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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09화 (109/125)

#109

부질없는 시일이 흘러 어느덧 이리스와 만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미리 기다리던 이리스가 환한 얼굴로 날 불렀다.

“공녀님!”

“안녕, 이리스 양. 혹시 많이 기다렸어?”

“아니요. 그냥 제가 일찍 나온 거여서요. 공녀님과 단둘이 만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설레서 일찍 나오게 됐네요.”

이리스가 제 뺨을 감싸며 말했다. 사랑스러운 소녀. 이리스를 보면 딱 그런 생각이 든다.

“역시 강아지도 데려오셨군요. 이름이 룩스였던가요?”

“응, 맞아. 얘가 날 너무 좋아해서 떼놓고 나올 수 없었어.”

―엥! 내가 베리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난 집에 있는 것도 좋아해!

“룩스는 공녀님을 정말 좋아하는군요? 하긴, 공녀님은 워낙 상냥하시니까요.”

이리스의 말에 나는 아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이리스가 눈치챘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룩스를 거리끼기는커녕 계속 강아지로 취급하는 걸 보니 눈치 못 챈듯했으니까.

“참, 룩스는 극단 앞에 맡기면 될 것 같아요. 공녀님이 룩스를 데려오실 것 같아 일부러 반려동물을 돌봐주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골랐거든요.”

“그런 거까지 알아봤어?”

“저도 반려동물을 기르다 보니 알게 되더라고요.”

맞다, 이리스도 동물을 좋아한댔지. 그러잖아도 샤비한테 룩스를 맡기고 나만 연극을 보기도 미안했는데 다행이네.

나는 이리스에게 양해를 구하고 샤비를 쳐다봤다.

“샤비, 너도 같이 볼래? 이리스 양이 그러는데 극단에 룩스를 돌봐주는 곳이 따로 있대.”

“전 괜찮아요, 아가씨. 예전에 본 적 있어서요.”

“아, 봤던 거야? 재밌어?”

“워낙 유명한 연극이라 초연이 아니거든요. 재미는 음……. 사람마다 다른 거라 말씀드리기가 쉽지 않네요.”

샤비가 난처한 기색으로 웃었다. 샤비는 재미없었나 보네. 그래도 유명한 데는 이유가 있겠지.

우리는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연극을 본 나는 샤비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지만, 내용이 영…….’

못 만들었다기보다는 줄거리가 끔찍했다.

여주인공이 요구한 적도 없는데도 남주인공이 스스로 모든 걸 버리더니 막상 살림이 궁핍해지자 뒤늦게 후회하는 내용이었으므로.

심지어 ‘그때 너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라며 여주인공을 찔러 죽이기까지 했다!

그래놓고 그래도 난 널 사랑한다고 울부짖는 남자 배우의 모습에 얼마나 기가 차던지.

‘애틋한 사랑 이야기라며!’

사랑은 개뿔, 혼자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미친놈만 있었다.

충격받은 건 나뿐만 아니라 이리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죄송해요, 공녀님. 저도 다른 영애한테 추천받은 연극이었는데 저럴 줄 몰랐네요.”

“괜찮아. 그럭저럭 볼만했어.”

다시는 보기 싫을 정도로 충격이긴 했으나 그 충격 덕분에 며칠간 혼란했던 머리가 잠시나마 가벼워 좋았다.

과연 이게 좋아할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극장을 나오니 샤비 옆에서 몸을 말고 누워있던 룩스가 벌떡 일어났다.

―베리 왔다!

“연극은 재밌으셨어요?”

“그냥, 괜찮았어.”

내가 시선을 회피하자 샤비가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룩스는 강아지치고 굉장히 얌전하네요. 그러고 보니 룩스는 무슨 종인지 모르겠네요. 강아지 같긴 한데 아무리 봐도 생각나는 품종이 없어서요.”

“품종은 나도 잘 몰라. 어릴 적에 우연히 만났거든.”

“그렇군요. 룩스는 공녀님을 만나서 행복하겠어요.”

“그런가? 룩스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네.”

―맞아! 난 베리랑 만나서 행복해!

세차게 흔들리는 룩스의 꼬리가 내 팔을 탕탕 두드렸다.

룩스가 저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왜 이렇게 이리스의 말이 마음에 걸리지?’

별 뜻 없이 한 말인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이리스가 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거슬렸다.

아니야. 예민하게 굴지 말자.

이리스는 룩스의 정체를 모르는걸.

―삐!

가볍게 상념을 지우는데 들려온 소리에 내가 멈칫했다.

뭐지? 방금 여기서 들을 리 없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에이, 그럴 리 없잖아. 내가 잘못 들은 걸 거…….

―삐! 삐이이!

음, 잘못 들은 게 아니구나.

나더러 현실을 부정하지 말라는 듯 여러 번 소리치는 것도 모자라 불새가 날아왔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카드릭의 불새다.

저게 대체 왜 시내에 있는 거지? 그보다 저거 저렇게 다녀도 되는 건가?

내 머리 위쪽을 뱅글뱅글 맴도는 불새를 올려다보던 때다.

“뭐 보세요, 공녀님?”

이리스도 내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설마 안 보이나?’

나는 이리스를 보며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만약 이리스의 눈에 불새가 보였다면 굳이 뭘 보느냐고 물을 것 없이 다른 반응을 보였을 테다.

“뭔가 떨어진 거 같았는데 기분 탓이었나 봐.”

“그러고 보니 하늘이 좀 어둡긴 하네요. 또 눈이 오려나?”

―삐익!

여전히 불새가 날갯짓했다.

나한테 전해주려는 게 있는 건가? 아니면…….

‘설마 카드릭이 여기까지 나온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황태자가 황궁 밖을 나올 일이 뭐가 있어?

그런 내 부정을 비웃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형체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쳤나 봐…….”

쟤가 왜 여깄어?

당황해 나도 모르게 읊조린 소리에 이리스도 덩달아 놀란 모양이다.

“네? 못 들었는데 뭐라고 하셨어요?”

“별말 아니었어. 그보다 갑자기 잊고 있었던 급한 일이 생각나서. 정말 미안한데 다음에 다시 봐도 될까?”

“많이 급하신 일이라면…….”

“고마워, 이리스 양. 샤비, 너도 마차에 먼저 가 있을래? 룩스는 나한테 주고.”

“금방 돌아오실 거죠?”

“응.”

나는 룩스를 안아 들고 급히 인파 속에 섞였다.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가 빠르게 사라졌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카드릭이었어.’

아무렴 불새도 있는 데다 때맞춰 보란 듯 모습을 드러낼 만한 사람이 카드릭 말고는 없긴 하지만.

사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 카드릭이 불쑥 찾아오기라도 할까 겁났다.

만약 이리스가 카드릭을 알아보고 다른 영애들한테 이 얘기를 말해 봐라.

가뜩이나 카드릭의 사촌이라는 이유로 많은 관심을 받는 상태다.

‘황궁 밖에서 만날 정도로 친하다고 하면 온갖 부탁이 들어올지도 몰라.’

내가 이리스와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불새가 어느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까지 해가던 불새가 마침내 하강했다.

“왔네?”

제 팔등에 앉은 불새를 든 채로 카드릭이 날 돌아봤다.

동시에 나는 꽤 당황했다.

―어! 색이 달라!

“너, 너! 머리랑 눈 색이 왜 그래?”

“이거? 마법으로 바꿨어. 원래 내 눈 색으로 다니면 다들 날 알아볼 테니까.”

카드릭이 제 머리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늘 보던 은색이 아닌 검은 머리를 한 그는 낯설었다. 게다가 눈 색마저 보라색이라니.

제국에서 붉은 눈은 불새의 주인이라는 뜻이었고, 직계 황족의 상징이니 색을 바꾼 건 이해하지만.

‘왜 검은 머리인 건데.’

우습게도 카드릭의 얼굴 위로 아빠가 생각났다.

한 번도 닮았다고 생각한 적 없었는데 고작 머리 색을 바꾸자마자 떠오르다니!

같은 핏줄이니 어쩔 수 없나.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음. 그냥. 그런데 변장한 거 아니야? 검정 머리는 눈에 띄지 않아?"

"어느 정도는 눈에 띄어야 네가 날 알아보지."

외모를 아예 바꿔버린 게 아니라 머리 색과 눈 색만 바꾼 건데 못 알아볼 리가.

심지어 불새까지 보내놓고서!

카드릭이 벌인 행태가 기가 차 어이없는 눈으로 그를 보던 때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주변을 보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카드릭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게 보였다.

나는 까치발을 든 채 한쪽 팔을 뻗어 카드릭이 쓴 후드를 붙잡았다. 안 닿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잡혔다.

반쯤 벗겨진 후드를 당겨 똑바로 쓰게 하자 카드릭이 의아하게 날 쳐다본다.

"……?"

“똑바로 써.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저 중에 널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떡해?”

“상관없지 싶은데. 조금 귀찮아지긴 하지만.”

“그게 싫어서 그래. 네 얼굴은 눈에 띈단 말이야. 영애들이 너랑 미하엘 경에 대해 얼마나 떠드는지 알아?”

“뭐라고 떠드는데?”

“뭐라 하긴, 둘 다 정말 잘생겼다고 하지.”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음, 비슷한 생각이긴 해.”

“내가? 아니면 미하엘 경이?”

“그야……. 둘 다지.”

“내가 더 낫지 않아?”

생각지도 못한 대꾸에 말문이 막혔다.

아까 대놓고 잘생겼느냐고 물었을 때도 당황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래서 왜 부른 거야? 샤비가 기다리고 있어서 금방 돌아가야 해.”

“꼭 이유가 있어야 해? 그냥 보고 싶어서 부른……!”

으아아! 쟤 또 이상한 말 하려고 하지! 여긴 사람도 많은데!

당황한 나는 룩스를 들어 카드릭의 얼굴에 문질렀다.

―엑!

앗, 나도 모르게!

“미안.”

나는 룩스를 다시 내 품으로 안으며 사과했다.

더 있다가는 평소처럼 휘둘릴 것만 같아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럼 난 가볼게. 다음에……!”

“조심……!”

누군가와 부딪치는 느낌이 들더니 순간적으로 몸이 휘청였다.

아, 카드릭한테서 멀어지기 급급해 주위를 미처 둘러보지 못했더니.

하필 품에 룩스를 안고 있어 더욱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내가 넘어지려 하자 카드릭이 내게 손을 뻗어 내 팔을 붙들었다. 그러나 날 붙잡은 건 카드릭만이 아니었다.

등 뒤로 누군가 받쳐주는 느낌이 든다.

“괜찮으십니까?”

“아, 감사합니다.”

반사적으로 감사 인사를 표한 나는 귀에 익은 음성에 재빨리 뒤돌아봤다.

이 남자는 또 왜 여기 있어?

“미하엘 경?”

내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함과 동시에 카드릭도 확인한 모양이다. 나만큼이나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낸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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