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저거, 설마 피?
룩스가 말한 ‘아프다’가 저렇게 피가 날 정도로 다쳤다는 뜻이었어?
정신을 잃지 않은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에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으나 최대한 침착하게 움직였다.
‘지혈부터 해야 해. 깨끗한 천이…… 있을 리 없지.’
칼이라도 있으면 치마라도 뜯어냈을 텐데 아쉽네.
잠깐, 칼 같은 거라면 바로 옆에 있잖아?
“룩스.”
―응?
“발톱이나 이빨로 이걸 찢어줄래?”
겉치마를 조금 접어 올린 나는 속치마 끝을 룩스한테 내밀었다.
이 정도는 잘라도 크게 지장 없으니까.
―그러려면 이 인간을 놓아야 하는데? 도망치면 어떡해?
“괜찮아. 도망 못 갈 테니까.”
아마도.
나는 쓰러져 있는 미하엘 경을 곁눈질하고는 룩스한테 다시 치마를 흔들었다.
“아니면 발톱으로 여기에 작은 구멍만 뚫어줘.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그제야 룩스가 마지못해 한쪽 발을 들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내 속치마 끝에 푹 박혔다가 빠지자 금세 큰 구멍이 생겼다.
박음질 잘 된 옷을 그냥 뜯는 건 어렵지만 구멍으로부터 천을 찢는 건 비교적 쉬웠다. 그렇다고 안 힘든 건 아니지만.
부우욱―
천을 길게 찢어내서 손아귀에 둘둘 말은 나는 재빨리 미하엘 경의 옆에 쭈그려 앉아 그의 상처 위에 천을 가득 댔다.
그러나 상처가 어찌나 심한지 금세 내 손까지 피로 물들어 축축해졌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나 다친 거지?’
질문하기 무섭게 스스로 답이 흘러나왔다.
‘바보야. 이 남자는 암흑가 사람이잖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그의 정체를 알았다.
심지어 모습을 감추고 있던 걸 보니 그와 관련된 일을 하다 다친 게 분명하다.
‘도와주면 안 됐는데.’
최대한 눈에 안 띄고 모른 척해도 모자랄 판에 아는 척해버렸으니…….
‘미치겠네.’
어떡하지? 다시 손을 뗄까? 이대로 두고 가면 알아서 죽지 않을까?
덥석―
“힉!”
돌연 손이 붙들렸다. 연이어 손바닥에 금속 재질의 무언가가 잡혔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선명한 금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로.”
미하엘 경이 입술을 달싹였다. 들릴 듯 말 듯 희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입 모양만큼은 똑똑히 읽혔다.
‘라샨으로.’
기력을 다했는지 미하엘 경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곧이어 살짝 들렸던 그의 머리가 힘없이 바닥에 뉘었다.
‘설마 죽은 거 아니지?’
조금 전까지 미하엘 경이 죽길 바랐던 걸 생각하면 우스운 걱정이었으나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당황스럽다.
고개를 숙여 그의 가슴에 귀를 대니 다행히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안심할 건 아니야.’
상처가 상처인 만큼 내버려 두면 정말 목숨을 잃을 테니.
“하아…….”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람?
차라리 입 모양을 읽지 못했다면 좋았을 것을.
나는 미하엘 경이 내게 쥐여 준 것을 확인했다. 실베스터 공작가의 상징인 황금 사슴이 양각으로 새겨진 펜던트였다.
‘이걸 들고 라샨으로 가라는 거겠지? 그런데 라샨?’
입안으로 단어를 굴리니 이상하게 낯익었다. 분명 예전에 들어봤던 것 같은데 정확히 어딘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라샨, 라샨, 라샨……. 꽤 익숙한데 어디서 들었, 아!
기억났다! 말롱 부인이 종종 와인을 사 오라며 심부름을 보냈던 주점 이름이 ‘라샨’이었지!
물론 겉만 평범한 가게로 위장한 것뿐, 속은 온갖 정보와 거래가 오가는 암흑가의 정보상이었다. 거리도 내 기억에 따르면 딱히 멀지 않았다.
‘그래서 라샨에 데려다 달라는 건가?’
하기야 지금 실베스터 공작가에 연락해 사람을 불러오는 건 꽤 시간이 걸릴 테다.
그럴 바에는 당장 가까운 곳에 가서 치료받는 게 낫겠지.
모른 척하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겠지?
예전에 이 남자가 날 도와준 게 떠오르며 뒤늦게 양심이 콕콕 찔렸다.
비록 그때 도로 붙잡히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때 받은 도움이 한번 떠오르니 모른 체하기도 어려워졌다.
“룩스.”
―응?
“잠깐 내려올래? 마저 천을 감아야 해서.”
―천은 왜 감으려는 거야?
“일단 피라도 멈추려고.”
룩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내 말대로 했다.
미하엘 경 옆에 쭈그려 앉은 나는 그의 상처를 지혈한 천이 떨어지지 않게 남은 천으로 복부를 돌돌 감싸 묶었다.
뒤이어 나는 그의 팔을 어깨에 걸쳐 몸을 일으켰다.
“어?”
왜 이렇게 무겁……!
무심코 일어난 순간, 생각지 못한 체중에 내 몸이 크게 휘청이더니 뒤로 넘어간다.
헉, 넘어진다!
뻣뻣하게 몸을 굳히며 눈을 질끈 감던 때다.
폭-
어라?
딱딱한 바닥이 아닌 폭신한 감촉에 놀라 뒤돌아보니 룩스가 제 머리로 내 등을 받치고 있었다. 덩치도 도로 커진 상태다.
―나 잘했지!
“응. 고마워, 룩스.”
―뭘! 그 인간, 내가 업을까?
“그럴 수 있어?”
―물론이지!
룩스가 제 등을 척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룩스의 등 위에 미하엘 경을 얹힐 수 없었다.
지금 룩스의 덩치가 미하엘 경에 비해 작아 보여서였다.
가다가 도중에 그를 떨어뜨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덩치를 더 키울 순 없어. 그건 너무 눈에 띄어.’
내 주변 사람들이 대부분 이해해줬어도 룩스의 정체는 어쨌거나 ‘마수’였다.
많은 사람 눈에 띄어봤자 좋은 거 없으니까…….
―그 인간은 왜 눕혀?
“여길 잡은 채로 끌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는 미하엘 경의 모자를 잡아당겼다.
이러면 그의 얼굴이 노출되겠지만 이게 최선이었다.
적어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중에서는.
‘어차피 다들 모를 텐데.’
황제처럼 공식 석상에 자주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귀족가 자제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설령 그를 아는 사람이 나타나면 더욱더 좋았다.
‘떠넘기고 내 갈 길을 가면 그만이니까.’
다행이라면 미하엘 경이 모자가 달린 클로크를 입었다는 점이다.
만약 일반적인 정장 차림이었다면 잡을 곳이 없으니 이렇게 끌고 갈 엄두도 안 났을 텐데.
“끄으!”
윽, 무거워!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끙끙거리며 모자를 잡아당겼지만, 정작 움직인 거리는 고작 두어 발자국에 불과했다.
―내가 할게!
얼마 못 가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고 있으니 룩스가 모자를 뺏어 물었다.
할 수 있겠냐고 미처 묻기 전에 룩스는 미하엘 경을 물고 서슴없이 끌고 나아갔다.
저보다 덩치 큰 남자를 아무렇지 않게 끌고 가는 모습이 감탄스럽다.
그런데 저렇게 질질 끌고 가도 되려나? 상처가 더 악화할까 걱정되긴 하네.
바닥에 등도 쓸려 몹시 아플 텐데…….
나중에 깼을 때, 상처를 보고 날 탓하러 오는 거 아니야?
―베리, 베리! 나, 잘 가고 있어?
“응. 쭉 가면 돼. 방향이 달라지면 말해줄게.”
미하엘 경의 모자를 문 룩스는 마치 뒤통수에도 눈이 있는 것처럼 뒤로 잘 걸었다.
그렇게 룩스를 따라가니 어느덧 방향을 꺾는 때가 되었다.
“룩스, 여기서 오른……!”
“도련님!”
룩스한테 손짓하려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무시하기에는 외침이 너무 큰 데다 우리 쪽을 향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리니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로브를 입은 사람이 보였다.
목소리도 그렇고 로브 밑으로 보이는 체형은 여자였다.
“대체 이 무슨?”
여자는 우리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뛰어왔다.
눈에 덜 띄려고 일부러 외진 길로 다녔는데 이걸 발견하다니, 눈썰미가 좋은가 보네.
그녀는 룩스가 끌고 가던 미하엘 경을 보며 기함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정신을 잃은 미하엘 경이 대답할 리 없었지만.
여자가 미하엘 경을 붙잡고 주저앉는 바람에 더 나아가지 못하게 된 룩스가 날 쳐다봤다.
―어떡해?
‘잠깐 멈춰 봐.’
내가 룩스와 대화하는 동안 여자 또한 미하엘 경의 의식이 없음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여자가 날 보며 뾰족하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도련님을 어떻게 하려는……!”
“보다시피 도와주는 중이었어. 그보다 신원을 정확히 밝혀주면 좋겠는데.”
여자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짧은 침묵 뒤 그녀는 겨우 한 마디만 내뱉었다.
“……도련님의 하녀입니다.”
“증명할 수 있는 게 있어?”
“도련님이 깨어나시면 제 얼굴을…….”
“의식이 없는데.”
여자의 입이 딱 다물렸다. 애써 표정을 감추려 하지만 당혹한 티가 역력하다.
“임시방편으로 치료라도 하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여자는 곧장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그리고 내가 애써 묶어둔 천을 풀어 병에 든 내용물을 아낌없이 들이부었다.
그새 굳은 피딱지와 일부 피가 액체와 함께 섞여 씻겨 내려간다.
―저게 뭐야?
‘약 아닐까?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내버려 둬도 돼?
‘응, 괜찮아.’
여자를 못 믿겠다고 했으나 사실 나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란 걸 알았다.
계속 보다 보니 낯익은 느낌이 들었고, 어디서 봤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 마리 언니와 착각해 붙들었던 그 여자였다.
그때 분명 미하엘 경은 이 여자를 하녀라고 말했고, 여자 역시 미하엘을 지금처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정말 그를 치료하려는 목적이리라.
‘이 사람도 일반 하녀는 아니구나.’
손놀림이나 행동을 보니 느낌이 왔다. 단순히 잡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여자가 병을 꺼내든지 얼마 안 되어 꽤 심각해 보이던 상처가 눈에 띄게 아물었다.
완치된 건 아닌 듯했지만 그래도 이제 죽진 않겠구나, 하고 안도할 정도는 되었다.
‘성수려나?’
신관이 본인의 신성력을 며칠이고 담아낸 신기한 물약.
신관에게 직접 치료받느니 만큼은 못 되지만, 상당한 효력은 보이는.
저 정도로 심각했던 상처가 저렇게 아물 정도라면 가격이 엄청 비싼 건 둘째치고 고위 신관이 만든 것일 테다.
눈살을 찡그리며 낮은 신음을 흘리던 미하엘 경이 곧 눈을 떴다. 몇 번 깜빡이는 걸 보니 아직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다.
“으윽.”
“정신이 드세요?”
“힐, 다…….”
여자를 보고 입술을 달싹이던 미하엘 경이 말을 잇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또 정신을 잃었나 보다.
“보셨다시피 전 도련님의 하녀가 맞습니다. 이제 도련님을 모셔가도 될까요?”
“응.”
나는 룩스에게 아예 미하엘 경을 놓아달라고 말했다. 룩스가 모자를 놓으니 여자는 그를 일으키려고 애썼다.
나도 아까 저랬던 만큼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알았지만, 도울 생각은 없었다. 같잖은 양심 때문에 도운 건 이 정도로 충분했으니까.
여자는 덩치와 다르게 굉장히 힘이 센 모양인지 처음에만 비틀거렸을 뿐, 곧 아무렇지 않게 그를 부축했다.
그녀는 내게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진짜 빚 없는 거야.’
나는 하녀에 의해 멀어지는 미하엘 경의 뒷모습을 힐끔 보고는 돌아섰다.
* * *
“세상에, 아가씨!”
나를 본 샤비가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격하다.
나를 본 마부는 그래도 비교적 점잖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라고 묻고 말았는데.
하긴, 잠깐 외출하고 온 것치고 지금 내 차림새는 꽤 엉망이긴 했다. 속치마 밑단은 찢겼고 미하엘 경의 피가 듬성듬성 묻어 있었으니까.
그나마 대공저로 돌아오기 전, 마부한테 부탁해 넓은 천으로 옷을 가려 일반 사용인들의 반응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전담 하녀 중 한 명인 샤비의 눈까지 피하기는 어려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남작 영애가 주최한 모임에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음, 묻는 말은 비슷하네.
“이 핏자국들은 뭐예요? 다치셨어요? 주치의 선생님을 불러올게요!”
“아니, 괜찮아. 이거 내 피 아니야. 다친 곳도 없고.”
나는 당장 뛰쳐나갈 듯 구는 샤비를 붙들며 다급히 말했다.
그제야 샤비가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다.
“아가씨의 피가 아니라면 누구의……?”
“일이 좀 있었거든.”
“설마 모임에서 그런 건가요? 사나운 개라도 있었나요?”
“아니, 모임은 아니고 잠깐 시가지를 걷다가 좀 부딪혀 넘어졌어.”
차마 미하엘 경의 일을 말할 수 없었던 나는 얼버무렸다.
“첼시와 다른 사람한텐 비밀이야.”
알았지?
마부와 샤비 같은 반응이 재발하는 걸 방지하고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은밀히 속삭이며 대답을 요구하던 때다.
“뭐가 비밀이란 거지?”
생각지 못한 사람의 목소리에 나는 그만 뻣뻣하게 굳었다.
어쩐지 잘 안 돌아가는 목을 억지로 돌리자 샤비의 격렬한 반응에 미처 닫지 못한 방문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