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네?”
소르겐 백작은 술에 취해 계단을 잘못 굴렀다고 하지 않았나?
왜 나한테 미하엘 경이 죽인 걸 봤느냐고 묻는 거지?
생각지 못한 질문에 눈만 깜빡거리자 황제가 살짝 웃었다.
“아는 게 없나 보군요.”
“미하엘 경이 소르겐 백작을 죽였나요?”
“글쎄요.”
의뭉스러운 대답이 답답하다.
그래서 했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미하엘 경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 암흑가의 사람이니 누굴 죽이는 것쯤은 거리낌 없겠지. 처음 본 그때처럼.
동시에 모순이기도 했다. 죽은 사람이 소르겐 백작이니까.
그가 소르겐 백작을 죽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소문대로 술김에 계단을 잘못 굴러 죽었다고 생각한 건데…….
‘황제는 왜 저런 질문을 한 거지? 짚이는 게 있으니 그럴 텐데.’
나름대로 생각해보지만, 황제의 속내를 헤아리기란 어려웠다.
“어쨌든 조카님의 청은 그 마수를 직접 보고 결정하지요. 내일 마수를 데리고 오세요. 만약 내가 허락한다 해도 황후한테는 별도로 허락받아야 할 겁니다.”
“네, 명심할게요.”
고개를 끄덕이자 황제가 이만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집무실을 나온 나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황제와 단둘이 만나는 건 정신적으로 고된 일이었다.
‘그래도 룩스 건은 생각보다 긍정적이라 다행이네.’
완전히 허락받은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괜찮지 싶다. 딱 잘라 안 된다고 할까 걱정했으니까.
황제궁을 나오는데 작은 돌멩이가 내 발치로 날아왔다.
아주 얕게 지면을 스치는 게 누군가 물수제비뜬 듯하다.
“……?”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돌멩이의 정체에 나도 모르게 날아온 쪽을 살피게 됐다.
꺾인 담벼락 끝에 익숙한 제복 끝자락이 잠깐 보였다 금방 사라진다.
‘미하엘 경?’
그러고 보니 오늘 낮에 만나기로 했지.
약속을 잊지 않고 펜던트를 챙겨오긴 했다. 황제와 만나는 것 때문에 엇갈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알아서 찾아와주니 나야 좋지만.’
미하엘 경이 있는 쪽으로 가던 나는 몇 걸음 옮기다 말고 멈칫했다.
‘함정이면 어떡하지?’
그럴 확률이 낮긴 하지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설령 진짜 미하엘 경이라 한들 이렇게 따라가도 되는지 의문이다. 날 돕긴 했지만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곁에 룩스가 있었다면 안심됐을 텐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때다. 내가 고민하는 걸 눈치챘는지 숨어 있던 미하엘 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도 내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결국 그가 먼저 다가온다.
“공녀.”
별 의미 없는 평범한 부름인데 가슴이 빠르게 뛴다.
“잠시 함께 걸으시겠습니까.”
그냥 여기서 말하자고 해야 하는데.
“……네.”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미하엘 경에 대해 두려워했으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하고 우스운 일이나 이미 미하엘 경은 다시 담벼락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 원래 나를 유인하려 했던 담벼락을 돌자마자 미하엘 경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펜던트는 갖고 오셨습니까?”
“잠시만요.”
나는 치마에 달린 주머니에서 황금 사슴 문양이 그려진 펜던트를 꺼냈다.
어제 이걸 어디에다 뒀는지 헷갈려 찾느라 고생했더랬지.
그래도 이것만 건네면 앞으로 이런 식으로 얽힐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후련했다.
“여기요.”
빨리 건네주고 돌아서야지.
나는 미하엘 경에게 펜던트를 내밀었다.
펜던트만 받고 떨어질 줄 알았던 것과 달리 그가 내 손을 뒤덮듯 움켜쥐었다.
움찔.
갑작스러운 접촉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철렁 곤두박질쳤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손을 내빼려 했으나 미하엘 경은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날 담벼락 쪽으로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가둬진 듯한 품이 짐짓 당황스럽다.
‘왜 이러는 거야?’
두렵다. 이 남자가 무서워.
하지만 동시에 이대로 있고 싶기도 했다. 속이 지나치게 간지럽고 울렁인다.
뭐지, 이 기분?
묘한 감정이 생경하다 못해 이상했다. 당장 이 기분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날 봐.”
작은 읊조림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들렸다.
“황제가 나와 관련된 뭔갈 묻지 않았어?”
“하나 묻긴 했는데……. 내가 가르쳐줄 이유는 없잖아요.”
“말하는 게 좋을걸.”
낮게 깔린 속눈썹 아래 잠긴 금색 눈이 맹수의 것처럼 위협적이다.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기류에 나도 모르게 꿀꺽, 하고 목울대가 움직였다.
“경이 소르겐 백작을 죽이는 걸 봤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아는 게 없으니 모른다고 했고요.”
“다른 얘기는?”
“나머지는 제 개인적인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진짜예요? 소르겐 백작을 죽였어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미하엘 경이 날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가 그랬다면?”
“왜요?”
“왜 그랬을 것 같아?”
툭, 이마가 가볍게 부딪친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다.
내가 숨도 못 쉬고 가만히 있자 그가 읊조렸다.
“나도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다.
자신이 죽였다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게 말이 되나?
게다가…….
‘그쪽이 소르겐 백작을 죽일 이유는 없잖아.’
묻고 싶은 말이 많다. 그러나 여전히 날 선 눈빛에 전부 삼킬 수밖에 없었다.
“황제한테 말할 거야?”
도리도리.
내가 고개를 내젓자 그제야 그가 내게서 떨어졌다.
동시에 내 손에 있던 펜던트가 스르륵 빠져나간다.
그 뒤로 미하엘 경은 이렇다 할 말 없이 돌아섰다.
혼란에 빠진 나는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 응시할 뿐.
* * *
퍼억!
미하엘의 머리를 때린 화분이 물과 함께 조각조각 터지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뚜욱, 뚝.
맞은 부위가 화끈거린다.
‘찢어졌나.’
미하엘은 젖은 제 머리카락 끝으로 떨어지는 붉은 물을 의미 없이 응시했다.
딱히 놀랍진 않다. 집무실 문을 여는 순간, 물건이 날아올 거란 걸 예상하고도 비키지 않은 건 제 선택이었으니.
“너답지 않은 실수를 했더구나.”
단조로운 음성에 그제야 미하엘은 느릿하게 시선을 들었다.
그와 닮지 않은, 제법 지적인 얼굴의 중년 남자가 태연하게 책상에 쌓인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게 보인다.
바닥에 떨어져 깨진 화분과 달리 그의 주변은 정갈했다.
조금 전 노여움에 가득 차 화분을 던진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남자는 차분해 보였다.
제 아들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데도.
“나는 내 아들을 실수나 하는 열등한 것으로 키운 적 없는데 말이다. 황제가 우리를 의심하기 시작했어.”
“……황제가 직접 나설 줄 몰랐습니다.”
“몰랐다고? 그럴 리가 있나.”
하하, 낮게 웃은 실베스터 공작이 쥐고 있던 깃펜을 부러뜨렸다.
“신경 쓸 필요 없는 나부랭이라고 하나 명색이 귀족 하나가 황궁 연회에서 죽었는데.”
“…….”
“소르겐 백작을 처리한 건 이유가 있겠지 싶어 이해했다만, 흔적은 남기지 말았어야지. 황제가 시신의 기억을 일부나마 읽는 마법을 쓸 줄 아니 특히 조심하라고 몇 번이고 경고했을 텐데.”
“어차피 황제는 제 능력을 짐작조차 못 할 겁니다.”
“하지만 불필요한 의심을 사게 됐지. 고작 벨로크 공녀를 돕느라 말이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도.”
미하엘은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물론이요, 부친인 실베스터 공작에게도 베로니카에 대해 언급한 적 없다.
하지만 황제는 베로니카를 불러 추궁했다. 백작이 베로니카에게 벌이려던 추잡한 일은 기억한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뒤의 기억이다. 미하엘한테 세뇌당한 이는 세뇌당하는 동안 내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리 취한 상태라고 해도 바로 이전 일은 기억하는데 그 뒷일은 기억하지 못한다? 수상쩍을 수밖에.
명백한 제 실수였다.
“그나마 벨로크를 이용할 구실을 만들어 이 정도에서 끝내는 줄 알아라.”
“…….”
“하지만 두 번은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쯧, 혀를 찬 실베스터 공작이 축객령을 내렸다.
미하엘이 집무실에서 나가자마자 실베스터 공작은 깃펜을 새로 꺼내 서신을 적었다.
떨어뜨린 촛농에 사슴 인장을 찍어 마무리한 그가 설렁줄을 당겼다. 얼마 안 있어 집사가 들어왔다.
예를 표하는 집사에게 실베스터 공작이 서신을 내밀었다.
“벨로크 대공가로 보내도록.”
* * *
나는 왠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아빠를 보며 시선을 데굴데굴 굴렸다.
‘무슨 일 있으시나?’
소르겐 백작도 죽었고 룩스의 황궁 출입 건도 수월하게 허락받았다.
황궁에서도 제어구를 차고 있어야 하고 황후궁 중 몇몇 곳에는 들어올 수 없다는 제약이 붙긴 했지만, 그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전부 해결됐으니 적어도 나 때문이 아닌 건 분명한데…….
‘아닌가?’
소르겐 백작이 죽었다는 소식에 아빠는 너무 쉽게 죽었다며 굉장히 짜증스러워했으니까.
게다가 생각해보니 아빠의 기분이 저조해진 때가 공교롭게도 저 때쯤부터였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면 어쩌지?
끄응, 고민하는데 아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이 파르지 영애와 함께 펠리시타스 보육원에 가는 날 이랬던가?”
“네, 오늘이에요.”
“그래. 잘 다녀와라.”
“아빠도 같이 가실래요?”
앗, 이건 아닌가?
나도 모르게 묻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아빠는 굉장히 무서워 보일 터였다.
특히 어린아이들은 더욱 그럴 거라 다들 울음을 터트릴지도.
‘그래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데 아빠가 픽 웃더니 내 머리에 손을 올려 마구 쓰다듬었다.
으아아, 내 머리!
“제안은 고맙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선약이요?”
내가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묻자 아빠가 다시 미간을 좁혔다. 언제 기분이 좋아졌었냐는 듯.
“실베스터 공작이 보자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