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인사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공자의 볼일은 끝났군.”
“예?”
“방금 다 했잖은가? 인사.”
“아, 그게, 저…….”
아빠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리스테안이 마음에 안 드시는구나.’
사실 이 정도로 적대감을 띠는데 모르는 게 이상할 테다.
리스테안도 이를 느끼고 저렇게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거겠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 아빠가 저러면 좀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오죽 험악하셔야지.
나도 한때 아빠를 두려워했던 때가 있었던 만큼 괜히 리스테안이 느낄 불안에 동화되었다.
‘어쩔 수 없나.’
내가 나서는 수밖에.
나는 웃으며 아빠의 팔을 꼭 잡았다. 동시에 아빠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나마 아빠의 시선이 내게 머무르는 동안 나는 리스테안을 향해 말했다.
“아빠가 낯을 가리셔서요.”
“……?”
둘 다 믿지 않는 얼굴이다. 특히 아빠의 시선은 따갑기까지 했지만 모른 척했다.
“그럼 이만.”
“저, 사실은 인사만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아빠를 끌고 다른 곳에 가려는데 리스테안이 외쳤다. 그에 나도 아빠도 멈췄다.
“이따가 춤추고 싶습니다. 베로니카 양과 함께요.”
리스테안의 얼굴은 꽤 붉었다. 이미 몇 번 본 모습이라 새삼스러운 것 없는데 지금만큼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고려하지 않았던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으니까.
‘설마?’
사실 돌이켜보면 이제야 의심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긴 했다.
그렇지만, 정말로?
“공자의 용기는 귀감으로 삼을 만하지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 전에 아빠가 더 빨리 말했다.
“역시 어렵겠군. 내 딸은 아직 연회를 자유롭게 즐길 나이가 안 돼서.”
“나이가 안 된다는 게……?”
“황궁 연회는 성인만 참석할 수 있지. 예외적으로 참석하긴 했으나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그러니까, 아버님 말씀은.”
“벨로크 대공.”
“…베로니카 양은 성인이 아니라는 건가요?”
“그래.”
“그, 그럴 수가.”
왜 저렇게 당황하지? 딱히 나이를 밝힌 적 없지만 아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나도 리스테안의 나이를 정확히는 모르니까 충분히 오해할 법했을지도.
“정말 베로니카 양은 대단하군요.”
으, 응?
“연회에 참석하신다길래 성인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니었다니……. 아! 물론 저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을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 나이에도 타국의 언어를 유창하게 하는 건 대단한 일이잖아요.”
“내 딸이 대단하긴 하지.”
“맞습니다. 저는 못 하니까 더욱더 대단하게 느껴져요.”
“음.”
“게다가 아버님도 엘피다어를 이렇게 잘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베로니카 양이 아버님을 닮아 영특하군요!”
“공자는 관찰력이 좋군.”
저기요, 아빠?
아까까지만 해도 리스테안을 싫어하셨잖아요?
쉴 틈 없이 쏟아지는 리스테안의 칭찬도 낯부끄럽지만, 아빠까지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니 괜히 도망치고 싶어진다.
칭찬은 좋은 거라지만, 이건 과하다고요!
평소 칭찬에 인색하던 분이라 낯설기까지 하다. 오늘따라 대체 왜 이러는 건지.
“게다가 공녀는 엘피다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더군요. 저보다 아는 게 많으셔서 감탄……!”
“리안, 뭘 하는 거니?”
“아! 아버지.”
난감한 상황에서 날 구제해준 사람은 이곤 공작이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그가 상냥한 얼굴로 리스테안의 어깨를 감싸며 아빠한테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공 전하. 제 아들이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국 방문은 처음이라 많이 들뜬 모양입니다. 아무쪼록 너그럽게 봐주시길.”
“실례일 것까지야. 오히려 즐거웠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희도 요 며칠 공녀께 신세 졌습니다. 아름다운데 영민하기까지 하시니 자랑스럽겠습니다.”
나는 칭찬을 늘어놓는 이곤 공작을 멍하니 쳐다봤다.
이럴 수가. 말리러 온 게 아니라 거들러 온 거였어?
‘이쯤 되면 아빠가 말려주셔야 하는데……?’
흘긋 옆을 본 나는 보고야 말았다. 아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는 모습을!
심지어 이곤 공작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아빠의 고개도 움직였다. 누가 봐도 흡족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틀렸구나.’
이 칭찬이 언제까지 이어질진 모르겠지만, 웃으며 가만히 듣고 있으면 끝나겠지…….
낙담한 끝에 체념하려던 순간,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잔잔한 음악만 나오던 홀에 울린 나팔 소리에 절로 시선이 움직였다. 이윽고 위층에 있던 중앙 문이 열리며 황제 부부와 카드릭이 들어왔다.
황제는 싸늘하게 군중을 둘러봤다. 황제 부부의 뒤에 있는 카드릭의 눈빛 또한 황제와 다를 게 없었다.
어찌나 똑같던지 새삼 그가 황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상기될 정도였다.
‘앗, 눈 마주쳤다.’
방금까지 무료함만 가득하던 얼굴에 웃음기가 어리더니,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인다.
‘왔네?’
아마 혼잣말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설마 내가 입 모양을 읽을 줄은 모르고 한 혼잣말.
‘자기가 오라고 했으면서.’
그간 카드릭이 한 행동들을 떠올리니 더욱 기분이 묘했다.
불새를 통해 초대장을 주고, 몇 년 전 약속을 들먹이기까지 했으면서 내가 안 올 줄 알았던 걸까.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이들이 모이다니 감격스럽군. 특히 먼 길을 와준 이들도 있는 만큼 감사할 뿐이오. 황태자도 한마디 하는 게 좋겠지.”
“다들 참석해 주어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즐겨주시길.”
끝이야?
성격이 드러나는 간결한 인사였다. 과연 카드릭답다고 해야 할까…….
그보다 기분 탓인가? 계속 날 쳐다보는 것 같은데.
“뵙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인사하거라, 리안.”
고개를 끄덕인 리스테안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살짝 쥐고는 손등에 키스했다.
절도 있고 깔끔한 인사였다.
“아쉽지만 다음에 뵙겠습니다, 베로니카 양.”
이번에는 실수 안 하네.
첫 만남 때 리스테안이 한 실수를 떠올린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곤 공작과 리스테안이 돌아가기 무섭게 아빠가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가면 그 장갑은 버리는 게 좋겠군.”
“네? 왜요?”
“먼지가 묻었으니까.”
장갑을 확인해봤지만 먼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혹시 이곤 공작가를 조심해야 하나요?”
“그다지.”
끄응, 역시 리스테안이 마음에 안 드시는 건가.
“즐거워 보이셔서 공자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에요?”
“내가?”
아빠가 눈살을 한껏 찌푸리며 반문했다.
조금 전까지 누구보다 리스테안과 이곤 공작의 말을 경청하던 분은 어디 가셨죠?
“말을 잘하기에 내버려 뒀다만, 저 정도로는 부족하다. 생긴 것답지 않게 대담한 구석도 좀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서 마음에 든 건지 아닌지 도통 모르겠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문득 아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베리.”
익숙한 목소리.
뒤돌아보니 언제 온 지 모를 카드릭이 서 있었다.
“백부님도 계시네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생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미리 보내주신 선물도 잘 받았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괜찮은 분위기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카드릭과 아빠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정말 의외였다.
그때 카드릭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겠습니까?”
“춤?”
“싫어?”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나는 주저했다. 춤이야 출 줄 안다. 얼굴을 비추고 좀 있다가 돌아가면 될 줄 알아 예상치 못했을 뿐.
하필 조금 전에 리스테안의 청을 거절한 것도 신경 쓰였다. 내가 아니라 아빠가 거절한 거였지만.
“그건 어렵겠군.”
지금처럼 말이다. 보통은 아빠의 기세에 눌릴 텐데 카드릭도 만만치 않았다.
“저는 백부님께 여쭌 게 아닌데요.”
카드릭이 싱긋 웃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얄밉다는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네.
“미안하지만 아직 내 딸은 보호가 필요한 나이라.”
“그러지 말고 보내주시지요, 형님.”
갑자기 끼어든 음성에 나는 뻣뻣하게 굳었다.
아빠를 ‘형님’이라고 지칭할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설마 하며 소리의 근원지를 좇자 예상대로 황제가 보였다.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하나뿐인 형제인데요. 무엇보다…….”
황제가 주위를 훑었다.
“이 연회에서 제 조카님을 위협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감히 그런 일이 있을 거라 여기시는 겁니까?”
“…….”
“물론 형님께서 그런 생각을 할 리 없겠지만.”
분명 웃는 낯인데,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제야 나는 주위가 조용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해 다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는데 말이다.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많은 이목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내가 안일했어.’
이런 분위기가 될 줄 예상 못 한 건 아니었지만, 막상 마주하니 생각 이상으로 불편했다.
단순히 ‘카드릭’의 생일 연회라고만 생각할 일이 아니었는데.
“전해 듣기로 황태자와 조카님이 평소 잘 어울린다던데.”
황제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강렬한 붉은빛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시선이다.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만큼.
“아이가 어른들 사이에 껴서 무슨 재미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조카님도 황태자와 어울리는 쪽을 더 좋아할 겁니다.”
그렇지만은 않은데요.
저렇게 대꾸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용기까지는 없어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아버지께는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다르게 생각하는데요.”
“다르다?”
“베리는 제가 자기 또래라서 어울리는 게 아니라 저라서 어울리는 거거든요.”
카드릭의 말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얘는 우리 아빠한테만 싹수없는 게 아니라 자기 아빠한테도 그러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