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우리 가문 일을 안다고 경고하는 건가?’
미하엘이 신경을 날카롭게 세운 것과 달리 카드릭의 신경은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미하엘 경이 사적으로 베로니카를 알 리 없지.’
생각해 보면 간단한 일이다.
벨로크 대공가의 공식적인 행사에는 모두 참여했다. 그동안 베로니카는 늘 대공과 있거나 자신과 있었고.
심지어 미하엘은 몇 년 전만 해도 몸이 허약해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 없었다.
베로니카가 수도에서 올라온 건 얼마 안 된 일이므로 둘의 접점이 있을 수 없었다.
저번에 딱 한 번, 미하엘이 자신을 찾으러 와 만났던 그때를 제외하고는.
그러니 단지 같은 향기라는 이유로 베로니카일 거라고 유추하는 게 이상하리라.
다만 자연스레 베로니카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직 고민하고 있으려나?’
제 선물을 잘 준비하고 있느냐고 묻자 화들짝 놀라던 얼굴이 선연하다.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했으나 뒤로는 끙끙 앓으며 애먹을 모습이 쉽게 그려진다.
‘그 성격에 어디다 말도 못 하고 혼자 고민하고 있겠지.’
들판에 난 꽃을 꺾어 선물이라고 갖다 줘도 기꺼이 받았을 것이다.
어차피 모든 선물은 큰 의미가 없다.
절실하게 갖고 싶은 것도, 바라는 게 없는 것도 한몫했지만, 그가 갖고자 마음먹었을 때 갖지 못할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제일 큰 이유였다.
베로니카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렇다 해도 구색은 맞추려 애쓰겠지.’
사실 그런 점은 베로니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다.
황권이 강력한 제국의 황태자에게 부족함이 없을 거란 걸 전부 안다.
그런데도 ‘황태자’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준비한다.
여타 다를 게 없는데 왜 베로니카만큼은 특별하게 느껴질까.
어째서 베로니카가 바라는 건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까.
‘흥미로워서인가.’
그로서는 다소 이해할 수 없으나 베로니카는 사소한 일에도 고심하고, 아득바득 매달렸다.
엘피다 사절단 건만 봐도 그렇다. 그게 무어라고 그렇게 열심인 건지.
이런 생각과 별개로 카드릭은 베로니카의 그런 점이 좋았다.
별거 아닌 거에도 좋아하며 웃고, 그만큼 쉽게 자책하며 제가 당기는 대로 끌려오니까.
베로니카에 대해 생각해서일까, 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 내일 보러 가야겠지만.
‘저번처럼 자고 있으면 좋겠는데.’
제게 기댄 줄도 모르고 편안하게 자던 베로니카의 얼굴을 떠올린 카드릭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그려졌다.
* * *
‘좋아, 펜던트는 잘 있고.’
나는 비장한 얼굴로 밖으로 나섰다.
미하엘 경이 날 해칠 생각이 없다는 걸 알지만, 만난다고 생각하니 긴장된다.
아무래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
“공녀.”
“힉!”
돌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몸이 뛰어오를 듯 들썩였다. 돌아보니 예상대로 미하엘 경이 서 있다.
심장 튀어나오는 줄 알았네. 언제 내 뒤에 있었던 거야?
“…놀랐습니까?”
“아, 아니요. 괜찮아요.”
아니긴! 정말 놀랐는데.
예의 차린 말을 자동으로 뱉는 입이 이럴 때는 미우면서도 동시에 고맙다.
솔직해서 좋은 것보단 나쁜 게 더 많으니까.
나는 손으로 여전히 벌렁거리는 가슴을 가볍게 눌렀다.
이윽고 미하엘 경의 시선도 내 손의 움직임을 좇았다.
‘왜 저렇게 보는, 아, 펜던트!’
나는 허둥지둥 주머니에 손을 넣어 펜던트를 꺼내려 했다.
“여기 있어요. 펜……!”
“잠깐.”
미처 펜던트를 꺼내기도 전에 손이 덥석 잡혔다.
다시 펜던트를 꺼내려 했으나 그는 오히려 그러지 말라는 듯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손등을 꾹 눌렀다.
“겨, 경?”
미처 진정시키지 못한 가슴이 더 크게 벌렁거린다.
유난히 볕이 잘 드는 화창한 날이기 때문일까.
햇빛을 받은 옅은 금발과 금색 눈이 여느 때보다 화사하게 반짝였다.
비록 그의 눈은 내가 아닌 내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 사실은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지난 모임에서 귀공녀들이 ‘실베스터 공자님은 천사 같아요!’라고 떠들던 말이 떠오를 뿐이다.
확실히 얼굴만큼은 꽤…….
내 뒤편을 보던 금색 눈이 조금 움직여 정확히 나와 눈을 마주했다.
‘아.’
급히 시선을 피했던 나는 아차, 했다. 이래서야 찔리는 게 있다고 알리는 꼴이니까.
그렇다고 다시 눈을 마주칠 엄두는 안 났다. 애석하게도 내게는 대놓고 남의 외모를 감상하다 들켰을 때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는 뻔뻔함은 없었다.
부끄러움에 심장이 콩닥거린다. 변명조차 못 하고 그저 바닥만 내려다보던 때다.
“…미하엘 경?”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흠칫 놀란 나는 미하엘 경의 어깨너머를 바라봤다.
‘카드릭?’
쟤가 왜 저기 있어?
카드릭은 무언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얼굴로 우리를 빠르게 향해 다가왔다.
“나중에.”
미하엘 경이 작게 속삭이고는 내 손을 놓았다.
‘카드릭이 올 줄 알고 꺼내지 말라고 잡은 건가?’
이제야 그의 행동을 이해한 사이 미하엘 경은 뒤돌아 카드릭을 향해 예를 차렸다.
“황태자 전하.”
“둘이 함께 있을 줄 몰랐네.”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우연?”
되묻는 것도 그렇고 표정을 보니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펜던트에 이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는데…….
갑자기 식은땀이 조금 나는 기분이다.
딱히 언급한 적 없지만, 그제 일이 비밀이란 것쯤은 눈치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칫 털어놨다가는 슥삭! 당할 게 분명하다는 것도.
안 돼. 내 목표는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다가 성인이 되면 망명하는 거라고!
‘역시 어쩔 수 없나. 마침 좋은 변명도 있고.’
끄응, 고민하던 나는 미하엘 경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잡았어.”
“뭐?”
“부탁할 게 있어서 잡았다고.”
왜 저렇게 놀란 얼굴이지? 내가 먼저 잡은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미하엘 경한테 부탁할 게 뭐가 있는데?”
“네 호위기사잖아.”
“나에 관한 부탁이야?”
“응.”
“나한테 바로 부탁하지.”
“비밀이었으니까.”
어쩐지 카드릭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기도 하다.
정말이지, 쟤 속내는 알 수 없다니까.
“어쨌든, 잡아서 죄송해요. 카드릭이 왔으니 가셔도 돼요.”
나는 미하엘 경한테 살짝 눈짓했다.
어때? 이래 봬도 제법 눈치 빠른 데다 입도 무겁다고.
“그럼 전하께서 호위 없이 오셨으니 모시고 가겠습니다.”
“혼자 돌아가도록 해. 난 베리를 보러 온 거니까. 그리고 내 외출에 대동할 필요 없어.”
와, 호위가 필요 없다는 말을 대놓고 말하다니.
물론 나도 호위 없이 막 다닐 때가 많으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든지.”
카드릭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내 팔을 휘어잡았다.
성큼성큼 거침없이 걷는 보폭은 쫓기 바쁠 정도로 넓었다.
그새 키 컸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잠깐! 어디 가는 건데!”
“대화하러.”
“그럼 아까 거기서 말해도 되는 거 아니야?”
“누가 듣는 게 싫어서.”
그렇게 대꾸한 카드릭은 미하엘 경이 있는 곳보다 제법 멀어진 뒤에야 멈췄다.
“자아, 그래서.”
내 팔을 놓아준 카드릭이 빙글 돌아봤다.
“어떤 부탁을 하려 했어?”
“비밀이랬잖아.”
“그냥 말해. 저놈 또 만날 생각하지 말고.”
저놈이라니, 설마 미하엘 경을 말하는 건가?
……라고 해도 흐름상 미하엘 경밖에 없긴 하구나.
“미하엘 경이 싫어?”
“싫진 않았는데.”
그런데 왜 저런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카드릭이 날 빤히 보더니 덧붙였다.
“너랑 만나니까 싫어졌어.”
켁!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설마 질투하는 거야?’
평소 내가 좋다고 말한 적 여러 번 있었지만, 정말로 질투한다고? 아니, 진짜로?
“별거 아니었어.”
“그런데 손까지 잡았어?”
“…봤어?”
“보였으니까.”
그걸 봤네. 미하엘 경의 몸에 가려져 못 봤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펜던트를 꺼내기 전에 제지당해서 다행이다 싶다. 펜던트가 보였다면 이렇게 변명도 못 했을 테니까.
“네 선물 때문이었어. 장갑 사려면 네 손의 크기를 알아야 한다고 하더라고.”
“그렇다고 잘 모르는 남자 손을 막 잡아?”
“또, 또래니까 비슷할 줄 알았지. 그리고 나 막 잡지는 않았는데…….”
그리고 내가 아니라 미하엘 경이 먼저 잡은 건데!
그보다 이렇게까지 미하엘 경을 감싸야 하나?
물론 내 신변이 걸려 있으니 감싸는 게 맞긴 하지만.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것과 별개로 조금 억울해져 나도 모르게 말꼬리가 흐려지던 때다.
카드릭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
“손 크기 알아야 한다며? 손 펴봐.”
아, 그런 거였구나.
순순히 손을 펴자 카드릭이 자신의 손바닥과 내 손바닥이 마주하도록 갖다 댔다.
이러니까 새삼 내 손이 진짜 작다 싶다. 카드릭의 손이 큰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 이래서야 정확한 손 크기를 기억하고 주문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차라리 다른 장갑이나 정확한 치수를 알려달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이미 어떤 선물을 준비하는지 알린 이상 숨기는 것도 무의미한데.
열심히 카드릭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어라? 얘 얼굴이 원래 이렇게 빨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