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카드릭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돌연 그가 손을 뿌리치듯 거두었다.
딱히 아픈 건 아니었지만 매정한 손길이 조금 어이없다.
아무리 내가 손을 좀 주물럭거렸거니 저렇게까지 굴 필요는 없잖아?
심지어 크기를 재라고 먼저 손을 잡았던 건 자기면서!
“…레.”
“레?”
“벌레가 있어서.”
이 날씨에 아직도 벌레가 있다고? 겨울인데?
이해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할 이유도 딱히 없어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때였다.
“손 크기는 시종을 시켜 본을 갖다줄게. 어차피 이렇게 재도 정확히는 모를 테니까.”
카드릭의 말대로 이렇게는 잘 모르겠으니 다른 장갑을 달라고 부탁하려 했던 참이니 잘된 일이긴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인데.
게다가 카드릭의 얼굴은 여전히 붉었다.
“어디 아…….”
“안 아파.”
……아픈 거 아니냐고 물으려던 걸 어떻게 알았담?
당황한 내가 눈을 깜빡이는 동안 카드릭이 이어 말했다.
“곧 수업이 있는 걸 잊었네. 다음에 보자.”
* * *
카드릭은 참았던 숨을 토하듯 뱉었다. 그래도 온몸이 후끈거린다. 고동치는 가슴부터 뜨거운 낯까지, 자신의 신체 반응인데도 전부 낯설다.
분명 이전에 베로니카를 만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 이상한 반응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제 손을 주무르는 작은 손이 생각 이상으로 따뜻하고 보드라워서?
아니면 옅은 분홍색 머리카락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향기가 새삼 달콤해서?
뭐가 어쨌건 정상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픈 건 아닐 텐데.’
정기적으로 검진받고 건강하다는 말을 들은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새 어딘가 아플 리가.
카드릭은 무의식적으로 제 손목을 매만졌다. 그러다 미하엘과 눈이 마주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표정을 지었다.
“볼 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카드릭은 미하엘을 지나쳐 걷다 돌아봤다.
“그런데 미하엘 경.”
“……?”
“베리와 친분 없는 거 맞지?”
“없습니다.”
거짓말.
카드릭은 미하엘로부터 미세하게 풍기던 향기를 떠올렸다.
어제는 자신의 지나친 기우라고 여겼다.
베로니카 역시 미하엘과 만난 건 우연이라고 했지만…….
‘과연 우연일까?’
그가 없는 사이 둘이 여러 번 만났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심기가 잔뜩 뒤틀리고 온몸에 불쾌함이 솟구친다.
“경, 나는 나 몰래 내 것을 건드리는 걸 싫어해.”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미하엘은 속으로 제 부주의를 탓했다.
가끔 카드릭이 베로니카를 찾는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황궁에서 그녀를 만나려 했다니.
새삼 정신 나간 짓을 했다.
‘당분간 조심해야겠군.’
가문의 인장 펜던트가 중요하긴 하나 카드릭의 심기를 거스르면서까지는 아니었다.
의미심장한 경고를 받은 지금에는 더욱이.
* * *
‘아무래도 이상한데.’
카드릭과 헤어진 뒤에도 나는 좀처럼 아까 일을 떨쳐낼 수 없었다.
수업이 있다니 잡진 않았다만 계속 신경 쓰였다.
‘아픈 것도 아닌데 얼굴이 그렇게까지 빨개지나?’
하필이면 내가 그의 손을 주물럭거린 이후라 더욱 그랬다.
‘설마 부끄러워서는……. 에이, 아니겠지.’
평소 카드릭의 행실을 떠올리면 말도 안 되는 가정이라 나는 고개를 세차게 털었다.
불쑥불쑥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 사람 놀라게 하지, 자기 어깨에 기대어 자게 하지!
심지어 손도 덥석 잡아대고!
당장 기억나는 것만 이 정도인데 겨우 손 좀 주물럭거렸다고 부끄러워할 리 없었다.
‘그럼 화났나?’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내가 붙들자 많이 싫어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시 자신은 남을 멋대로 만져도 된다고 여기지만, 반대인 경우는 허용치 않는 성격인가?
이건 제법 일리 있어 보여 나도 모르게 혀를 차게 됐다.
‘정말이지, 성미 한번 고약하다니까.’
제 좋을 대로 구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진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덕분에 이것도 못 전해주고 말이야.’
나는 주머니 속에 있는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아까 카드릭이 오지만 않았어도 미하엘 경에게 무사히 전달하고 안 얽혔을 텐데.
‘내일 또 찾아오겠지?’
생각 외로 저돌적인 듯했으니 분명 그럴 것 같은데.
‘으, 또 만날 생각하니 심장이 다 콩닥거리네.’
그래도 펜던트만 주면 되니까 괜찮겠지.
나는 최대한 가볍게 생각하려 애썼다.
하지만 한껏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미하엘 경은 날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과 다음 날에도.
9. 사절단 맞이
늦은 저녁, 씻고 샤비가 젖은 내 머리를 말리고 빗겨주던 때다. 첼시가 양손에 상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공방에서 물건을 보내왔는데 어디에 둘까요?”
“거기 올려, 아!”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잠깐 당겨서.”
짧은 비명에 샤비가 내 머리를 빗기다 말고 놀라 물었다.
곱슬곱슬한 머리는 이래서 안 좋다. 빗질도 오래 걸리고 조금만 방심하면 두피가 당긴다니까.
“어쨌든 거기 올려 줘. 이따 확인할게.”
“네, 아가씨.”
내 고갯짓에 첼시가 탁자 위에 상자들을 내려두고 나갔다.
나는 샤비가 빗질을 끝내주자마자 상자를 열어 확인했다.
“지난주에 주문한 장갑들인가요?”
“응. 하나는 아빠 거고, 하나는 카드릭 거.”
두 사람의 걸 주문했더니 제작일이 조금 걸렸다.
그래도 이런 쪽에는 막 눈인 나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장갑은 훌륭했다.
‘카드릭도 손이 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빠보다는 작네.’
물론 카드릭은 아직 성장기고, 아빠는 다 큰 성인 남자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두 분 다 받으면 좋아하시겠어요.”
“좋아할까?”
“그럼요.”
큭, 양심 찔린다.
사실 아빠는 예정에 없었는데 덩달아 주문한 거니까.
게다가 카드릭의 선물도 미하엘 경 때문에 이미 본인한테 선물의 정체를 알려버린 후라 기대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그 덕분에 카드릭의 선물을 편하게 주문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대체 펜던트는 언제 가져갈 셈이람.’
서랍 가장 안쪽에 숨겨둔 실베스터 공작가의 펜던트는 그야말로 골칫덩이였다.
다른 물건도 아니고 가문의 상징이 있는 펜던트다 보니 혹시나 누가 보면 오해 사기 딱 좋았다.
지난주에 공방을 찾으며 라샨에 맡기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빠가 돌아오며 내 만행……. 그러니까, 호위와 하녀들을 빼놓고 룩스와 둘이 외출하려던 게 들통나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빠는 호위 기사와 하녀가 없는 내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릴 적 사고에 휘말린 게 많은 데다 아빠의 악명도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긴 했다.
하지만 펜던트를 빨리 처리하고 싶었던 내게는 그야말로 악재였다.
호위 기사와 하녀를 데리고 다니면 자연스레 내 행적이 아빠의 귀에 들어가게 될 터였다.
특히나 목적지가 라샨처럼 아직 어린 내가 출입하기 적절하지 않은 장소라면 무조건 보고가 들어갈 테고 추궁받겠지.
그런 이유로 초반에는 미하엘 경이 날 찾아오길 기다렸지만…….
‘설마 몇 주째 안 찾아올 줄은 몰랐지.’
그렇다고 내가 미하엘 경을 찾아갈 명분도 없었다.
아, 몰라. 언젠가 찾아오겠지.
복잡해지려는 심경에 고개를 살짝 털어낸 나는 장갑이 든 상자를 들고 일어섰다.
“지금 주러 가시게요?”
“응. 아빠가 외출했다는 말은 못 들었지?”
“제가 듣기로는요.”
좋아, 더 늦기 전에 주고 와야지.
아빠의 외출 일정이 워낙 불규칙하다 보니 되도록 얼굴을 볼 수 있을 때 주는 게 좋았다.
‘아직 잘 시각은 아니니 서재부터 확인하는 게 낫겠지?’
나는 종종걸음으로 상자를 들고 일단 서재부터 찾아갔다.
똑똑-.
“아빠, 저예요.”
조용하다. 안 계시나?
나는 슬쩍 문을 열었다. 어두울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서재에는 밝았다.
그러나 그런 사실보다 내 눈길을 가장 먼저 끈 건 의자에 앉아 잠든 아빠의 모습이었다.
……어라?
늘 깨어 있던 모습만 보다 잠든 모습을 보니 당황스럽다.
조심스레 도로 문을 닫으려다 아빠의 고개가 꺾여 있는 게 눈에 띈다.
‘일어나면 아플 거 같은데.’
끄응, 고민하던 나는 결국 안으로 들어섰다.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상자를 내려놓은 나는 조심스레 아빠의 머리를 받쳤다.
‘안 깨게 조심…….’
탁, 내 손목을 붙드는 손에 나는 비명도 못 지를 정도로 깜짝 놀랐다.
그저 눈만 동그랗게 뜨고 아빠를 보는데 작은 읊조림이 들려온다.
“……어.”
“…….”
“내……어, 레일…….”
내 곁에 있어, 레일라. 제발.
아빠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입 모양을 따라 원래라면 들리지 않았을 읊조림이 또렷하게 읽혔다.
‘레일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들은 순간 바로 떠올랐다.
아빠의 죽은 전 부인 이름이 ‘레일라’라는 걸.
“……라.”
내 손목을 붙들었던 아빠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아빠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니 숨이 턱 막혔다.
‘울고 계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