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꼭 한번 엘피다에 오고 싶다고 하셨죠.”
“네, 맞아요.”
“만약 엘피다를 방문한다면 그때는 제게도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기회라면…….”
“이번은 허락받지 못했지만, 다음에는 베로니카 양과 꼭 춤추고 싶어요.”
고백이 아니구나. 이거나 그거나 비슷한 것 같긴 하지만.
직접적이지만 않을 뿐, 잔뜩 티 내고 있어 그의 감정을 모른 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러잖아도 신경 쓰이던 주제가 언급되자 죄책감마저 들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아빠의 주장을 꺾는 건 조금 어려워서요. 황태자 전하는 사촌이라 봐주신 모양이에요.”
“알아요. 그리고 따지는 거 아닙니다. 애초에 그럴 자격이 없죠. 제가 뭐라고요.”
“그래도 신경 쓰여서…….”
“정 마음이 쓰이신다면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엘피다에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저를 찾아오겠다고요. 베로니카 양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표면으로는 가벼운 약속 같아 보이나 리스테안의 감정을 알아차린 지금은 가볍게 여기기 어려웠다.
‘고의인 걸까?’
계획이라면 지략이다. 순둥순둥하게 생겨서는!
‘그래도 엘피다에 방문했을 때 도움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 없지.’
짧은 갈등 끝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기다릴게요. 다시 보게 될 그 날까지.”
리스테안이 웃었다. 그에게 잘 어울리는 맑은 미소였다.
* * *
그 뒤로 우리는 정원을 조금 걷기로 했지만, 리스테안의 아버지인 이곤 공작의 등장으로 계획은 무산됐다.
엘피다로 돌아가기 전에 함께 시가지에 가서 공작 부인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한다나?
나도 동행하려 했지만. 아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공작의 의견으로 인해 반려됐다.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일정이 끝나 시간이 남았다.
우선 황후궁으로 돌아간 나는 마침 보이는 데보라 부인에게 행정부에 다녀와도 되냐고 물었고, 그녀는 흔쾌히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소르겐 백작 소식은 어떻게 알아봐야 하지?’
내일 미하엘 경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당장 궁금한데. 솔직히 미덥지 않기도 하고.
황후궁을 나오며 불현듯 떠오른 궁금증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때다.
문득 익숙한 은발 소년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카드릭이다.
‘쟤 또 왔네.’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스윽 보니 미하엘 경은 안 보인다. 또 혼자 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카드릭은 소르겐 백작의 처우가 어떻게 됐는지 알지 않으려나?
나는 내 쪽으로 걸어오는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카드릭!”
내가 답지 않게 굴어서일까, 카드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날 반기는 거야?”
“응. 너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
“소르…….”
아니지. 소르겐 백작에 대해 아느냐고 물으면 모를 게 분명해. 저 성격에 지방 귀족의 이름까지 꿰뚫고 있을 리 없잖아.
“혹시 어제 구금된 귀족에 대해 알아?”
“그런 일이 있었어?”
되레 돌아온 질문에 순간 당황했다.
‘미하엘 경이 안 넘긴 건가?’
단순히 카드릭이 관심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미하엘 경과 소르겐 백작 간에 암흑가라는 공통점이 얽힌 만큼 의구심이 들었다.
“어제 누가 죽은 건 아는데. 소르겐 백작이랬나?”
“어?”
누가 죽어?
“진짜? 어제 죽었다는 귀족이 소르겐 백작이야? 술에 취해 계단을 굴렀다는 귀족이?”
“중요한 사람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다른 의미로 당황스러운 것도 마찬가지다.
어제 사건의 당사자가 소르겐 백작이라니.
더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져 마음이 홀가분해졌지만, 한편으로는 허무했다.
이렇게 쉽게 사라질 사람이었는데, 뭐 때문에 나는 고통받았던 건지.
“그래서 묻고 싶은 건 이게 끝?”
“응. 해결됐어.”
“실망이네. 궁금한 게 있다길래 나에 관한 건 줄 알았는데.”
카드릭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그를 몰랐다면 진심으로 상처받았다고 여겼을 정도로 섭섭해 보인다.
“내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는 안 궁금했어? 어제 그렇게 가버렸는데.”
맞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날 놀리며 따라오더니 갑자기 혼자 돌아갔지? 그 때문에 소르겐 백작과 곤란한 일이 생겼고!
물론 저 일이 카드릭의 탓이라 여기진 않는다.
카드릭이 따라오든 안 따라오든 어차피 난 나갔을 테니까.
“아니면 날 신경 못 쓸 정도로 재밌는 일이 있었다던가.”
“재밌는 일이라니?”
“이곤 공자와 어울린 거 아니야? 말이 잘 통한다며.”
또 리스테안 얘기네.
“안 어울렸어. 그리고 사절단은 내일 일찍 돌아간댔으니 이제 만날 일 없어.”
“정말이야?”
“그렇대도.”
어째 기뻐 보이는 듯한데 기분 탓인가?
집요하게 쳐다보자 카드릭이 방금까지 들뜬 듯한 기색을 싹 지운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섭섭하네. 내가 보고 싶어서 반긴 줄 알았는데.”
지금 섭섭해야 할 건 얘가 아니라 내 쪽 아닌가?
말없이 돌아간 주제에!
평소에도 워낙 제멋대로라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또 날 놀리려는 뻔뻔한 낯짝을 보니 나답지 않은 충동이 솟구쳤다.
“보고 싶었는데?”
“어?”
“네가 보고 싶었다고.”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뻔뻔한 그의 말장난에 넘어가지 않은 내 대꾸가 자랑스러울 뿐.
이래봤자 평소처럼 여유롭게 웃으며 또 날 놀리려 들 줄 알았는데……?
‘왜 뒷걸음질 쳐?’
나는 주춤하더니 내게서 빠르게 멀어지는 카드릭을 황당한 눈으로 좇았다.
심지어 그는 손으로 제 입을 막기까지 했다.
덕분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나는 카드릭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살짝 커진 그의 눈을 보고 놀랐다는 걸 짐작할 뿐.
“……?”
내 말이 저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인가?
생각보다 격한 반응에 나도 당황했을 무렵 카드릭한테서 먼저 반응이 돌아왔다.
“수업이 있다는 걸 잊었네. 다음에 봐.”
그러더니 휙 돌아서 빠르게 멀어진다.
마치 달아나는 듯한 모습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 * *
다음 날 예정대로 엘피다 사절단은 제국을 떠났다.
사절단이 떠났으니 여유로워질 줄 알았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황제가 나를 만나고 싶다며 부른 것이다.
‘이렇게 바로 부를 줄은 몰랐는데.’
어제 나는 룩스에 대한 서류를 제출하는 대신 황제를 만나고 싶다고 청했다.
룩스가 평범한 동물이 아니라 마수라는 게 떠올라서였다. 나한테야 예전에도 지금도 룩스는 룩스일 뿐이지만, 다른 사람한테까지는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마수라고 적어 제출하면 이어질 파장이 작진 않을 테니 직접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황제한테 내 능력을 밝혀야 하는 게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소르겐 백작이 죽었다고 해도 앞으로도 위험한 일은 있을 수 있고, 아무것도 못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그래도 황제를 만나는 건 늘 긴장돼서 그의 집무실 밖을 서성이던 때다.
“이만 들어오면 좋겠군요. 기껏 준비한 홍차가 식을 텐데.”
깜짝이야!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계속 닫혀 있던 집무실 문도 활짝 열려 있다.
황제와 눈을 마주한 나는 집무실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잊고 고개를 숙였다.
“베로니카 벨로크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우선 안으로 들어오고.”
황제가 손을 까딱거리자 누군가에게 떠밀리듯 내 몸이 움직였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다시 문이 닫혔다. 황제는 나를 자신의 맞은편 소파에 앉힌 뒤에야 입을 열었다.
“조카님께서 절 뵙고 싶다고 청하셨다고?”
“네, 폐하.”
“딱딱하군요. 편하게 숙부라고 부르세요.”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네, 숙부님.”
……는 할 수 있다.
절대 황제가 무서워서는 아니다. 그와 오래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고분고분한 태도를 유지하는 게 좋을 테니까.
“용건을 듣고 싶은데.”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저럴 때 보면 카드릭과 똑같은데 묘하게 이질적이라 적응 안 된다.
“제 마수가 황궁에 출입하고, 자유롭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마수?”
한껏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황제가 갑자기 정색했다.
“마수가 위험한 종만 있는 게 아니라지만, 대부분은 위험하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요. 게다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
“통제할 수 있는 마도구를 채워뒀어요. 사람을 해치지 않을 거예요.”
“조카님의 확신이 이해가 안 되는군요. 마도구가 없다면 통제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아니요. 마도구가 없어도 통제할 수 있어요.”
“요컨대 테이머라는 소리군요. 우리 조카님이.”
최대한 쏙쏙 피해 다녔는데 이걸 알아내다니.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가 검지 끝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렸다.
“테이머라……. 테이머…….”
혼자 읊조리던 황제가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형님이 재밌는 걸 주우셨군요. 외양만 닮은 줄 알았더니 능력까지 닮았을 줄이야.”
주어는 없었으나 나는 황제가 내게서 누굴 보는지 알 수 있었다.
‘아빠의 죽은 부인을 떠올리고 있겠지.’
전에도 황제가 날 보며 비슷한 말을 했던 만큼 유추하기 쉬웠다.
하지만 기쁘기는커녕 불쾌하기만 했다. 나는 그저 ‘닮은 것뿐’이니까.
황제 또한 알고 있으니 저렇게 재미난 장난감 보듯 날 쳐다보는 것이리라.
“그런데 소르겐 백작도 죽었는데 굳이 마수가 필요한 이유가 궁금하군요.”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소르겐 백작에 관해 얘기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설마 생각을 읽는 마법도 있나?
“생각을 읽는 마법은 아니고.”
움찔.
“우리 조카님은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지라.”
“…….”
“그런 마법이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듯싶지만, 아쉽게도 그런 건 없군요.”
“그럼 소르겐 백작 일은 어떻게 아시는…….”
“오늘 조카님을 만난 게 그 때문도 있으니까요. 말 나온 김에 바로 묻지요.”
황제가 날 보며 물었다.
“실베스터 공자가 소르겐 백작을 죽였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