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여태껏 배회하며 걸리지 않던 목걸이 이음쇠가 달칵 잠겼다.
공교로운 순간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마른침을 삼킨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쩔 건가요? 절 죽일 건가요?”
“안 그래.”
“……?”
“네게 위험한 짓은 안 해.”
낮은 음성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이상해지려는 감각을 뒤로하고 나는 미하엘 경을 돌아보며 제법 날카롭게 물었다.
“그럼 우리 아빠한테는 왜 그런 건데요?”
“……지키고 싶었으니까.”
“어떤걸요?”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 미하엘 경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돌연 옅게 웃었다.
“잘 어울리네.”
긴장하고 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생뚱맞은 칭찬에 맥이 풀렸다.
그냥 말을 돌리기 위한 말일 텐데, 그뿐이란 걸 알면서도 심장이 멋대로 뛴다.
잠시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내가 다시 캐물으려던 때다.
똑똑―
“자리를 비워 죄송합니다.”
보석상이 돌아왔다.
결국, 나는 더 캐묻지 못한 채 입을 다물어야 했다.
* * *
약혼반지를 고른 뒤, 우리는 약혼식이 어떻게 꾸며질지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약혼식은 정원에서 하고, 피로연은 안에서 할 거라고 했다.
곧 봄이긴 하나 이제 잎눈이 생기기 시작해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에 리본과 각종 천을 달아 꾸밀 거라던가?
사실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조차 잘 모르겠다.
내내 수긍하는 아빠의 태도와 실베스터 가의 부자가 너무나 신경 쓰였으니까.
대공저로 돌아온 뒤에도 아빠는 피곤할 테니 쉬라는 말만 할 뿐,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베! 리!
“다녀오셨어요, 아가씨?”
“응응.”
내게 날아오는 슈가를 향해 손을 내민 순간이었다.
―뺙!
슈가가 다급한 울음소리를 흘리더니 갑자기 방향을 휙 틀어 샤비에게 안착했다. 놀란 샤비가 슈가를 조심히 안아 들었다.
“왜 그래?”
“모르겠어요. 방금까지 잘 있었는데……. 어디 아픈가?”
―손! 이상한 게 있어!
내 손에?
이리저리 살폈으나 이상하다고 할 만한 건 없다.
깨끗한데……?
―어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슈가가 내 오른손 위로 포르르 날아왔다.
―왜 없지? 있었는데?
“잘 날아다니는 걸 보니 괜찮은가 보네요. 아픈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다행이에요.”
방방 뛰는 슈가를 보며 샤비가 안도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의사한테 보이는 게 좋겠다며 샤비가 나간 뒤에도 슈가는 계속 방방 뛰어댔다.
―이상한! 막! 뭐가 분명히 있었어! 썩은 씨앗 보는 기분이었는데!
억울한 듯 그러잖아도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인다.
‘썩은 씨앗이라면, 슈가가 아빠를 보며 한 말 아닌가?’
아빠랑 함께 있으면 옮는 건가? 그런데 옮는 거라면 그동안은 왜 반응이 없었지?
“어쨌든, 지금은 없는 거지?”
―응.
왠지 풀 죽은 듯한 모습에 슈가의 등을 문지르던 때다.
‘아까 이 손으로 미하엘 경의 손을 잡지 않았나?’
게다가 평소와 다른 게 있는 거라고는 실베스터 공작가를 방문해 미하엘 경을 만난 것뿐이었다.
‘내게 뭘 하려고 한 거지?’
그러고 보니 손을 잡았을 때 순간이나마 이명이 들렸더랬지.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건가?
‘하지만 뭐가 달라졌는지 모르겠어.’
게다가 미하엘 경은 내가 위험해질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걸.
‘잠깐.’
내가 왜 미하엘 경의 말을 믿고 있지?
이제야 위화감이 깃든다.
미하엘 실베스터는 위험한 남자다. 회귀하기 전이나 후에나.
그런데 그의 말을 진실이라 여기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니.
‘아빠한테 한 짓도 이런 건가? 의심하지 못하도록?’
나야 슈가가 말해줘서 알았다지만, 아빠는 모르니 계속 그렇게 행동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우리를 옭아매서 이용하려는 거겠지.’
실베스터 공작 또한 아빠가 황실에 가진 원한을 알 것이다.
공작도 그 참사를 알고 있을 테니, 아빠에게 고대 무기를 주겠다며 유혹했겠지.
아빠가 황실을 몰락할 걸 뻔히 알면서도 회유한 이유?
‘실베스터 가도 반역을 원하는 거야. 아빠를 이용해서.’
문득 회귀 전에 아빠를 뒤쫓아온 미하엘 경이 떠오른다.
그의 측근 같던 이가 나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모습도.
실베스터 공작가에서 황실의 몰락을 원하며 회귀 전에도 아빠한테 고대 무기를 줬다면 이번 역시 비슷할 것이다.
아빠는 그 끝을 달가워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내내 아빠를 막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바라는 걸 잘 아니까.
하지만 싫다. 아빠를 잃고 싶지 않다.
비록 아빠가 바라는 것이라고 해도.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아.’
아빠와 더 함께하고 싶다. 아빠는 내 유일한 가족이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고대 무기를 내가 먼저 찾아 숨겨야 한다. 아빠 모르게.
‘실베스터 공작가에 다시 방문해 찾아봐야겠어.’
* * *
약혼식 초청장이 주요 가문에 발송되며, 실베스터 가와 벨로크 가의 약혼 소식이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실베스터 공작이 벨로크 대공에게 약혼을 언급한 적이 몇 번 있긴 했으나 매번 매몰차게 거절당했기에 초청장을 받은 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초청 목록에는 명목상 황실도 포함된 만큼 카드릭 또한 초청장을 받았다. 다른 이들과 달리 미하엘로부터 직접.
“이게 뭐지?”
“약혼식 초청장입니다. 전하께서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신다면 무한한 영광일 것입니다.”
책상 위에 놓인 초청장을 보며 카드릭이 낮게 조소했다.
“벨로크와 약혼이라.”
“…….”
“경도 옆에서 지켜봤으니 알 텐데? 내가 베로니카에게 사촌 이상으로 특별한 감정을 품었다는 거.”
“전하의 감정과 관계없이 벨로크 공녀는 제 약혼녀입니다.”
“지금이야 그렇지. 하지만 자만하지 마.”
카드릭이 초청장을 무심히 뒤적이며 말했다.
“그 애는 내 것이거든. 처음 본 순간부터 그렇게 정했고 그렇게 될 거야.”
“송구합니다만, 공녀는 물건이 아닙니다. 전하의 마음대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러는 경은? 정말 나와 다르다고 생각해? 베로니카도 경과 약혼하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던데.”
“…….”
“제 감정만 강요해 약혼을 이룬 경이나 나나 다를 게 있나?”
미하엘은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카드릭의 말도 영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
이 약혼에 베로니카의 의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벨로크 대공을 세뇌해 자신이 밀어붙인 것이었으니.
카드릭은 미하엘을 보며 거만하게 웃었다.
거봐,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유쾌하지만은 않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하엘에게 베로니카를 빼앗긴 건 변치 않는 사실이니까.
‘얌전한 개인 줄 알았더니.’
제 뒤통수를 이런 식으로 칠 줄이야. 여우 새끼를 곁에 뒀다. 물론 미하엘을 호위기사로 붙인 건 제 부친이었지만.
‘그나저나……. 저건 뭐지?’
카드릭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하엘의 어깨를 응시했다.
흰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미세한 입자가 가루처럼 일렁이며 흩날렸다.
처음 저걸 봤을 땐 저가 헛것을 보는 줄 알았다. 실제로 다음날엔 사라졌으니까.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다시 나타나더니 시일이 지날수록 점점 선명해졌다.
저것이 선명해질수록 피닉스도 주위를 어지럽게 날아다니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성인이 아니라서 아직 피닉스가 말을 못 하는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이야.’
불새는 계약자가 성인이 되어야 서로 소통하고 남에게도 의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제 부친의 불새가 제게는 똑바로 명을 전달한 것처럼.
어쨌거나 반응을 보니 좋은 건 아닌 게 분명했다.
물론, 피닉스가 가만히 있었다고 해도 저걸 봤다면 누구나 경계했을 테지만.
저딴 걸 달고 베로니카에게 붙어 있겠다고? 잘도.
“경.”
카드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하엘에게 다가섰다.
미하엘과 눈을 똑바로 마주한 그는 미하엘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듯 쓸며 말했다.
“나는 경과 공작이 무얼 계획하든 신경 안 써. 하지만 베리한테 그 더러운 걸 묻힌다면.”
카드릭이 입꼬리를 들어 웃었다. 장미처럼 화려하나 가시를 품은 웃음이었다.
“나는 경을 죽일 거야.”
섬뜩한 협박에 몸을 떨 법도 한데 미하엘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무덤덤하게,
"그럴 일은 없습니다."
대답할 뿐.
마치 잘 박제된 나비처럼 아름답지만 무미건조하다. 보고 있으면 괜히 불편할 정도로.
“그렇다니 다행이네. 이만 나가 봐.”
“시키실 일이 있다면 불러주십시오.”
미하엘이 고개를 숙인 뒤 나갔다.
“……마음에 안 들어.”
홀로 남은 카드릭은 얼굴을 굳히며 읊조렸다.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떠나질 않았다.
* * *
실베스터 공작가에 방문하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자 흔쾌히 그러라는 답신이 왔다.
다만, 공작도 자주 자리를 비워야 하고 미하엘 경 또한 카드릭의 호위를 해야 하니 쉬는 날 와줬으면 좋겠다고.
‘안 된다고 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답신을 보내고 드레스 가봉 때문에 의상실을 다녀오니 뜻밖의 손님이 날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