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대공의 딸이 되었을 때-110화 (110/125)

#110

“황…….”

“인사는 생략하지.”

미하엘 경이 예를 차리려 하자 카드릭이 막아섰다.

아무렴 모습까지 바꿨는데 이목이 쏠리면 곤란할 테다.

“여기서 경을 만날 줄 몰랐네. 저택에서 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근처에 볼일이 있어 들렀습니다.”

“우연, 좋지.”

어째 어투가 비꼬는 느낌인데……. 카드릭이 원래부터 미하엘 경을 싫어했나?

“그보다 이제 뒤로 좀 물러나는 게 어때?”

“실례했습니다.”

등 뒤가 허전해지는 느낌에 그제야 나는 계속 미하엘 경에게 안기다시피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카드릭은 여전히 내 팔을 붙들고 있었다.

내가 은근슬쩍 팔을 빼내려 하자 카드릭이 더욱 힘주어 날 붙잡았다.

뭐지? 또 내가 넘어질까 봐 걱정하는 건가?

이번엔 제법 힘을 줘 손을 뿌리쳤는데도 카드릭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참다못한 나는 입을 열었다.

“나 이제 괜찮아.”

“알아.”

아니, 안다면서 손은 왜 안 놓는 건데?

심지어 카드릭의 시선은 내 쪽이 아니라 연신 미하엘 경에게 가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기류는 퍽 불편했다.

‘으, 아빠 보고 싶다.’

만약 아빠가 있었다면 아빠 핑계를 대며 바로 헤어질 수 있었을 텐데.

―이 인간이 귀찮게 굴고 있는 거지! 깨물까?

‘나쁘진 않을, 아니! 절대! 그러면 안 돼!’

이러니저러니 해도 카드릭은 황태자이니 그랬다가는 꽤 곤란해질지 몰랐다.

어쩔 수 없지.

“나 진짜 가봐야 해. 하녀가 걱정하고 있을 거야.”

“같이 가. 데려다줄게.”

“괜찮…….”

“호위도 없잖아.”

―내가 베리 호위인데!

룩스가 당당하게 외쳤으나 카드릭한테는 닿지 않았다.

“그럼 우린 가볼 테니 경은 마저 볼일 보도록 해.”

그러더니 내 팔을 잡아당겨 뒤돌아 걷는 게 아닌가!

얼결에 따라가게 된 나는 당황해 물었다.

“이래도 돼?”

“안 될 게 있어?”

그건 아니지만……. 기본 예의라는 게 있지 않나?

하긴, 얘한테 그런 걸 바라는 게 이상하긴 하지.

“너, 길은 알고 가는 거야?”

“벨로크 가문의 마차가 있는 곳으로 가면 되는 거 아니야?”

“맞는데 어딨는지 모르잖아.”

“걱정하지 마. 피닉스한테 알아보라고 시켜뒀으니까.”

어라? 그러고 보니 카드릭 어깨 위에 불새가 없잖아? 언제 사라졌대?

“평소에도 자주 시켜?”

“뭘?”

“내 감시.”

“감시라니, 관심이지.”

말장난이란 걸 알지만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왜 날 감시했느냐고 물었다가 망명 계획이란 걸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두려웠으니까.

“피닉스한테 널 지켜보라고 한 건 몇 번뿐이야.”

내가 아무 말도 안 하는 동안 카드릭이 입을 열었다.

“마력 부작용이 커서 잘 안 쓰거든. 피닉스가 내게서 떨어질 수 있는 것도 기껏해야 수도의 절반 거리 정도고.”

카드릭이 무심히 대꾸했지만, 유독 내 귀에 꽂히는 단어가 있었다.

‘마력 부작용.’

아빠를 폐위시킨 근본적인 그 이유.

더는 이 주제에 대해 말하기 싫어진 나는 급히 말을 돌렸다.

“그런데 미하엘 경을 왜 그렇게 싫어해?”

“거슬리니까.”

“왜?”

“너한테 치근덕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들어.”

“미하엘 경이 언제 나한테 치근덕거렸어? 아니, 그랬다 쳐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싫어해?”

“상관있지. 내가 너랑 결혼하고 싶으니까.”

으, 응?

방금 이상한 말은 들은 것 같은데?

―결혼이라면 그거지? 누님이 다른 다람쥐랑 만나서 짝짓기한 거!

나는 서둘러 룩스의 입을 그러쥐었다.

그래봤자 룩스가 떠드는 말은 고스란히 내 머릿속으로 들어와 소용없었지만.

―아니야?

순진하게 되묻는 룩스의 질문은 가뜩이나 충격받은 내 정신에 큰 동요를 안겨줬다.

카드릭한테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나 혼자 더 의식하고 눈치 보게 되었다랄까.

“우리는 사촌인데?”

“그걸 문제 삼을 줄 몰랐네. 사촌끼리도 결혼할 수 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알긴 아는데, 그래도…….”

“그래서.”

카드릭이 부지런히 움직이던 걸음을 멈추며 돌아봤다.

“넌 날 사촌으로 여겼어?”

“당연히……!”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꾹 다물었다. 거짓말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텐데 도저히 입이 안 떨어졌다.

내가 머뭇거리자 카드릭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것 봐.”

“…….”

“나도 너와 똑같아. 어쩔 수 없이 엮였을 뿐, 우린 서로를 사촌으로 여긴 적 없지.”

만약 내가 카드릭을 진짜 가족으로, 그리고 사촌처럼 여겼다면 저 말에 큰 상처를 받았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카드릭의 말대로였다. 나는 지금 그가 사촌 사이를 부정한 것보다 내 속내를 들킨 게 더 당황스러웠으니까.

언젠가 죽을 사람이니까. 내가 떠나면 결국엔 보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렇게 애써 외면하며 방관해온 사이.

카드릭은 단 한 번도 내게 사촌이었던 적 없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황태자’였을 뿐.

그러니 그가 날 좋아한다고 여겼을 때조차도 찰나의 감정이라고 가벼이 여겼을 뿐, 이런 식으로 결혼 얘기를 꺼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글쎄? 처음 봤을 때부터?”

거짓말이다. 그때 카드릭은 나 따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오직 자신의 궁을 시끄럽게 한 말롱 부인을 처벌하는데 눈멀어 있었을 뿐.

그랬으면서 우리 룩스조차 안 믿을 소리를 하다니!

―헉! 처음 봤을 때부터 베리를 짝으로 정했다고?

……아무래도 내가 룩스를 과대평가했나 보다.

“거짓말하지 마.”

“안 믿을 줄 알았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심이야. 피닉스가 내 명령을 안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나한테 말대꾸한 것도 네가 처음이었고.”

“그런 이유로 나와 결혼하겠다고? 좀 더 신중히 결정해야 하지 않아?”

“신중한 결정한 건데? 이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흥미를 느낀 사람은 너뿐이야.”

카드릭이 내 손가락을 건드렸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내 손등의 뼈마디 사이를 거니는 감촉이 낯설어 그가 건드릴 때마다 내 몸도 함께 떨렸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고.”

“…….”

“이걸로는 부족해?”

남의 마음에 파란을 일으킨 주제에, 정작 당사자는 평온했다. 그의 말에 반감을 품는 내가 되레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당장 대답하란 건 아니야. 좀 더 고민해 봐.”

* * *

그 뒤로 우리 사이에 오간 말은 없었다. 카드릭은 나를 착실하게 데려다준 뒤 떠났다.

처음 카드릭을 본 샤비는 낯선 그의 모습에 경계했지만, 내가 정체를 일러주자 진정하는 듯했다가 다시 혼란에 빠진 눈치였다.

내내 “화, 황태자 전하께 무례를 저질렀어.”라고 중얼거리는 걸 보면.

신경 쓸 거 없다고 달래줘도 샤비는 쉬이 진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상이 아닌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카드릭이 뱉은 충격적인 발언이 내 머릿속을 잠식했으니까.

‘카드릭과 결혼이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거니와 애초에 깊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카드릭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날 결혼 상대로 정해서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난 떠날 거니까. 그리고 아빠와 황실 간에 얽힌 앙금 때문에라도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다만, 내 계획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카드릭이 이렇게나 저돌적으로 다가올 줄 몰랐다는 것뿐일까.

마차 창밖을 멍하니 응시하는데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룩스가 벌떡 일어났다.

털을 뻣뻣이 세우는 것도 모자라 이빨까지 드러낸 모습에 나와 샤비, 둘 다 당황했다.

“룩스? 왜 그……!”

히이잉-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히이잉,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마차가 크게 흔들리며 멈췄다.

마차만 급하게 멈춰 섰다면 괜찮았을 텐데 룩스의 반응까지 보니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 창문 위로 피가 얕게 튀었다.

“히익!”

샤비가 숨을 삼키며 잔뜩 기겁했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피라니, 대체 누구의?’

머릿속이 새하얗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라 아빠한테 도움을 청하자.’

나는 재빨리 반지를 찾아 문질렀다. 늘 하고 다녀서 다행이었다.

아빠가 곧바로 와주면 좋겠지만, 그건 어려울 테니 어느 정도는 버텨야 할 텐데.

“아, 아가씨,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샤비가 덜덜 떠는 몸으로 내게 가까이 와 나를 감싸 안았다. 자신도 두려우면서 날 감싸다니.

샤비의 품에 안긴 나는 룩스를 쳐다봤다.

‘룩스, 괜찮겠어?’

-걱정하지 마. 나 강해!

룩스의 호언장담이 꽤 믿음직스럽다. 조금은 안도하던 찰나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동시에 덩치를 키운 룩스가 밖을 덮쳤다.

“흐! 아아악!”

끔찍한 고통을 담은 남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 뒤로도 여러 번 비명이 울렸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럿.

“샤비, 일단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어.”

“네? 하지만 마차 안에 있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요?”

“여긴 도망칠 곳이 없잖아. 사방을 살피기도 어렵고.”

내 말에 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겁먹은 티가 나는데도 그녀는 최대한 날 보호하려 애쓰며 착실히 따라 나왔다.

마차에서 나오니 피비린내가 물씬 풍긴다.

“……욱.”

너무 오랜만에 맡는 냄새라 그럴까, 비위가 상했다.

나는 마차 뒤편으로 이동하면서도 바닥에 너부러진 남자들을 확인했다.

전부 로브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걸 봐선 평범한 도둑보다는 암살자 쪽에 가까운 느낌이다.

‘대체 누가 시킨 거지? 아빠한테 원한 가진 사람인가?’

그때였다. 바로 근처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아가씨!”

샤비가 날 감싸 안으려 했으나 그보다는 괴한이 더 빨랐다.

괴한이 내 입을 틀어막으려던 찰나 쉬이이익, 무언가 바람을 빠르게 가르며 날아왔다.

푹―

“컥!”

그대로 가슴이 꿰뚫린 괴한이 피를 울컥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날 붙잡으려 애썼지만, 이번에는 긴 장검이 그를 거침없이 베어냈다.

서걱, 살이 베이는 소리가 선명하다 못해 끔찍하다.

내 바로 앞에서 털썩 쓰러진 괴한의 시체 뒤로 나타난 남자가 로브 모자를 벗으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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