 내게 뼈아픈 기억 중 하나였으므로.
“불편하다면 그럴게.”
“감사합니다. 공녀님께선 듣던 대로 친절하시네요.”
“듣던 대로?”
나에 대한 소문이 있나?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데다 올라온 뒤로는 황후의 시녀로만 일해서 딱히 알려질 게 없을 텐데?
“원장님께서 얼핏 말씀하신 걸 들어서요.”
마리 언니가?
으응, 언니라면 그럴 만하지. 나한테 귀엽다느니 착하다느니 어쨌든 좋은 소리만 해주니까.
내 앞에서도 그럴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한테도 안 그랬을 리가 없지.
그래도 처음 온 사람한테 나에 대해 말하진 않을 텐데.
“보육원에 자주 왔어?”
“네. 평소 아이들을 좋아해서요. 제가 많은 도움을 주긴 어렵지만……. 그래도 돕고 싶어서 자주 왔어요.”
천사인가?
순간, 후광이 이리스의 뒤에 비치는 듯했다.
“이리스 양은 좋은 사람이네.”
“제, 제가요? 아니에요. 취미에 가까운 것도 있고요.”
“취미여도. 어쨌든 이리스 양 같은 사람은 드물잖아.”
마리 언니 이후로 이런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은 처음 봐서일까? 좀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내쫓은 영식과 마찰하기 전에도 어린 여자애와 놀아준 듯했지.
내 칭찬에 한참 손을 꼼지락거리던 이리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은, 공녀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