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혹시 룩스가 능력을 쓰는 걸 봤나?’
이제는 룩스가 마수라는 걸 아는 사람이 제법 있으나 그래도 모든 사람한테 밝힐 일은 아니었다. 특히나 이리스처럼 일반인한테는.
“이거 쓰세요, 공녀님.”
우려와 달리 이리스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왔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원장님이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공녀님을 데리러 가겠다고 나왔어요.”
이리스의 얼굴에는 룩스를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되레 살갑게 굴며 손에 들고 있던 다른 우산을 펼쳐 내게 씌워준다.
‘못 봤나 보네. 다행이다.’
마음이 놓였지만, 동시에 괜히 미안해졌다.
나는 이리스를 꺼리고 의심했는데 그녀는 내게 잘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으니까.
“……고마워, 이리스 양.”
“별말씀을요. 공녀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 기뻐요.”
배시시 웃는 얼굴을 보니 지난 내 행동을 반성하게 된다.
“손에 든 것도 주세요. 제가 들게요.”
“괜찮아. 좀 무겁거든.”
“저 힘 좋아요! 맡겨 주세요!”
이리스는 기어코 내게서 바구니를 뺏어가더니 혼자 씩씩하게 걸어갔다.
으으, 쟤는 왜 저렇게 착한 거야? 나는 착한 사람한테 은근 약한데 말이야.
* * *
눈이 더 쌓이기 전에 우리는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예정보다 이른 귀환에 리리카와 일찍 헤어지게 됐다.
이에 리리카가 꽤 아쉬워했으나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보자고 약속한 건 이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이리스는 조만간 다시 만나 함께 연극을 보기로 했다는 것일까.
‘얼결에 약속해버렸네.’
그동안 이리스를 보면 페리드 경이 떠올라 혼자 꺼린 게 미안해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더랬다.
하지만 나를 괴롭히는 건 이리스와 한 약속보다 미하엘 경이 한 말이었다.
‘약혼이라니.’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일이다. 그로 인해 위험해질 거라는 것 역시.
실베스터 가문에서 무언가 꾸미는 게 분명한데…….
‘왜 말해준 거지? 함정인가?’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추리가 안 됐다.
날 찾아와 경고해줄 이유가 없으니까.
마차를 타고 대공저로 돌아오자 집사 할아버지가 날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외출은 즐거우셨습니까?”
“응. 아빠는? 오셨어?”
“조금 전에 돌아오시긴 하셨습니다만, 정원을 돌아보겠다며 다시 나가셨습니다. 들어오시기 전에 못 보셨는지요?”
“못 봤는데.”
눈도 계속 오는데 무슨 산책을 하시는 거람?
나는 우산을 들고 도로 밖으로 나와 아빠를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나무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참 찾기 쉽다니까.’
아무렴 눈으로 뒤덮인 새하얀 세상 속에서 홀로 새까만 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을 못 찾는 게 이상할 테지만.
심지어 우산도 없이 눈을 다 맞고 있어 더욱 찾기 쉬웠다.
‘그런데 뭘 보고 계시는 거지? 라일락 나무인가?’
계절이 계절인 만큼 앙상한 가지만 남았으나 알아보기란 어렵지 않았다. 라일락은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으니까.
‘여기에 라일락 나무가 있었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하긴, 봄에만 꽃이 피는 나무인데 한 번도 여기서 봄을 보내본 적이 없으니.
그래도 올해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년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빠한테 다가가 내가 쓰고 있던 우산을 같이 씌웠다.
“……아.”
갑자기 가려진 시야에 아빠가 뒤늦게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반응이 좀 느린 걸 보니 내가 온 줄 모르셨나 보네.
“추운데 왜 나왔지?”
“아빠가 여기 있다고 해서요.”
심지어 우산도 없이 눈을 다 맞고 있다니,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혹시 실베스터 공작이 무슨 수를 쓴 건 아니겠지?
유심히 아빠를 보는데 아빠가 내 손에서 우산을 뺏어갔다.
“눈 맞는다. 들어와라.”
“네.”
옆에 딱 붙어 걷는데 어쩐지 아빠의 표정이 안 좋아 보인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다지.”
무심히 툭 대꾸하던 아빠가 멈칫했다.
“……?”
움찔거리는 모습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빠가 어서 들어가자고 했다.
* * *
‘그냥 말씀해주셔도 되는데.’
실베스터 가문과 약혼 얘기가 나왔다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돌아누웠다.
이럴 때면 많이 서운하다. 아빠한테 난 뭔지 모르겠으니까.
‘하긴. 애초에 정상적인 가족 관계가 아니긴 해.’
아빠는 은혜를 갚으려고 날 딸로 삼은 거고, 나는 아빠의 보호와 재력이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해 남은 거니까.
'그래도…….'
그래도, 아빠가 나를 좀 더 가족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이기적인가?
나는 그대로 베개에 얼굴을 폭 묻었다.
―베리, 왜 저래?
―글쎄?
이기적이냐고?
‘당연히 이기적이지.’
정작 나도 아빠를 위해 뭔갈 한 게 없는 데다 여기 남을 생각도 안 했으니까.
―헉! 나는 자는 거야!
―나도!
“……?”
고개를 들자 슈가와 룩스가 각자 바구니 속 담요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모습을 감추는 게 보였다.
쟤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뿐인데.
똑똑―
“베로니카.”
역시나.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아빠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안 자고 있었군.”
“잠이 안 와서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네게 말해줄 게 있어서. 피곤하면 내일 얘기해도 되고.”
어? 이거 설마?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아빠의 말에서 낌새를 알아차린 나는 냉큼 문에서 비켜났다.
성큼 방 안으로 들어온 아빠가 내 침대 쪽과 협탁 위의 바구니를 흘긋거리더니 묻는다.
“다람쥐와 네 마수는 자는 건가?”
“그런 것 같아요.”
“다람쥐는 보통 야행성이라던데 저건 신기하군.”
―하늘다람쥐거든! 헙! 아니, 난 자는 거야! 자는 중이야!
“저랑 살면서 밤에 자고 낮에 활동하는 게 익숙해졌나 봐요.”
나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아빠와 마주 앉았다.
매번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룩스와 슈가의 생각을 들을 수 없어 다행이라니까.
“베로니카.”
“네.”
“예전에 네게 약속했었지. 만약 고대 무기를 찾게 된다면 말해주겠다고.”
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 그만큼 빠르게 뛰어댄다.
지금 시점에서 저 얘기를 한다는 건…….
“찾으셨어요?”
“그래.”
말도 안 돼.
이렇게 갑자기? 아니, 갑자기 찾은 건 아니지.
내내 찾고 계셨으니 언젠가 찾아지는 게 당연하긴 했다.
‘하지만 정말 찾았다고? 어떻게 찾은 거지? 도대체 어디서?’
아빠가 고대 무기를 찾는 때가 생길 거란 걸 상상하긴 했다. 몇 년간 꾸준히 말이다.
그때를 대비해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막상 상황에 닥치니 숨이 턱 막혔다.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축하드려요.”
혼란스러운 머릿속과 다르게 내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숙원을 이루시겠네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정신이 다 어지럽다.
만약 고대 무기를 찾아도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겠다고 했지만, 그 결심이 여전할까?
‘그럴 리가.’
그랬다면 굳이 이 시각에 날 찾아와 말하지 않았겠지.
사실 당연한 결과이긴 했다.
원하는 것을 앞에 두고 참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게다가 나는 아빠의 친자식이 아니잖아.’
그저 은혜를 갚기 위해 들인, 임시 보호하던 가짜 딸일 뿐.
여태껏 아빠의 보호를 받으며 대공가의 재력으로 잘 지내온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일부터 더스틴을 통해 양도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영지는 눈이 있으니 어렵지만, 상업 지대와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건 전부 네게 양도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결말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아빠가 실베스터 공작가와 오간 약혼 얘기를 해주고 내게 상의해주길 바랐는데.
누군가 지금 내 심정을 안다면 복에 겨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순간만큼은 그런 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웃기는 일이야.’
저릿한 가슴도, 이런 일에 서운해하는 나 자체도.
전부 예견된 일이었잖아.
언제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잖아.
“엘피다에서도 쓸 수 있게끔 몰래 빼돌려야 하니 상당수가 소실되겠지. 그래도 지내는데 어려움은 없을…… 베로니카?”
“아.”
나는 후두두 쏟아지는 눈물을 감췄다.
손등과 손바닥에 눈물이 한가득 묻어난다.
“죄송해요. 졸려서 그런가 봐요. 갑자기 이러네요.”
최대한 수습하려 했으나 나도 알고 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란 걸.
세상에 졸려서 나는 눈물이 이렇게 많을 리 없잖아.
아빠도 눈치챘을 것이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란 거.
“…….”
그런데도 어떠한 위로도, 말도 없다. 어쩔 수 없는 거란 걸 아는데, 아빠한테는 당연하다는 걸 아는데.
“안 하시면 안 돼요? 복수요, 안 하면 안 돼요?”
나는 계속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며 입을 열었다.
“제발요.”
어리광이다. 정말이지, 염치도 없는 어리광.
아빠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다니.
‘정말 최악이야.’
알아. 아는데…….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회귀 전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딘가 이상하고, 끝내 죽던 그 모습이.
알면서도 외면해온 벌을 받는 걸까. 지금이라도 말할까? 아빠가 믿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가만히 있자 어느덧 내 옆으로 온 아빠가 날 안고 다독여준다.
이윽고 들려온 한 마디.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