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99화 (99/125)

#99화

“내 말이 맞지?”

“으, 응.”

맞지. 맞고말고.

나는 카드릭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아니면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길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손은 왜 내미는 거지?

“잡아.”

“응?”

“춤추러 가자.”

순간 당황했지만, 결정은 빨랐다. 카드릭의 손을 잡자 그가 눈매를 예쁘게 접으며 웃는다.

그 표정이 결국 이럴 줄 알았다는 것 같아 괜히 얄밉다.

카드릭을 따라가며 나는 아빠 쪽을 돌아봤다.

여전히 아빠의 표정은 풀릴 줄 몰랐지만, 딱히 우리를 붙잡지는 않는다.

아니, 붙잡지 못한 쪽에 가까울 터였다.

황제가 아빠한테 무어라 속삭이고, 아빠의 표정이 더욱더 매서워지더니 이윽고 둘이 어디론가 향한다.

‘어디 가시는 거지?’

아빠의 뒷모습을 보는데 카드릭이 내 손을 확 잡아당긴다.

“도와줬는데 나한테만 집중하는 게 어때?”

“……?”

“우리 아버지와 백부님 사이에 껴서 곤란했잖아.”

맞는 말인데, 왜 하나도 안 고맙지?

“그리고 발 밟히기 싫거든.”

“안 밟아.”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지.”

얘는 날 뭐로 보고!

물론 누군가와 춤추는 건 처음이라 자신 없긴 하지만…….

“백부님은 걱정할 거 없어. 잠깐 두 분이 할 얘기가 있을 뿐이니까.”

“뭐 때문인지 알아?”

“나야 모르지.”

뻔뻔한 대꾸였다. 카드릭이 황태자만 아니었다면 손등을 꼬집고 싶었을 만큼.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한숨을 내쉬며 한참 카드릭과 춤추는데 집중하던 때다.

“그나저나 이곤 공자와 친한가 봐?”

“응. 말이 잘 통해서.”

“나보다 더?”

콰악!

“헉!”

구두 밑창으로 느껴지는 감촉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멈칫한 나를 자연스럽게 이끈 건 카드릭이었다.

“안 밟는다더니?”

“네가 놀라게 했잖아.”

“내가 어쨌다고?”

“모르면 됐어.”

나는 다시 춤에 집중했다. 갑자기 얼굴을 왜 들이밀어서는!

평소 의식하지 않다가도 이렇듯 지나치게 다가오면 심장이 철렁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무렇지 않게 넘기기에는 나나 얘나 좀 컸으니까.

정작 이 사태를 벌인 원흉은 이런 내 반응마저 재밌다는 듯 웃고 있어 마음에 안 들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지?”

“응?”

“즐거워 보여서.”

“내가?”

“아니야?”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남의 발 밟아놓고 좋아할 리가…….

물론 그럴 때가 있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럼 그 녀석한테 왜 웃어줬어?”

“으, 응?”

그 녀석이라니?

영문 모를 소리에 카드릭을 쳐다보자 그가 눈살을 찡그린다.

“이곤 공자 말이야. 조금 전에도 웃어줬잖아.”

“그야 예의상으로…….”

“예의라고 하기에는 그 녀석과 있을 때 계속 웃던데.”

“그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아니, 그보다 발 밟아서 즐겁냐고 물어본 게 아니라 리스테안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야?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카드릭을 쳐다보던 때다.

문득 리스테안을 데리고 황궁 도서관에 갔을 적에 본 불새가 떠올랐다.

혹시 그때 우연히 길이 엇갈렸던 게 아니라 일부러 불새를 시켜서 지켜본 건가?

왜?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설마…….

‘내가 망명할 계획이란 걸 눈치채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카드릭이니까. 눈치가 오죽 좋아야지.

다행히 카드릭이 더 말하기 전에 곡이 끝났다.

“한 곡 더 출래?”

“아니.”

나는 카드릭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좀 더워서 바람 쐬고 싶어.”

“그래. 그럼.”

순순히 들려온 대답은 의외였다. 그와 멀어지고 싶었던 내게는 잘된 일이었지만.

나는 몸을 돌려 연회장을 나왔다.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과 저녁 바람이 꽤 날카로웠다.

‘따뜻하게 입고 와서 다행이야.’

뺨이 차갑게 변하는 만큼 흥분도 가라앉으며 이성도 돌아왔다.

‘카드릭이 눈치챘을 리 없는데 너무 흥분했어.’

엘피다에 과하게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준비하진 않아서 아직은 걸릴 게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혼자 바람을 쐬다 금방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또각또각.

저벅저벅.

참다못한 내가 돌아봤다.

마력석 박힌 가로등에서 은은히 흘러나온 불빛이 카드릭의 얼굴을 비춘다.

“왜 따라와?”

“따라가는 거 아닌데?”

“아니라고?”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거야.”

정말 뻔뻔한 대꾸였다.

연회장을 나와 정원까지 왔으면서 아니라고 우기기는!

“오늘 연회의 주인공이 자리를 지키지 않아도 돼?”

“상관없어. 네 말대로 내가 주인공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겠지.”

으, 묘하게 설득력 있어서 더 할 말도 없네.

나는 결국 카드릭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 * *

베로니카를 뒤쫓는 카드릭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가득했다.

‘역시 재미있어.’

자신답지 않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아무렴 다른 사람한테는 안 하는 행동들이었으니까.

정확히는 그러고 싶은 생각조차 안 든다는 것이었지만.

유치하고 이상하다.

그래도 멈추고 싶지 않다. 자신을 이렇게 만드는 사람은 베로니카뿐이니까.

그때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제 소환수인 피닉스와 비슷하나 다른 기운이다.

―주인의 자식이여.

곧 있어 불새가 그를 막아섰다. 제 부친의 불새였다.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은 피닉스와 닮았으나 그 크기만큼은 훨씬 더 커다랬다.

―이만 돌아와 자리를 지켜라. 주인의 뜻이다.

“신경 안 쓰실 줄 알았는데.”

매해 의례적으로 열리는 생일 연회 때 황제는 그가 일찍 돌아가던 자리를 지키던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자리를 지키라니.

하기야 올해는 평소와 다르긴 했다. 타국의 귀빈들이 잔뜩 와 있었으니까.

“베…….”

카드릭은 베로니카한테 알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자신이 부친의 불새를 보고 멈춰있던 동안 베로니카는 계속 나아간 꽤 멀어져 있었다.

‘같이 연회장으로 돌아가자고 해봤자 안 그러겠지.’

처음부터 혼자 걷으려던 베로니카의 산책길에 억지로 합류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지금도 베로니카는 뒤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었다.

벌어진 거리가 마치 자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느낌이다.

그 모습에 섭섭해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다.

어차피 베로니카는 자신을 거부하지 못할 거란 걸 아니까.

그 자만감이 카드릭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주인의 자식이여.

“갈 거야.”

재촉하는 불새의 말을 끊은 카드릭은 연회장 쪽을 향해 돌아섰다.

* * *

‘왜 조용하지?’

말을 안 걸어서가 아니다. 인기척도 딱히 안 느껴져 이상함을 느낀 나는 돌아봤다.

“어라?”

어디 갔지?

아무도 없는 휑한 정원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라오지 말라고 할 때는 기어코 따라오더니 언제 가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별 상관없지만, 있다가 없으니 허전하고 섭섭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갈 거면 말하고 가지.’

하여간 자기 마음대로라니까.

나는 망토를 움켜쥐었다. 슬슬 추운 게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쯤이면 아빠도 황제랑 얘기가 끝났을 테고.’

부지런히 돌아가던 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비틀거리는 중년 남자가 보인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쳐가려던 때다.

남자가 내 팔을 붙들었다.

‘뭐야?’

당황해 남자를 쳐다보기도 전에 술 냄새가 코끝을 쏘아붙였다. 지독한 냄새였다. 절로 얼굴이 찡그려질 만큼.

뿌리치려 했으나 남자의 손아귀 힘은 강했다.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며 걷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내가 실례했군.”

그래도 상식은 있나?

순순한 사과는 의외였지만 그래도 미심쩍었다. 내 팔을 붙잡은 손아귀 힘은 여전했고 시선은 꺼림칙했으니까.

게다가 자꾸만 기시감이 느껴졌다. 단순히 불쾌해서라고 생각하기에는 이상했다.

“어느 가문의 영애지?”

“벨로크.”

“벨로크?”

남자는 내 말을 곱씹더니 ‘아!’하고 혼자 감탄했다.

“그 미치광이 대공 가문?”

가문을 순순히 밝힌 건 듣고 도망갈 줄 알아서였다.

그런데 도망가기는커녕 히죽거리는 모양새라니.

“그렇다면 약혼자는 당연히 없겠군? 문제 될 게 없겠어.”

대체 무슨 말을……!

그때 남자가 내 팔을 잡은 채 움직였다. 뿌리치기 위해 다른 손으로 남자를 붙들었지만, 오히려 끌려가기만 할 뿐이었다.

“놔!”

“걱정하지 말라고. 책임은 확실히 져줄 테니까. 아가씨도 미치광이 대공가보다 내 부인이 되는 게 나을 거야.”

제정신이 아니야.

평소 같으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생각해볼 텐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새하얗고 몸이 뻣뻣하게 굳기만 했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이상한 기시감……. 아니, 기시감이 아니다. 분명 겪어본 적 있는 상황이었다.

“대신 그 건방진 버르장머리는 버리는 게 좋겠어. 아랫것들한테는 그래도 되지만, 남편 될 사람한테는 그러면 안 되지.”

“남편……?”

“아, 그래. 내 이름은 알려줘야겠지.”

남자가 히죽거리며 웃었다.

“바루투 소르겐.”

낯익은 성에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설마, 소르겐 백작?”

“내 작위를 알고 있다니 의외로군. 크흠, 내가 좀 유명하긴 하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자만이 흘러나왔다.

같잖은 모습이었지만, 내 몸은 더욱 얼어붙기만 했다.

소르겐 백작.

어떻게 이 인간을 잊고 있었을까. 회귀하기 직전에 이 인간이 나한테 하려던 짓이 있는데.

시기만 달라졌을 뿐, 똑같이 반복되려는 상황에 몸이 덜덜 떨렸다.

분명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많이 달라졌는데 어째서……. 어째서 꼼짝도 할 수 없는 거야?

그저 몸 끝에 힘을 준 채 버티고만 있는데 백작이 인상을 찡그리더니 날 내동댕이쳤다.

“진짜 귀찮게!”

“악!”

“그래. 꼭 멀리 갈 필요 없지. 중요한 건 아니니까.”

백작이 저열하게 웃으며 재킷을 벗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

“어딜!”

백작이 내 망토를 붙잡는 바람에 도로 고꾸라졌지만.

“점잖게 굴어줄 때 얌전히 있어. 내가 은혜를 베풀어주겠다는데…… 컥!”

히죽대며 나를 억압하던 백작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백작이 옆으로 볼품없이 쓰러졌다. 연이어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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