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88화 (88/125)

#88

“네에?”

다들 경악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딱히 덧붙여지는 말들은 없지만, 눈빛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보인다.

‘어떻게 그런! 아니, 그럴 수 있지만 그래도!’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

결론적으로 내 대꾸는 현명했다. 비록 짧은 시간 침묵이 이어졌으나 더는 ‘카드릭인가, 미하엘 경인가!’처럼 곤란한 대화 주제가 이어지진 않았다.

역시 아빠 핑계만큼 좋은 게 없다니까.

* * *

모임은 이른 오후가 되어 끝났다.

다들 아직 어리다 보니 저녁 전까지 돌아가야 한다나? 몇몇은 자고 가는 듯했지만.

“공녀님도 괜찮으시다면 저희 저택에 방을 내어드릴게요.”

“미안. 오늘 꼭 들를 곳이 있어서 돌아가야 해.”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배웅해드릴게요.”

“다른 사람들은?”

“저희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공녀님.”

“맞아요. 저흰 좀 더 인사하다 갈게요.”

다들 지금 돌아갈 것처럼 굴더니 나만 보내려 하는 걸 보니 내가 불편한가 보네.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이리스가 날 따라왔다.

“아까는 곤란하셨죠?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와 미하엘 경 사이에서 누굴 택할 거냐던…….”

“아, 그거라면 괜찮아.”

시원스러운 내 대꾸에 이리스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내내 저걸 걱정하고 있었나 보네.

“저어, 공녀님.”

“응?”

“혹시 다음 모임 때도 뵐 수 있을까요?”

다음에 또? 난감하네.

오늘 모임에 참석한 건 정말 예의상이었으니까.

동물들이 많다 하니 룩스한테 친구도 만들어 줄 겸 뭔가 흥미로운 게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것도 없고 말이지.

게다가 황궁 생활과 카드릭, 미하엘 경에 관해 얘기하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그런 건 리리카의 친구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물론, 간절한 눈빛으로 날 보는 이리스에게 내 속마음을 토로할 수는 없었다.

“그래. 여건만 된다면.”

“정말요? 너무 기뻐요!”

이리스가 와락 날 끌어안았다. 어? 어?

“헉! 죄송해요! 기뻐서 저도 모르게……!”

내 몸이 경직된 걸 느꼈는지 이리스가 황급히 떨어지며 거듭 사과했다.

“아니야. 그럼 가볼게.”

“네! 또 봬요, 공녀님!”

가볍게 손을 흔든 뒤 마차에 타자 룩스가 내 무릎 위로 껑충 뛰어오른다.

―베리! 베리!

‘응?’

―정말 여기 또 올 거야?

‘마음에 들었어?’

―아니! 다들 이상해! 어떻게 주인과 친구가 될 수 있냐고! 나더러 이상하다고 그러는 거야! 베리랑 나는 친구인데!

딱히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게 둔 적 없는데, 저들끼리 어떻게 대화했나 보네.

―나 다시 오기 싫어!

‘걱정하지 마. 다음에 또 올 마음은 없으니까.’

―진짜?

‘약속할게.’

룩스의 도톰한 발바닥에 손바닥을 맞대자 그제야 잔뜩 성났던 털이 가라앉는다.

‘대공가로 돌아가서 쉬어야……. 가 아니라 카드릭 선물을 주문해야 하는구나.’

목적지를 잊었던 나와 달리 마부는 착실히 시가지로 마차를 이끌어 날 내려줬다.

“다 왔습니다, 아가씨. 전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응, 고마워. 룩스, 가자.”

―우리 어디 가?

“좀 돌아다닐 거야.”

룩스를 품에 안고 가려는데 마부가 날 불렀다.

“저어, 아가씨.”

“응?”

“정말 호위가 없어도 되겠습니까? 하녀도 안 데리고 나오셨잖습니까?”

마부의 걱정은 타당했다. 아무리 수도의 치안이 좋다고 해도 이변은 언제나 있는 법이었으니까.

몇 년 전에 일어난 말롱 부인이 사주한 내 납치 사건만 봐도 그렇다.

대공가 안에서 납치당할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의 내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괜찮아. 룩스가 있거든.”

―맞아! 걱정할 거 없어, 인간! 베리는 내가 지키니까!

“그, 그렇군요…….”

룩스의 정체와 능력을 알 리 없는 마부는 영 찝찝하다는 얼굴로 나와 룩스를 번갈아 봤다.

내 뜻이 확고한 만큼 무어라 더 말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호위기사를 완전히 믿기 어려운걸.’

페리드 경의 배신은 내게 꽤 뼈 아픈 기억이었다.

그때 깊은 불신이 생긴 터라 호위기사 한 명에게 온전히 내 안위를 맡기고 싶진 않았다.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

그렇다고 겨우 시가지를 돌아다니는데 하녀와 호위기사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 마음은 없었다.

‘룩스만 있어도 충분한걸.’

마부와 헤어진 나는 우선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사실 그동안 열심히 생각해 어떤 걸 줄지 정한 상태긴 했다.

바로 겨울용 가죽 장갑.

이전에 얼핏 듣기로 카드릭은 검술을 배운다 했으니 장갑은 추운 날씨에 도움 될 터였다.

만약 검술 수련 때 장갑을 안 낀다면……. 음, 알아서 다른 때 끼겠지.

다만 카드릭이 말한 ‘8년짜리 선물’의 기대에는 못 미칠 듯해 더 둘러보려던 거였다.

걷다 보면 더 좋은 게 보일 수도 있으니까.

―사탕이다! 누님도 좋아할 거야! 헉! 맛있는 냄새 난다! 베리, 저건 뭐야?

……어째 오늘도 카드릭의 선물을 못 살 것 같단 느낌이 드는데 기분 탓인가?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쉴새 없이 꼬리를 흔드는 룩스를 다독이며 가죽 장인 공방부터 찾았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선물할 장갑을 사고 싶은데. 남성용으로.”

“만들어둔 것 중에서 보셔도 되고, 카탈로그에서 고르셔도 됩니다. 받는 분의 손 크기에 맞춰 새로 제작해 드리니까요.”

손 크기?

장인이 내민 카탈로그를 받아 펼치던 나는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난 카드릭의 손 크기를 모르잖아?’

으아아! 멍청해!

어떻게 단 한 번도 그 생각을 안 해봤을까.

“손 크기는 모르는데…….”

“비밀로 제작해 선물하려는 거지요?”

끄덕.

“통상적인 크기가 있긴 합니다만, 맞으실진 모르겠군요.”

“혹시 만드는 데 어느 정도 걸리는지 알 수 있을까?”

“최소 5일은 주셔야 합니다.”

다행이다. 5일 정도라면 아직 여유 있어.

나는 장인이 말한 기간을 읊조리며 공방을 나왔다.

‘그보다 카드릭의 손 크기는 어떻게 알아내지?’

대놓고 물으면 그 눈치에 내가 뭘 주려는지 모를 리 없을 텐데……. 우연인 척 가장해서 손을 맞대본 다음 가늠해볼까?

그런데 어떻게 안 들키게 손을 맞대보지?

끄응, 앓으며 열심히 고민했으나 딱히 뾰족한 묘수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물어볼까? 내가 어떤 걸 주려는지 눈치채든 말든 상관없잖아? 선물인 게 걸리긴 하지만…….

고심이 깊어질수록 회의감도 함께 깊어졌다.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 열심히 고민하는 거람?

―베리, 나 물 마실래.

“그래. 잠깐 카페에 들리자.”

가까운 카페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차였다.

―피해!

“뭐?”

돌연 룩스가 털을 잔뜩 세우더니 내 품을 빠져나갔다.

미처 붙잡기도 전에 웬만한 성인 남성을 웃돌 정도로 몸집을 불린 룩스가 내 뒤의 누군가를 덮쳤다.

쿵!

까, 깜짝이야!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나는 룩스 쪽을 쳐다봤다. 그러자 룩스가 어떠한 남자를 깔고 서 있는 게 보인다.

‘왜 그래? 그 사람은 왜 잡은 거야?’

―이 인간이 뒤에서 널 잡으려 했어! 어떻게 할까?

‘나를?’

―응! 그런데 이 인간, 냄새가 익숙해! 어디서 맡았더라?

‘일단 안전한 거 맞지?’

―응! 나한테 꽉 잡혔어!

룩스가 꼬리를 붕붕 흔든다. 덩치는 커졌어도 내게는 친절해서인지 귀엽기 짝없다.

―그리고 이 인간, 아파! 내가 한 건 아니야!

아프다고?

내게 위해를 끼치려는 자한테 베풀 자비는 없으나 궁금한 것도 사실이라 나는 슬그머니 룩스에게 다가가 깔린 사람을 확인했다.

회색 머리의 남자는 덩치에 반해 얼굴이 앳되어 보였다.

체격만 보고 청년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직 청년까지는 아니고 그 경계쯤에 있어 보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왜 예전에 한번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혹시, 테오?”

정말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이름이었다.

‘틀렸나? 그보다 난 어떻게 이 이름을 기억하는 거지?’

테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아이를 만난 건 오래전이어서도, 마리 언니를 만나러 보육원에 갔다가 잠깐 마주쳤던 게 전부여서도 아니었다.

예전에 테오에 관해 물었을 때 다들 모른다고 해서였다.

오히려 내게 그런 아이가 있느냐고 되물었지.

이상하게 나도 확신이 없어지더니 나 또한 ‘그런 애가 있었나?’ 싶어졌고.

그랬는데 이렇게 갑자기 선연하게 떠오른다고?

그때였다.

대꾸 없이 흐릿한 회색 눈으로 날 쳐다보던 남자의 눈 색이 금색으로 물든 건.

쿵, 쿵, 쿵.

겨우 차분해졌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한다. 무언가를 경고하는 것처럼.

동시에 회색 머리와 눈을 가진 평범한 이인 줄 알았던 테오의 모습이 서서히 변했다.

옅은 금색 머리카락과 달리 선명한 금색 눈동자.

조금 전에 본 ‘테오’의 얼굴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훤칠하고 미려한 얼굴.

그 남자다.

실베스터 공작가의 공자이자 카드릭의 호위를 맡았다던.

“미하엘 경……?”

마도구로 정체를 숨겼나? 하지만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다고? 왜 나를 붙잡으려 한 거고?

“어떻게, 윽.”

상체를 들썩였던 미하엘 경이 제 복부를 짚으며 몸을 조금 웅크렸다.

뒤늦게 그의 손바닥 아래 검붉은 색으로 흥건히 젖은 옷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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