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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01화 (101/125)

#101

‘배려해준 건가?’

사실 웬만큼 다 들은 것 같긴 하지만, 생각지 못한 배려라 나는 눈만 깜빡였다.

날카롭게 부는 바람을 따라 내 머리를 덮은 재킷도 펄럭였다. 미하엘 경이 손을 뻗어 내 귀 위를 정확히 덮었다.

재킷이 날아갈까 걱정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것도 배려의 연장인지 모르겠지만…….

두근두근.

그의 손에 뒤덮여 막힌 귀에서부터 시작한 맥박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낯선 향기가 코끝을 맴돈다. 아마도 미하엘 경한테서 나는 향기일 터였다. 답지 않은 향기로운 냄새였다.

먼젓번에 만났던 그에게서는 향기가 안 나거나 피비린내를 물씬 풍기고 있었으니까.

문득 미하엘 경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온다. 베스트의 범위를 벗어난 팔을 감싼 건 얇은 셔츠뿐이라 추워 보였다.

내게 재킷을 벗어주느라 저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양심에 가책이 왔다.

저들의 대화에 충격받긴 했으나 감당할 수 있는 범위였다. 이렇게까지 배려해줄 필요가 없었다.

“괜찮아요. 별로 신경 안 쓰이니까 경이 입으세요.”

재킷을 돌려주려 했지만, 미하엘 경은 손을 떼기는커녕 힘을 풀지 않았다.

“내가 신경 쓰여.”

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놀라 고개를 들자 마찬가지로 놀란 듯한 미하엘 경의 얼굴이 보인다.

내가 잘못 봤나 싶을 정도로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그러니 덮고 있어.”

내가 들을 줄 알고 일부러 말한 건지, 아니면 못 들을 줄 알고 저런 건지 모르겠다.

미하엘 경이 내 귀에서 손을 뗀 건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후였다.

조금 크게 떠들던 이들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

적막한 밤공기만이 정적을 이어가던 때, 미하엘 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모레 황궁 도서관으로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네.”

“그리고 아까 그 남자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보십시오.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맞다, 소르겐 백작! 또 잊고 있었다!

“저도 같이!”

“대공 전하께서 찾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더는 이목을 끌지 않는 게 좋을 테고.”

그런가?

하긴, 솔직히 말해 소르겐 백작과 굳이 조우하고 싶지 않았다. 나 대신 싫은 일을 하겠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없긴 했다.

나는 재킷을 끌어내려 미하엘 경에게 내밀었다.

“잘 부탁드려요.”

재킷을 받은 미하엘 경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데 왜인지 시선이 쉬이 떨어지질 않았다. 내 머리를 덮었던 온기는 이미 식은 지 오래인데도.

* * *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달콤한 향이 밤공기와 함께 섞여 들어온다. 베로니카한테서 재킷을 돌려받은 뒤부터 내내 이랬다.

잠깐 빌려줬을 뿐인데 밴 냄새에 미하엘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처음 맡는 향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연회장에서 만난 귀족 영애들로부터 종종 맡은 적 있으니까.

분명 그때는 별 감흥 없었다. 아니, 사실 어떠한 향을 맡아도 그의 감흥을 일으키는 향은 없다고 봐야 분명했다.

그런데 베로니카의 향이라 생각하니 자꾸만 기분이 묘해졌다.

가슴이 간질거려 싫은데 또 싫진 않고, 계속 거슬려 떨쳐내고 싶다가도 내내 사로잡혀 있고 싶다.

제 감정인데도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묘한 감정이다.

베로니카를 보고 있으면 이랬다. 그럴 필요까지 없는데 저도 모르게 움직이고, 계획 없이 비효율적으로 변한다.

지금처럼.

“전부 실토……. 전부…….”

미하엘은 아까 그대로 바닥에 누워 앵무새처럼 읊조리는 소르겐 백작을 내려다봤다.

사지를 마비시키는 독을 바른 침을 찔러두긴 했지만, 몇십 분이면 풀리는 독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러고 있는 건 술기운에 독이 더 독하게 펴져서일 테다.

아마 마비가 풀리면 세뇌한 대로 알아서 황실 기사를 찾아가 제 행동을 실토할 게 분명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그러다 세뇌가 풀리면 자신은 그런 적 없다며 발뺌하리라.

좋든 싫든 베로니카 역시 구설에 휘말릴 터였다.

저야 그런 일에 무감각하다지만 베로니카는 아닐 터였다.

아까 발코니 밑에 있었던 일만 봐도 그렇다. 벨로크 가문에 대한 평가에 충격받은 듯 어깨를 떨던 베로니카의 모습이 자꾸 아른거린다.

무시하면 그만인데.

“왜 그럴 수 없을까.”

작게 읊조린 미하엘은 소르겐 백작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전부 윽, 실토……. 으윽, 전부…….”

“일어나서 따라와.”

“예, 일어나서…….”

미하엘이 머리를 놓자 소르겐 백작의 머리가 땅에 닿았다.

쿵!

울린 소리만큼 제법 아플 텐데도 소르겐 백작은 신음만 흘릴 뿐, 곧 비틀거리며 일어나 미하엘을 따라 걸었다.

제법 높이가 있는 계단에 도달한 미하엘이 소르겐 백작의 머리를 잡아 돌렸다.

으드득-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그의 몸이 축 늘어지더니 앞으로 쓰러졌다.

미하엘이 옆으로 비켜나자 지지할 곳을 찾지 못한 육체가 계단을 굴러떨어졌다.

* * *

연회장에 들어서자 익숙한 소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워낙 시끄러운 탓에 대화 소리까지 알아듣기는 어려웠지만, 내 쪽을 흘긋거리는 시선들로 보건대 나와 관련된 주제인 듯했다.

‘발코니 밑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한 대화일까.’

생각만으로 썩 불쾌하다. 나는 자꾸만 일그러지는 얼굴을 억지로 폈다.

연회장에 멋모르고 들어왔던 때가 그리워질 지경이다.

그나저나 기분 탓인가?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은데.

“베로니카.”

뒤돌아보자 예상대로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나를 위아래로 훑던 아빠가 미간을 좁혔다.

오랜만에 풍기는 아빠의 험악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긴장되었다.

“누가 널 건드렸지?”

“네?”

헉! 어떻게 아셨지?

당황해 눈을 깜빡이는데 아빠가 내 드레스에서 나뭇잎을 떼어냈다.

다 바스러져 가는 갈색 나뭇잎에는 진흙 같은 덩어리가 굳어 있었다.

‘아……. 아까 넘어졌을 때 묻었구나.’

하지만 원인을 찾았다고 마냥 태평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말해. 누구냐.”

움찔.

아빠의 표정 자체는 무표정이었으나 살기 담긴 저음에 괜히 등골이 오싹해진다.

“돌아가서, 말씀드릴게요.”

숨길 생각은커녕 어차피 다 말할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보는 눈이 많아 굳이 여기서 소르겐 백작과 있었던 일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아빠의 팔을 잡고 살살 흔들었다. 여전히 풍기는 기운은 험악하기 짝없지만, 그래도 눈빛은 약간 누그러졌다.

우리는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카드릭과 황제 부부한테 인사하는 건 그럴 필요 없다며 기각당했다.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다소 어색한 침묵을 견뎌낸 뒤,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아빠는 사용인을 모두 물렸다.

“이제 말해. 누가 그랬지?”

“소르겐 백작이라는 남자가 그랬어요.”

“소르겐 백작? 처음 듣는데.”

아빠가 미간을 좁혔다.

새삼스러운 반응은 아니다. 내가 알기로도 소르겐 백작 가문은 원래 지방에 별 이름 없는 가문이었으니.

가진 영토도 비루하고 명성도 적어 잘 알려지지 않은 지방 귀족 가문.

그러나 소르겐 백작은 달랐다. 원래 귀족이 아니었던 그는 암흑가에서 벌이는 불법 사업에 뛰어난 수완을 보이며, 재정난에 몰린 소르겐 가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부인은 병으로 일찍 죽었다던가 그랬던 것 같다.

어쨌든 그 뒤로 당당히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린 그는 여전히 활동하며, 셰인트 백작의 눈에 들어 화합했다.

덕분에 셰인트 백작의 딸인 말롱 부인과 친분을 갖게 됐다.

‘자작저를 드나들며 말롱 부인의 수족이었던 나를 눈여겨보고 그런 요구를 했던 거겠지.’

벌써 몇 년 전 일이건만 다시 떠올리자 끔찍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조금 전에 비슷한 일을 겪을 뻔해 더 생생한 것 같기도 하다.

이번 삶에서는 아빠에 의해 셰인트 백작가와 말롱 자작가가 멸문했으니 오늘 소르겐 백작의 행동은 전부 우연일 터다.

‘그런데도 나와 마주치자마자 전과 같은 짓을 반복하려 하다니…….’

정말이지, 한결같이 불쾌하고 끔찍한 인간이다.

“바깥바람을 쐬다 돌아가는데 마주쳤거든요. 다짜고짜 저를 끌고…….”

“……?”

막힘없이 말하던 나는 멈칫했다. 내 입으로 소르겐 백작이 한 일을 털어놓기란 조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끌고 가서 제게 결혼을 운운하며 강제로 접촉하려 했어요.”

음, 순화해서 말하긴 했는데 알아들으셨으려나?

흘긋 아빠의 눈치를 살핀 나는 히익 숨을 삼켰다.

“그 새끼가.”

“…….”

“소르겐 백작이라고 했나?”

“…히끅.”

“걱정하지 말고 자고 있어라. 금방 돌아오지.”

아빠의 주변으로 붉은빛이 반짝였다.

오랜만에 보는 빛이었지만 보자마자 알았다. 아빠가 마법을 쓰려고 한다는 걸!

“진정! 히끅! 진정하세요!”

나는 일단 아빠의 팔을 붙잡았다.

으아아! 이놈의 딸꾹질은 왜 자꾸 나오는 거야!

“그 새끼를 가만두라고?”

“아니요. 그건 아닌데.”

솔직히 아빠가 좀 도와줬으면 했기에 이런 반응이 영 싫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더는 아빠가 나 때문에 소란에 휩쓸리는 건 싫어.’

몇 년 동안 강제로 지방에 가 있었던 것도 전부 나 때문이었다. 셰인트 백작과 말롱 자작가를 함부로 멸문시켜서.

소르겐 백작 또한 그러면 황제가 어떻게 이용할지 몰랐다.

“미하엘 경이 도와줬어요! 황실 기사한테 넘겨졌고요!”

황실 기사한테 넘긴 건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러지 않았으려나?

……는 잠깐.

소르겐 백작은 암흑가와 연관된 사람이고, 실베스터 가문도 암흑가 아니야?

몇 년 전 지하 시장에서 미하엘 경을 봤잖아? 어떻게 보면 자기네 사람인데 순순히 체포되도록 놔둔다고?

하지만 미하엘 경이 날 도와 소르겐 백작을 억압했잖아? 단순히 날 안심시키려는 거였나? 재킷을 덮어준 것도?

혼란이 밀려왔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빠의 스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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