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조금은 기대했는데, 헛된 희망이었구나.
나는 아빠의 품에서 떨어졌다. 부끄럽다. 대체 어쩌자고 아빠한테 어리광을 부린 걸까.
“그냥……. 해본 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
“그리고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안 기다려주셔도 돼요.”
“베로니카.”
“그때 보셨죠? 이곤 공자와도 얘기 잘하는 거요. 저 공부 많이 했어요. 그리고 엘피다에 아는 사람도 생겼고요. 어떻게든 되겠…….”
“베로니카.”
아빠가 내 양어깨를 붙들었다. 힘주어 잡는 그 손에 절로 아빠를 올려다보게 된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라. 아직 고대 무기가 내 손에 들어온 것도 아니니까.”
고대 무기를 갖게 되면 움직일 거면서.
“무엇보다 난 너와 한 약속을 지킬 거다. 넌 내 딸이니, 내가 책임지는 게 맞지.”
내가 친딸이었어도 아빠는 계속 뜻을 굽히지 않았을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못났다.
이런 생각이나 하고.
“고대 무기는 어떻게 찾으신 거예요? 그동안 못 찾으셨잖아요. 오늘 실베스터 공작과 만난 것과 관련 있는 거예요?”
“그래. 실베스터 공작이 자신이 갖고 있다고 말하더군. 직접 보진 못했지만, 내 생각에는 진짜 같았다.”
“하지만 그걸 그냥 줄 리 없을 텐데…….”
“거래하자더군.”
“약혼이 아니라요?”
“그 얘기도 하더군. 너와 제 아들을 약혼시키면 고대 무기를 주겠…….”
아빠가 말하다 말고 멈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난 약혼 얘기를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알지?”
“제, 제 짐작이에요! 가문 간에 거래하면 정략혼만큼 좋은 게 없잖아요!”
다급히 둘러댔지만, 실수했다는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둘러대기는 잘한 것 같은데…….’
아빠의 표정을 살핀 나는 좌절했다.
틀렸어. 전혀 믿는 표정이 아니잖아!
“실베스터 공작이 네게 접근해 말한 건가?”
“아, 아니요? 전 공작님을 뵌 적도 없는걸요.”
“그럼 그 아들이 말했나? 전에 널 도왔다고 했지. 그때 저딴 헛소리를 늘어놨나 보군.”
“그때 들은 건 아니에요.”
“어쨌든 듣긴 했다는 거군.”
헉!
“저 때 말고도 또 만난 때가 있다는 거고.”
미치겠네. 반응을 보인 것에 이어 말실수까지 하다니!
“몇 번 만나서 잠깐 대화한 게 전부예요. 실베스터 공자는 카드릭의 호위 기사잖아요. 그래서 가끔 만날 수밖에 없었어요.”
숨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란 걸 직감한 나는 뒤늦게나마 털어놨다. 진실에 거짓을 조금 섞어서.
‘왠지 미하엘 경이 몇 번이나 날 찾아왔다고 하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지.’
솔직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한데, 아빠가 이 상황을 어찌 여길지 뻔했다.
“이참에 확실히 말해두마.”
“……?”
“실베스터 공작이 지껄인 헛소리는 이미 거절했다.”
“거절하셨다고요?”
“그래. 앞으로도 대공가를 비롯해 내 사적인 일을 위해 네게 희생을 강요할 일은 없을 거다.”
아빠 딴에는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일 테다. 분명 그럴 텐데 왜 하나도 기쁘지 않지?
“하지만 그러면 고대 무기를 얻지 못하잖아요?”
“어디 있는지 알아냈으니 뺏어오면 될 일이지.”
“쉬운 길을 내버려 두고요?”
“희생해야 하는 길이 쉬운 길은 아니지. 하물며 네게 그런 걸 강요할 생각은 절대 없고.”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러니 넌 신경 쓰지 말아라. 고대 무기는 내가 알아서 찾아올 테니.”
그간 아빠와 지내온 시간이 무색하게도 순식간에 거리가 느껴질 만큼.
* * *
나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뜬 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아빠가 돌아가기 전에 한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신경 쓰지 말라고?
“신경 안 쓰일 리 없잖아.”
미하엘 경은 내게 약혼하면 위험해질 거라 경고했다.
하지만 실베스터 공작은 정략혼의 대가로 고대 무기를 건네주겠다고 했다.
회귀 전에 아빠는 죽었으며, 그 죽음을 확인한 건 미하엘이었다. 어딘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듯한 아빠와 불새.
‘실베스터 가문에서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어.’
회귀 전에도 고대 무기는 실베스터 공작에게 있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고대 무기를 미끼로 아빠를 유인했겠지.
고대 무기를 얻은 아빠는 황궁을 습격했을 테고.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바로 아빠와 불새의 상태 말이다.
‘잘 모르던 내가 보기에도 불새는 정상이 아니었어.’
아빠가 고대 무기에 집착하는 이유가 광증을 억제하며 황제에게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건 도저히 광증을 억제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시점에서 미하엘 경이 나타나고, 그의 수족이 날 보며 증인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이상했다.
왜 날 보며 ‘증인’이라고 칭한 거지? 오히려 실베스터 가문은 반역자인 아빠를 붙잡은 공로를 인정받아야 했다.
뭔가 켕기는 짓을 한 게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있구나.’
실베스터 가문이 전부 배후였던 거야.
‘이걸 이제야 눈치채다니.’
내내 실베스터 가문이 위험하고 꺼림칙했으면서, 회귀 전에 대놓고 그런 얘길 들어놓고서 왜 연관을 못 시켰을까?
‘그리고 이번에는 아빠 대신 날 이용하려 하는 거야.’
정확히 내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니 미하엘 경이 우리가 약혼하면 내가 위험해질 거라고 말했겠지.
하지만 아빠는 약혼을 거절했고 직접 고대 무기를 찾아온다고 했다. 그러면 실베스터 가문은 어떻게든 아빠를 이용하기 위해 애쓰겠지.
‘어서 이걸 아빠한테 말해야!’
벌떡 일어났던 나는 그대로 멈칫했다.
‘어떻게 말하게?’
몇 년간 늘 망설였던 생각이 또 가로막았다.
아빠에게 회귀 전 사실을 말하는 게 맞는지, 그리고 과연 그걸 믿어줄까에 관한 불안감.
‘설령 믿어도 문제야.’
실베스터 가문에서 꿍꿍이를 꾸민 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만 보면 아빠가 원하던 것과 일치하기도 했다.
비록 아빠의 상태가 이상하긴 했으나 그것마저 아빠가 바라던 것일지 몰랐다.
다 들은 뒤에도 아빠가 상관없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어차피 나는 떠날 거고, 아빠는 복수를 이루니 괜찮다고 말하면 어떡하지?
‘아빠는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싫어.’
하지만 내게 그럴 자격이 있나? 아빠를 말릴 수 없잖아.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서인지 한동안 나는 잠을 제대로 못 잤다.
내 심정이 어떻든 간에 시간은 흘렀다.
그리고 아빠는 정말 본인의 말을 지켰다.
실베스터 가문에서 온 혼인 요청서를 내가 보는 앞에서 불태워버린 것이다.
“거절했는데 또 문서까지 보내오다니 멍청한 건지.”
저 말을 하며 아빠는 그 잿더미를 실베스터 가문에 도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집사 할아버지도 날 찾아와 대공가의 주요 재산을 알려줬다.
“눈에 띄지 않게 현금화 가능한 재산 목록입니다.”
집사 할아버지는 덤덤하게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소실 금액이 꽤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최대한 많이 남길 수 있게 노력할 겁니다. 아가씨께서 성인이 되기 전에 전부 정리될 테고요.”
서류에 적힌 금액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서 순간 심장이 다 철렁했을 만큼.
아빠가 평소 돈이 많다고 말했으니 그런 줄은 알았지만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또한, 펠리시타스 보육원의 운영비가 꾸준히 나올 수 있도록 상가 몇 개를 따로 빼두었습니다.”
게다가 말한 적도 없는데 마리 언니까지 챙겨주다니.
전부 내가 원했던 것들이다. 그러니 기뻐야 하는데…….
나는 서류를 물끄러미 보다 입을 열었다.
“집사는 오랫동안 아빠를 봐왔댔지? 할머니도 봤고.”
“그렇습니다. 로자벨라 아가씨와 유년기부터 함께 보냈지요.”
“로자벨라 아가씨?”
“아! 전 태후 폐하의 성함입니다. 아가씨의 조모님이 되시지요. 제게는 태후 폐하보다 로자벨라 아가씨라 말하는 쪽이 더 친근해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할머니 이름을 듣는 건 처음이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여전히 이 대공가에 관해 잘 모르는구나, 같은.
‘이 주제에 대체 누구한테 섭섭해하고 있는 거야.’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데 집사 할아버지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이건 왜 물으십니까?”
“그냥, 오랫동안 대공가에 있었으니까 아빠도 집사를 신뢰하는구나 싶어서.”
“저야 그저 오래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집사는 대공가가 없어질지 모르는데 괜찮아?”
“괜찮지는 않습니다만, 시작이 있다면 끝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제가 붙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말은 덤덤하지만, 집사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묻어 나왔다.
“이전부터 직감은 하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일찍이 위태로워 보이셨으니까요.”
“…….”
“오히려 아가씨 덕분에 예상보다 오래 유지된 거겠지요. 그래서 늘 아가씨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글쎄.
내가 회귀하기 전에도 대공가는 건재했다. 아빠가 죽은 이후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내가 아니었어도 내년까지는 건재했을 텐데.
이렇게 따지면 내가 아니었어도 아빠는 어차피 카드릭의 성년식 날 죽고 대공가도 멸문할 테니 의미 없나.
분명 회귀하고 나는 많은 걸 바꿨다.
마리 언니도 살렸고, 보육원도 바꿨으며, 내 처지도 고쳤다.
하지만 아빠의 결말만은…….
“살다 보면 가끔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더군요.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
“많은 걸 헤아리고, 떠안으려 하지 마시지요. 아가씨는 아직 어리시잖습니까.”
“만약, 내가 안 어렸다면? 어른이라면?”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이라고 완벽한 건 아니니까요. 똑같이 실수하고 넘어집니다. 경험이 조금 더 많을 뿐이지요.”
안타깝게도 집사 할아버지의 조언은 내게 조금도 와닿질 않았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넘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라서, 나는 끝내 해답을 찾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