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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97화 (97/125)

# 97화

리스테안이 손으로 제 얼굴을 부채질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좀 덥네요.”

저렇게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덥진 않은 것 같은데.

아무래도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인가 보다.

* * *

사절단이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카드릭의 생일 연회 날이 성큼 다가왔다.

“어제 얼굴에 꿀을 발라 드린 보람이 있네요.”

이른 오전부터 찾아온 샤비가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만족스레 웃었다.

“룩스 님과 슈가 님이 다 드시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참느라 힘들었어!

―맞아, 맞아! 우리 열심히 참았다고!

다들 잘 자는 줄 알았는데 참고 있었구나.

그 뒤로 샤비와 첼시는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게 많다며 날 이끌었다.

“연회는 저녁부터인데 오후부터 준비해도 되지 않아?”

“안 돼요. 지금부터 시작해야 다 끝낼 수 있어요.”

“평소에는 안 그랬잖아.”

“오늘은 평소와 다른걸요? 다른 나라의 사절단과 귀빈들이 많이 온다면서요!”

끄응, 틀린 말은 아닌데…….

엘피다 사절단에만 집중해서 몰랐는데, 엘피다 말고 다른 나라에서도 사절단을 보내온 모양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카드릭의 생일 축하해주러 온 듯하지만, 실상은 무슨 협정을 다시 논의할 때가 되어서라던가?

어쩐지 회귀 전에 카드릭의 성인식 때도 사절단이 왔다는 소리를 들은 적 없는데 이번에는 어쩐 일로 왔나 싶더라니.

리스테안은 공작이 견문도 넓힐 겸 겸사겸사 데려온 모양이지만.

“다 끝났어요, 아가씨. 다행히 딱 맞춰 끝냈네요.”

첼시가 전신 거울을 끌어다 보여줬다.

평소보다 피부와 머리카락이 반질반질하다.

아직 내가 어려 과한 화장은 피하는 게 좋겠다며 마사지를 열심히 하더니, 공들인 티가 난다.

“고마워. 다들 고생했어.”

“별말씀을요. 그보다 오늘 정말 예쁘세요. 언제 이렇게 다 크셨는지…….”

“샤비, 너 아까부터 그 말만 벌써 네 번째인 거 알아?”

“정말? 몰랐네.”

잔뜩 감격스러워하던 샤비는 첼시의 지적에 민망한 듯 웃으며 제 입을 가렸다.

‘첼시가 말려줘서 다행이야.’

아무리 칭찬이라도 같은 말을 여러 번 들으니 민망하던 참이었다.

그런 첼시에 대한 믿음은 곧 깨졌지만.

“그런데 네 심정도 이해는 돼. 처음에 뵐 때 워낙 어리셨으니까. 그리고 우리 아가씨는 늘 예쁘시지.”

첼시, 너마저……!

사실 돌이켜보면 이 두 사람은 내가 어릴 적부터 이랬다.

마치 마리 언니처럼 날 귀여워하며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했으니까.

“참, 이거까지 덮으셔야 해요. 워낙 추워서.”

샤비가 흰 털이 복슬복슬한 숄을 내 목에 둘러주었다.

두른 뒤에도 한쪽이 내 허리까지 내려올 정도로 크고 풍성한 숄이었다.

―베리한테 또 털 생겼다!

―우리랑 똑같아! 복슬복슬!

“헉! 안 돼!”

앞발을 든 룩스가 내 무릎을 짚고 고개를 쭉 뻗어 팔을 핥으려던 때다.

하필 숄에 룩스의 발톱이 걸리자 첼시가 기겁하며 룩스를 떼어내고 안아 들었다.

“긁으면 안 돼요. 귀한 흰 여우 털로 만든 숄이란 말이에요.”

―나 잘못한 거야?

―잘못했나 봐.

―힝.

“룩스 님은 점잖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완자랑 행동이 똑같네요. 완자도 제가 코트만 입으면 이렇게 긁으려 하더라고요.”

―뭐? 내가 그 녀석과 똑같을 리 없잖아!

―맞아! 그 싹수없는 개보다는 얘가 훨씬 낫지!

둘이 열심히 아우성쳤으나 첼시는 꿋꿋했다. 아마 들리지 않아서겠지만.

“그런데 아가씨, 연회에 아가씨 또래는 없다고 했던가요?”

“제국 귀족 중에는 없고, 타국 귀족 중에는 좀 있을 거야.”

황실에서 주최하는 공식 연회는 성인만 참여할 수 있었다. 타국의 귀빈과 황족과 그 방계까지는 특별히 예외지만.

대신 황족의 방계인 벨로크 대공가의 공녀로 참석하는 거라 오늘만큼은 엘피다 사절단 맞이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럼 엘피다에서 왔다는 공자님도 오시겠네요?”

“응, 맞아.”

“아가씨 생각에 그 공자님은 어떠신가요?”

“예의 바르고 착해.”

“다행이네요.”

샤비와 첼시가 만족스럽다는 듯 얼굴을 끄덕였다.

왜 둘한테서 아빠의 모습이 보이는 거지?

아빠도 이 비슷한 질문을 하고 저런 표정을 지었는데.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 걱정이라니까요.”

으악, 또 시작이다!

이번에는 첼시도 말리기는커녕 옆에서 “맞지, 맞지.”라며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해서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빠가 기다리시겠다. 나 이만 가볼게.”

“다녀오세요.”

―언제 와?

‘음, 조금 늦을 거야. 먼저 자고 있어.’

나는 룩스와 슈가의 머리를 차례대로 쓰다듬어 준 뒤 돌아섰다. 계단을 내려오자 집사가 보인다.

“내려오셨군요. 주인님은 마차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마워.”

집사한테 감사를 표한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워서인지 손을 비비던 마부가 날 발견하고는 마차 문을 열어줬다.

“저 왔어요, 아빠.”

“그래. 이제 가…….”

나를 본 아빠가 멈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

왜 저러시지?

내 의문을 눈치챈 건지 아빠가 작게 덧붙였다.

“…예쁘군.”

분명 칭찬인데, 어째 아빠의 표정은 말과 따로 노는 느낌이다. 오늘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드시나?

“엘피다에서 왔다는 공자가 착하다고 했던가?”

“네.”

“정말 그러길 바라지.”

또 리스테안에 대해 말씀하시네. 이전에도 저러시더니.

맥락 없는 주제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빠는 내 의문을 해결해주는 대신 창문 밖만 노려보듯 응시했다.

‘오늘 열심히 차려입으셨네.’

뒤늦게 나는 아빠가 입은 의복을 천천히 구경했다.

내가 걸친 망토처럼 하얀 여우 털이 부착된 푸른색 망토 아래, 금색 실로 수 놓인 하얀 연미복은 꽤 화려했다.

‘아빠도 저런 옷을 입긴 하시는구나.’

매번 어두침침한 옷만 입은 모습만 보다 지금의 모습을 보니 새롭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던데, 오늘처럼 그 말을 실감하기는 처음이다.

사람의 분위기가 저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다니.

저택에서 출발할 땐 노을이 지고 있던 창밖은 어느덧 어두컴컴하게 변했다.

가로등이 켜진 거리를 지나 멀리서 황궁의 모습이 보일쯤, 내부를 환히 밝힌 마차들이 줄지어 선 모습도 보였다.

‘마차가 많네.’

그동안 황궁에 드나들며 이렇게까지 마차가 줄지어 선 걸 본 적이 없는 만큼 꽤 생경한 광경이었다.

‘분명 생경한데 왜 어디선가 본 느낌이 들지?’

한참 되뇌던 나는 곧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회귀하기 전, 말롱 부인을 따라 처음 황구에 왔을 때 이런 광경을 봤다.

‘정말 오래 기다린 끝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읽을 책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우리가 탄 마차는 다른 마차들을 지나쳤다.

“어라?”

“왜 그러지?”

“아, 기다려야 할 줄 알았는데 지나쳐서요.”

“뭐하러 기다리지?”

아빠가 날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설마 한 번도 기다려본 적이 없… 을 수도 있겠구나.

“그러게요.”

하하, 어설프게 웃으니 아빠가 더 묻는 일은 없었다.

다른 마차들을 지나친 탓에 별 기다림 없이 우리는 바로 황궁 안에 들어올 수 있었다.

연회장 안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잔뜩 달라붙는다. 나도 모르게 움찔한 게 아빠에게까지 느껴진 모양이다.

“내 옆에 붙어 있어라. 떨어지지 말고.”

“조금도요?”

“조금도.”

장난기 섞인 내 물음과 달리 돌아온 대답은 꽤 진지했다.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아빠가 흡족한 얼굴로 내게 손을 내민다.

“함께 와주셔서 기뻐요.”

“약속했으니 당연한 것을.”

어, 그런가?

사실 정말 아빠가 동행해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더랬다. 또 저택을 비우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황제의 명이든, 고대 무기의 행방에 관한 실마리 때문이든.

‘나는 절대 아빠한테 ‘우선’이 될 수 없어.’

그동안 같이 지낸 정이 있는 만큼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아무 일이 없으니 나와 함께 와준 거겠지만.

‘그래도 좋아.’

모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아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듬직할 수 없다.

물론 연회에 오는 참석자 중에 카드릭과 리스테안도 있긴 했다.

문제는 그 둘은 아빠처럼 편하지 않다는 점이다.

리스테안이 제국에서 머무르는 동안 친근해지긴 했으나 스스럼없이 굴 정도는 아니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걸.’

그래서 며칠 전에 받은 파트너 신청도 거절한 참이었다.

카드릭은 음…….

“베로니카 양!”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돌아보자 한껏 반가워하며 내게 다가오는 리스테안이 보인다.

“아는 녀석인가?”

“엘피다에서 온 공자예요.”

“착하다던?”

끄덕끄덕.

“착한 건 모르겠지만, 대담하다는 건 알겠군.”

아빠가 팔짱을 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덧 가까이 온 리스테안이 아빠를 보더니 멈칫한다.

“옆에 계신 분은 혹시……?”

“네, 저희 아빠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리스테안 이곤입니다. 베로니카 양의 아버님을 뵙게 되어, 아, 제국어로 해야 하는군요. 음, 그러니까.”

“그건 제가 잘…….”

전달해드릴게요, 라고 말하려던 순간 아빠가 입을 열었다.

“벨로크 대공이라 불러주면 좋겠군.”

“예?”

어라?

“아버님 말고.”

아빠가 유창하게 엘피다 어로 말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리스테안은 물론이고 나도 놀라 쳐다보는데 아빠가 여전히 미간을 좁힌 채 말했다.

“그래서 공자가 우리 딸에게는 무슨 볼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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