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바라셨던 것 아닙니까?”
“원하긴 했지.”
실베스터 공작이 덤덤히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네게 이러라고 지시한 적이 없는데.”
“…….”
“왜 그랬지?”
“안전한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대공의 상태도 불안정해 보였습니다. 아끼는 딸과 떨어질 예정이라 그런지 정신적으로 힘든 듯했습니다.”
동요라고는 조금도 없는, 차분한 목소리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제 능력이 풀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풀릴 일이 없을 거라고…….”
실베스터 공작이 읊조리며 작게 웃었다.
미하엘의 능력이 만능인데도 그동안 황가를 비롯해 벨로크 대공에게까지 손을 쓸 수 없었던 건 ‘불새’ 때문이었다.
소환수를 사용할수록 계약자의 마력과 정신력도 오염된다.
그 때문에 황제가 가진 고대 무기로 마력을 안정시키고 정신력을 정화하면 그만큼 정신력도 강인해졌다.
일반인보다 견고한 정신력을 가진 황족을 세뇌해봤자 금세 풀리기 마련이었다.
그동안 황가를 비롯해 벨로크 대공에게까지 손을 쓸 수 없었던 이유기도 했다.
그래서 수년 전, 벨로크 대공의 팔을 아예 날려 정신이 완전히 붕괴시켜 세뇌하려 했다.
‘실패했지만.’
흑마법사와 황실의 알려지지 않은 방계를 어렵게 찾아 만든 마법진이었다.
많이 공들인 만큼 당연히 성공하리라 믿으며 뒤처리 역시 깔끔하게 처리했다.
만약 이렇게 실패하고, 그 뒤로 흑마법사나 방계 핏줄을 찾지 못해 내내 벨로크 대공을 어찌 못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없애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대공을 세뇌하는 걸 성공한 데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을 거라고?
제 아들을 믿지 않는 건 아니나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말 잘 듣는 인형이었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했으므로.
지금도 그렇다. 시키지 않은 짓을 하며 멋대로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그것도…….
‘또 벨로크 공녀로군.’
베로니카와 관련된 일에.
한번은 그럴 수 있다. 어찌 사람이 내내 이성적으로 완벽하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제 아들에게 완벽을 요구한 것과 별개로 그 정도의 융통성은 갖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여러 번이다.
‘멍청한 것. 설마하니 사랑놀이에라도 빠진 건가.’
세간에는 제 아들이 벨로크 공녀를 사랑한다고 말하긴 했으나 약혼을 밀어붙이기 위해 그럴싸한 이유를 댔던 것뿐이다.
아무렴 객관적으로 벨로크 대공가에게서 얻어낼 게 뭐가 있다고 제 쪽에서 애걸복걸한단 말인가.
수도의 상권? 황제의 아량으로 대공의 사유 재산으로 인정받아 지켜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대공령?
여느 한미한 가문이라면 모를까, 제 가문에서 탐낼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시드는 미치광이 살인귀라고 불리고 있는 만큼 주변 인식도 안 좋았다. 사용인들이야 워낙 돈을 많이 주니 계속 붙어 있는 모양이지만.
이렇듯 겉보기에 이점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벨로크와 약혼해야 하는 이유는 아시드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약혼 관계를 계속 유지하다 미하엘이 고대 무기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게 되면 대공에게 세뇌를 건다.
그리고 그를 이용해 황제와 황태자를 전부 죽인다.
이미 황자일 적 미쳐 제 아내를 손으로 죽인 전적이 있는 남자이니 그가 미쳐 황제와 황태자를 죽였다고 하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대공을 실베스터 가문에서 잡아 처단하고, 공적을 드높인다.
이게 실베스터 공작이 그린 그림이었다.
최대한 반발 없이 황가를 먹어 치우기 위한 큰 그림.
현 황가는 제국민에게 인식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 황가에 대놓고 반기를 들어봤자 이로울 건 없었다.
그러니 반역자가 사랑하는 약혼녀의 아비라 할지라도 제국을 위해 망설임 없이 처단한 가문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하여 새로운 황실이 된다…….
제국민 입장에서는 제법 괜찮은 황가 아니겠는가?
설마하니 벨로크 대공이 약혼을 거절하며 제 딸을 다시 대공령으로 내려보내려 할 줄 몰랐지만, 그마저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벨로크 대공이었다. 끊임없이 그에게 세뇌를 시도해 반역하게 만들기만 하면 됐으니까.
뭐 하면 대공령으로 내려간 공녀를 잡아 오든가, 또 위험을 가해 대공이 위협을 느끼게 해도 됐다.
그러니 지금처럼 무리하게 세뇌해 벨로크 대공가와 약혼을 하는 건 고려하지도 않았던 상황이란 거다.
약혼이니 사랑이라느니 그저 이를 위한 발판이었을 뿐인데, 제 아들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소파에서 일어난 실베스터 공작은 제 아들에게 걸어갔다.
어느덧 제 키를 웃도는 장성한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린 그가 입을 열었다.
“미하엘.”
“예, 아버지.”
“마셔라.”
“…….”
미하엘은 실베스터 공작이 내민 걸 바라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병.
그러나 미하엘은 익히 아는 액체였다. 실베스터 공작이 제 수족들에게 먹이는 걸 자주 봤으므로.
물약에는 눈에 잘 안 보이지만 특정 개체에 기생하는 마수가 들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여왕의 명령에 절대적인 성향을 지녔다.
이 성질을 이용해 흑마법과 결합해 공작이 조종할 수 있도록 변형한 것이었다.
조종이라 해봤자 그의 뜻에 반하거나 배신하면 자진하게 만드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들이랍시고 자신에게만큼은 먹이지 않았더랬다. 이제는 그것도 끝인 모양이지만.
하지만 이쯤은 어제 벨로크 대공을 불러낼 때 각오한 일이었다.
미하엘은 망설임 없이 병을 받아 물약을 삼켰다.
“네 멋대로 구는 건 이번까지만이다. 앞으로 지켜보마.”
“…….”
“돌아가 쉬어라.”
미하엘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응접실을 나왔다.
“윽.”
제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미하엘은 가슴을 부여잡고 벽에 등을 대고 주르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러잖아도 하얀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에 진득하게 달라붙는다.
조금 전에 삼킨 기생 마수 때문은 아니다. 어제 벨로크 대공에게 능력을 쓰기 위해 급히 고대 무기에 손댄 뒤로 내내 이랬으니까.
부친인 실베스터 공작에게는 대공의 정신력이 약해졌다고 말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벨로크 대공이 베로니카를 만난 이후, 그의 정신력은 더욱 강해졌다. 저는 감히 손도 대지 못할 만큼.
그런 대공을 세뇌해? 시도하자마자 풀릴 것이다.
하지만 고대 무기를 이용하면 얘기는 달라졌다. 원래 제 능력에 더해 고대 무기의 능력까지 더해지니까.
다만, 각 고대 무기에는 소환수가 잠들어 있는데 그들이 요구하는 특정 조건이 있었다.
실베스터 공작이 마법사들을 부려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미하엘의 능력으로는 내년에나 자격이 갖춰졌다.
그마저도 도대체 뭐가 자격의 요건인지 몰라 불확실했지만, 그나마 안정적으로 고대 무기의 주인이 되려면 최소 내년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베로니카를 대공령으로 내려보내서는 안 됐다.
대공이나 베로니카는 대공령이 안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으나 전혀 아니었으니까.
현시점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제 옆이었다.
‘당분간’이라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그렇기에 미하엘은 기꺼이 제 부친 몰래 고대 무기를 보관하는 장소로 들어가 잡았다. 동시에 어떠한 형체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흰빛으로 뒤덮여 희끄무레한 그것은 미하엘이 손대자마자 커다란 이명을 토해냈다.
―너는, 자격이……!
코와 귀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거센 반발이었다.
하지만 미하엘은 필사적으로 무기를 붙잡아 끊임없이 마나를 흘려보낸 끝에 소환수를 잠재울 수 있었다.
문제는, 정상적인 계약이 아니라는 점이다.
불안정한 융합.
미하엘은 본능적으로 고대 무기와 연결된 제 상태를 알아차렸다. 고대 무기의 힘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완전한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저 뒤로 계속 이런 상태였다.
괜찮은 것 같다가도 갑작스레 빠르게 뛰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아프고 뜨겁다.
귓가에 바람 소리 같고, 비명 같기도 한 이명이 정신없이 스친다.
이게 황족이 소환수와 계약한 대가인가.
그래도 무기가 인정한 계약자는 소환수가 오염시킨 마나도 정화한다는 모양이지만, 제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흐, 윽…….”
미하엘이 입을 꾹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억울해…….
―네가 뭔데…….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끈적한 무언가들이 미하엘의 발을 잡고 늘어진다.
귓가에 윙윙 일어나는 끔찍한 이명과 고통에 정신이 나갈 버릴 것만 같다.
‘벨로크 대공은, 어떻게 이런 걸 견디며 산 거지.’
정말이지, 신기할 지경이다.
‘그래도…….’
지켜냈으니 됐다.
베로니카를 제 옆에 묶어뒀으니 제 부친 또한 베로니카보다는 벨로크 대공에게 집중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이걸로 됐다.
* * *
‘이상해.’
나는 쿠션에 턱을 괸 채 읊조렸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갑자기 뜻을 바꾼 게.
아빠가 다정다감하거나 완전 상냥한 사람은 아니다.
그래도 내게 위험한 일을 시키려거나 날 무언가에 얽매이게 하는 것만큼은 피하려 했으면서, 이제 와 약혼을 허락했다고?
‘집사도 몰랐던 것 같은데.’
나는 아빠의 파격적인 통보에 나 못지않게 놀라던 집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제저녁에 외출하더니 갑자기 약혼을 결정했다고?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왠지 느낌상 실베스터 가에서 아빠한테 무슨 짓을 한 것 같은데.’
문제는 겉보기에 아빠는 평소와 다른 게 전혀 없어서, 뭔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역시 이상해…….”
―맞아! 그 인간! 이상해!
작은 읊조림이었는데 슈가가 날 따라 외치며 내 어깨로 날아와 안착했다.
“그 인간? 누구?”
―항상 보는 수컷 인간 말이야! 이상해! 물론 아까 룩스와 함께 온 인간도 이상했지만!
“아빠가 이상하다고?”
―응! 썩은 씨앗을 보는 기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