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뭐라고?”
“실베스터 가문과 약혼하고 싶어요.”
“……실베스터 가에서 널 습격한 걸지도 모르는데 그쪽과 약혼하겠다고?”
“저희가 약혼을 거절한 것 때문에 앙갚음하는 것 같아서요. 원하는 걸 들어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을까요?”
“그놈이 그러던가?”
“그놈이요?”
“미하엘 실베스터.”
“아니요. 미하엘 경은 그냥……. 어쨌든 이건 제 생각이에요.”
사실 미하엘 경이 한 말 때문에 결심한 게 크긴 하지만, 결국 선택은 내가 한 거니까.
“네게 이상한 말을 지껄인 줄 알았다면 순순히 보내지 않았을 텐데.”
아빠가 눈살을 찡그렸다. 읊조리는 말에 불쾌감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기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실베스터 가문과 약혼할래요. 하게 해 주세요.”
“안 돼.”
“왜 안 돼요?”
“말했을 텐데. 내 사사로운 이득 때문에 널 약혼시킬 마음이 없다고.”
“지금은 제가 하고 싶어서인데도요?”
“그걸 네 의지라고 여기긴 어렵군. 실베스터가 뭐라 떠들었든 무시해라. 절대 받아들일 생각 없으니.”
“하지만 실베스터 가문이 그런 건 저 때문이잖아요. 앞으로도 저 때문에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지도 몰라요.”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잘못한 놈은 따로 있는데 왜 네가 자책하는 거지?”
“…….”
“무엇보다 약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이런 짓을 벌일 놈들이라면 분명 다른 꿍꿍이도 있겠지. 약혼한다고 해서 끝나지 않을 거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아빠의 말도 틀리진 않는다. 실베스터 가문은 위험하며, 다른 속셈을 가진 게 분명하니까.
“아빠가 뭘 우려하시는지 알아요. 그래도 당분간은 괜찮지 않을까요? 어쩌면 고대 무기도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그만.”
아빠가 싸늘한 무표정으로 날 응시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표정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어떤 이유로든 나는 널 약혼시킬 생각이 없다. 고대 무기 또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망명할 준비에 힘쓰거라.”
“…….”
“필요한 게 있다면 더스틴한테 말하면 된다.”
아빠와 나 사이에 순식간에 선이 그어지고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진다.
나는 절대 넘을 수 없는, 한없이 높고 견고한 벽.
“피곤할 텐데 이만 돌아가서 쉬어라.”
“네…….”
나는 결국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삼킨 채 고개만 끄덕였다.
* * *
그날 이후, 아빠는 내게 호위 기사를 다섯 명 정도 붙였다.
황궁 안까진 따라올 수 없어 황궁에서는 자유로웠지만, 저택을 나서는 순간부터 들어올 때까지 그들과 함께해야 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부담스러웠지만 사고가 있긴 있었던 관계로 나는 얌전히 아빠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호위가 눈에 띄게 늘어난 탓인지 입궁할 때를 더불어 황후궁의 시녀들도 내게 시선을 두는 때가 잦았다.
하지만 저 관심들도 시간이 지나면 금방 사그라들 거라는 걸 알았기에 그다지 신경 쓰이진 않았다.
평소처럼 황후궁에서 조금 시간을 보내다 룩스와 함께 도서관을 다녀오던 때였다.
황후궁 앞에서 남자 여럿과 데보라 부인이 보였다. 당황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미하엘 경? ……아니구나.’
남자 무리 중 일부가 입은 옷이 미하엘 경이 자주 입던 제복과 닮아 순간 그인 줄 알았다.
좀 더 살펴본 끝에 내 오해였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런데 황실 기사들이 데보라 부인과는 왜 있는 거지?’
심지어 기사들 옆에 꽤 기다란 망토를 입은 사람들은 마법사 같아 보이는데.
“아, 왔군요. 베로니카 양.”
날 발견한 데보라 부인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부인? 황후궁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 그게…….”
데보라 부인이 머뭇거리자 그녀의 뒤에 있던 기사가 앞으로 나왔다.
“벨로크 공녀님 되십니까?”
“그런데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황실 제1기사단 소속 알베르 클데임입니다. 공녀님의 마수를 특수 위험종으로 지정 및 인계하러 왔습니다.”
“룩스가 특수 위험종이라고요? 처음 듣는데.”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인계 부탁드립니다.”
기사가 말하자 마법사들이 제법 큰 족쇄와 입마개를 들고 다가왔다.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룩스의 목에 걸려 있는 마도구와 비슷하게 힘을 억제하는 도구라는 걸.
―내가 위험해?
‘아니야. 뭔가 착오가 있는 걸 거야.’
나는 기사의 앞을 막아섰다.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룩스는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셨어요. 위험하지도 않고요.”
“현 시각부터는 아닙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공녀님의 마수가 위험하니 황궁에서 특별히 관리하라고 하셨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그렇게 명하셨다고요? 정말로요?”
“그건 내가 보증하지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시선을 돌린 나는 당황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금발을 틀어 올린 황후가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평소 황후궁을 잘 나오지 않던 분이었는데?
“믿기 어렵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명한 게 맞습니다. 순순히 협조하세요, 공녀.”
룩스가 마수라는 걸 알렸을 때도 크게 개의치 않던 황후였다. 그랬던 사람이 저렇게 말하니 더는 고집 부릴 수 없었다.
‘룩스, 미안한데 지금은 저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해 줄래?’
―나 어디로 가?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금방 다시 데리러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줄래?’
―그러지, 뭐.
나는 룩스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뒤로 물러났다.
“데려가세요.”
“감사합니다, 공녀님.”
마법사들이 룩스의 입과 발에 구속구를 채워 데려갔다.
* * *
황실 소속의 기사와 마법사가 룩스를 데려간 뒤, 황후는 잠시 이야기하자며 날 불렀다.
“조금 전 일은 유감이에요, 베로니카 양.”
“폐하께서는 뭐 때문에 룩스를 데려간 건지 아시나요?”
“저도 사태 파악을 한 건 얼마 안 됐답니다. 상황이 너무 안 좋더군요.”
“어떤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지 여쭤도 될까요?”
“아직 어린 공녀에게 이런 걸 얘기해도 되나 싶은데…….”
“전 괜찮아요. 말씀해 주세요.”
내 말에도 황후는 쉬이 입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민가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어요.”
그게 룩스와 무슨 관련이 있다고?
“시신에는 짐승에게 물리고 할퀴어진 듯한 상흔이 있었다고 해요. 문제는 그 크기가 일반적인 크기가 아니었다는 거죠.”
“설마 룩스가 한 짓이라고 믿는 건가요?”
“어찌 된 일인지 평민들 사이에 공녀가 마수를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졌더군요. 마침 그날 공녀가 그 근처를 지나간 걸 목격한 사람들도 있다고 하고요.”
내가 외출한 날에 마수한테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됐다면……. 그때 나를 습격한 사람의 시신인가?
만약 그때 일에 관여한 사람의 시신이라면 그런 상흔이 남아 있는 게 말이 됐다.
룩스가 죽이진 않았지만, 다치지 않게 하며 제압한 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그 시신은 왜 민가에서 발견된 거지?
이것도 실베스터 가에서 의도한 건가?
“그래도 걱정하지 말아요. 황제 폐하께서도 베로니카 양이 그 마수를 아끼는 걸 알고 계시니까요. 안전한 곳에 잘 있을 거예요.”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룩스와 이런 식으로 떨어지게 될 줄 몰랐던 만큼 충격이 쉬이 가시질 않았으니까.
* * *
“벨로크 공녀도 조처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주장에 기다렸다는 듯 다른 이들도 호응했다.
“맞습니다. 아무리 테이밍 능력에 관해 알려진 게 없다 해도 이건 전례에 없던 일 아닙니까? 마수를 다루다니요?”
“심지어 그게 사람을 해쳤지요. 좌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벨로크 공녀는 위험합니다! 조치가 필요합니다!”
쾅!
아시드가 긴 탁상을 강하게 내리치자 방금까지 주장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고요해진 분위기 속에서 아시드가 나직이 말했다.
“대체 무슨 증거로 내 딸을 모함하는지 모르겠군.”
“시신의 상흔이 누가 봐도 마수가 한 짓 아닙니까?”
“수도에 있는 마수가 내 딸의 마수뿐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
“당연히 장담할 수 있지요! 대체 수도에 마수가 어떻게 들어온단 말입니까? 그랬다면 이미 다들 알았을 겁니다!”
“내 딸이 마수를 길들인 곳이 어딘지 알고 있나?”
“그걸 내가 어떻게…….”
“수도의 암흑 시장이다. 버러지한테 납치당했던 그때 지금의 마수를 길들였지.”
“그런……!”
“어떤가, 백작. 정말 수도에 있는 마수가 우리 딸의 마수뿐이라고 장담할 수 있나?”
아시드의 반론에 다들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참이었다.
“그렇다 해서 공녀님의 마수가 그러지 않았다는 것 또한 증명할 도리가 없잖습니까?”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아시드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실베스터 공작?”
“마침 공녀님께서 마수와 함께 거리에 나온 날에 시신이 발견됐지요.”
“…….”
“평민들 사이에선 그런 이야기가 도는 것 같더군요. 살인귀 대공도 동족을 알아보고 딸로 삼은 거 아니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