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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2화 (2/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2화>

인간이 처음 마주하는 게 얼굴이라면 요새가 처음 적을 맞이하는 건 정문이다.

차에서 내린 나 또한 요새의 얼굴인 정문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었다.

‘잘 만들어진 요새다.’

트럭 하나는 거뜬하게 지나갈 요새 정문은 요즘 보기 힘든 정석적인 구조다.

거기다 외벽 또한 제대로 된 철근과 콘크리트를 이용해 아주 견고하게 지어뒀다.

곳곳에 남아있는 감염체의 발톱 자국과 오랜 세월이 지나 착색된 갈색 핏자국.

버려진 곳처럼 보이던 겉모습과는 달리 희망 요새는 오랜 연식과 중후함이 느껴졌다.

옛말로 가히 소장가치가 있는 명품이라.

유산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번쩍!

“뒤로 물러나쇼!”

그 순간 조용하던 외벽 위로 뒤늦게 찾아온 한 사람이 내게 손전등을 비췄다.

무언가를 겨누고 있는 적대적인 실루엣으로 보아 총으로 무장한 게 분명하다.

외벽 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나는 양손을 들고 천천히 물러났다.

“진정하세요. 무장 안 했습니다.”

“진정이고 자시고 그냥 물러나쇼!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오면 확 쏴버릴라니까!”

흥분한 것도 모자라 무장한 사람이다.

정말 간 보고 쟀다가는 총 쏘기 딱 좋다.

잠깐 물러날까?

아니 가뜩이나 가진 게 없는데 요새 밖은 너무 위험하다.

한 차례 심호흡 한 나는 결국 어릴 때 만나본 게 전부인 할아버지의 이름을 팔았다.

“혹시 박동구 씨를 아십니까? 여기 강릉 요새에서 사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본인이 여기 주인이었다는데 증명할 수단이 없으니 나야 이름만 외치는 게 다였다.

“뭐? 박동구? 혹시 박 동장님?”

“예, 예! 맞습니다!”

“동장님이 어떤 분이신데 함부로 이름을 팔아! 야 이 썩을 놈아 너 거기 가만히······!”

“제가 그분 손자입니다!”

할아버지 유산을 남겨 주셨으면 손자가 올 거라는 이야기는 해주셨어야죠.

나는 당장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장 다음 행동을 고민했다.

“······그분 손자라고?”

하지만 다행히 외벽 위 사람은 총구가 아닌 손전등으로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1초, 2초, 3초.

얼굴을 보고 알면 이 사람아, 경비가 아니라 점집을 차렸어야.

“맞네! 박 동장님 손자! 사진하고 똑같어!”

사진이 있으셨구나.

맥이 탁하고 풀린 나는 머쓱한 웃음과 함께 머리를 긁었다.

“택시는 자네거여?”

“예. 뭐 좀 사정이 있습니다.”

“문 열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혹시 무기 같은 거 있으면 보이는 곳에 올려두고!”

밤새 감염체들과 함께 지내게 될까 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이야기가 통해 다행이다.

나는 경비 아저씨의 마음이 바뀔세라 후다닥 달려가 택시 시동을 걸고 기다렸다.

끼이익!

그러자 육중한 요새 정문이 열리며 내부로 들어가는 포장길이 모습을 나타냈다.

서치라이트를 끄고 천천히, 위에서 손짓하는 지시를 따라 요새 안으로 들어간다.

끼이이익, 쿵!

아무리 밤이 늦어도 그렇지 낯선 차량이 들어왔는데 들여다보는 사람이 하나 없다.

나는 한기마저 느껴지는 요새 내부를 꺼림칙한 눈으로 바라보며 차에서 내렸다.

마침 외벽 계단에서 아파트 경비원 복장을 한 아저씨가 다가오고 있었다.

“참 감개무량하네. 동장님 손주가 한 분 계시다고 듣기는 했는데 실제로 볼 줄이야.”

“그래도 다행히 아는 분을 뵙네요.”

“좀 살아계실 적에 오지 그랬어! 하늘도 무심하지 손주 얼굴도 못 뵙고······.”

거의 없다시피 했던 친가라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땐 별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슬퍼하는 타인을 보자니 조금 착잡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무기는 다 꺼내놨지? 그게 규칙이라.”

“예, 예. 여기 있는 게 다입니다.”

워커 안에 숨겨 놓은 나이프를 빼면 전부 차량 보닛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이를 하나하나 확인한 경비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차량 지붕 위로 올라가 앉았다.

“일단 지하에 자리를 하나 내줄 테니까, 거기다 주차하고 해 뜨면 보자고.”

“그냥 들어가도 됩니까?”

“어차피 다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는데 뭘. 동장님 손주라고 하면 괜찮을 거야.”

관리가 빡빡했던 서울 요새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이런 중구난방 절차가 신경 쓰인다.

하지만 굳이 티를 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그냥 안내를 받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부르르릉, 끼익!

완전히 적막 그 자체였던 아파트 외벽과는 다르게 주차장은 그나마 사람 냄새가 난다.

나는 곳곳에 피워진 드럼통 난로와 거지꼴인 사람들을 피해 주차를 완료했다.

“이야, 차가 힘이 좋은데?”

“관리를 잘했더라고요.”

택시 기사가요.

“무기는 일단 오늘 밤까지는 가지고 있어. 원래는 압수하는 건데, 이번만이야.”

“예? 그냥 가져가셔도 되는데.”

내가 사양하려 하자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경비 아저씨가 조용히 속삭였다.

“요즘 요새 안에 쥐새끼가 많아. 동장님 뵙기도 전에 다 털려서야 되겠어?”

아, 어쩐지 아까부터 반갑지 않은 시선이 느껴지던 게 다 ‘그런’ 거였구나.

말뜻을 이해한 나는 초면에 정말 큰 도움이 되어준 경비 아저씨와 흔쾌히 악수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동장님한테 받은 거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여. 내일 아침 일찍 동장님 본가로 데려다줄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아버지께는 그토록 엄하셨다는데 그래도 인정이 박한 사람은 또 아니었던 걸까.

손에 쥐여준 담뱃갑을 극구 사양한 경비 아저씨는 그렇게 주차장을 빠져갔다.

* * *

군을 제대하고 서울 요새로 돌아온 그 날, 내게는 한 편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보낸 사람은 죽은 아버지도 부산으로 간 어머니와 누이도 아닌 친할아버지.

편지 내용은 짧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물려줄 땅이 있다.’

‘알아서 찾아가거라.’

아무리 어린 시절 같이 살았다고 해도 나로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핏줄이다.

하지만 대뜸 물려줄 땅과 요새가 있으니 이 멀고 위험한 강릉까지 오라 하다니.

할아버지도 참 기묘한 분이시고 그걸 또 받겠다고 온 나도 정말 미친놈이다.

그런데 편지를 좀 보낼 거면 여비라도 함께 보내주시지 웬 이상한 물건을 보내왔다.

‘만년필?’

한참 문명이 멸망하기 전, 사람들이 소장과 선물 삼아 구매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하지만 먹을 것도 모자란 이 판국에 만년필?

어디 팔아먹기라도 하란 것일까.

나는 혹시 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금니로 딱딱 씹어보았다.

똑똑.

“아침부터 뭐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마침 주차장으로 찾아온 경비 아저씨가 창문을 두드린다.

황급히 황금색 만년필을 품속에 넣은 나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서울에선 그런 걸 밥으로 먹나?”

“초콜릿입니다, 초콜릿.”

“애들이 좋아하겄네. 나중에 시간 나면 저기 밑에 상가 가서 필요한 거랑 바꿔.”

정보, 요새 상가에서 필요한 걸 물물교환할 수 있다.

이런 건 서울이랑 같구나.

고개를 끄덕인 나는 터덜터덜 주차장 밖으로 걸어가는 경비 아저씨의 뒤를 따라갔다.

“보기 적적하지? 다들 많이 떠나서 그래.”

한참 활동하는 시기여야 할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요새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 몇몇만이 아직 요새 구실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줄 뿐이지,

대부분은 각자 집에 콕 틀어박혀 어두운 얼굴로 곧 다가올 겨울을 걱정할 뿐이었다.

“자, 올라가자고.”

지어진 지 꽤 오래된 희망 아파트는 총 12개 동으로 이루어진 요새였다.

그중 104동 앞에 멈춘 경비 아저씨와 나는 부지런히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설마 펜트하우스?

“동장님 댁은 옥상이야.”

아니구나.

철컹! 끼이익.

그래도 평소 관리를 해왔는지 경비 아저씨는 금방 열쇠를 찾아 옥상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정말 옥상 한가운데 임시로 지어진 허름한 목제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말 여기서 사셨다고요?”

“원래 있던 집은 주민들을 위한 병실로 개조하시고 본인은 이런 허름한 곳에서 쭉 사셨어. 아암! 그만큼 훌륭한 분이셨지.”

동장 타이틀을 그냥 허투루 따신 게 아니었구나.

할아버지도 본인 나름대로 이 치열한 세상에 적응하시며 살고 계셨다.

이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라 멍을 태우는데 문득 하늘에서 흰 것이 떨어졌다.

“첫눈이구먼. 끌끌, 동장님도 손주 왔다는 걸 아시는거여? 싸게 뵙고 와.”

두 눈이 촉촉하게 젖은 경비 아저씨는 주저하는 내 등을 힘껏 밀었다.

그리고 눈이나 치워야겠다는 구시렁거림과 함께 아예 계단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나는 홀로 남았다.

첫눈과 바람이 불어오는 옥상은 생전 느껴보지 못한 봄의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터벅, 터벅, 터벅.

여기저기 널린 자재 도구, 상추를 키우다 만 텃밭, 아직도 태우지 못한 옷가지들.

나는 할아버지가 사셨다는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한 의자 위에 앉았다.

‘물려줄 땅이 있다.’

가만히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왜 부르셨어요?

보고 싶으셨으면 아버지가 가시기 전에 소식이라도 알려주시지.

겨우 평생을 바쳐서 하신다는 게 부족하고 불쌍한 사람들 뒷바라집니까.

근데 참 안됐네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이런 꼴이 돼버렸으니까.

“좀 더 일찍 부르시지 그랬어요?”

슬픔과 울적함, 섭섭함과 그리움.

오랫동안 거세되어있던 수많은 감정이 오늘따라 생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 - - - - -?”

그 순간 먼지가 쌓인 책상 선반에서 무언가를 꽂아둔 통이 우르르 떨어졌다.

깜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굴러다니는 통과 물건을 집었다.

“······같은 거잖아?”

할아버지가 편지와 함께 보냈던 황금색 만년필과 겉모양이 똑같은 제품이다.

아니나 다를까, 책상 선박 위에는 색이 바랜 만년필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나는 다급히 책상 위 천을 치웠다.

펄럭!

‘책?’

아무리 문명이 붕괴했다고 해도 도시나 요새에서 책을 찾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 소수를 위한 유희, 혹은 잘 타는 땔감용으로 쓰일 뿐이지.

여기 놓인 엄청난 크기의 고풍스러운 책처럼 고이 모셔 둘 물건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취미였던 걸까.

거대한 책 옆에는 편지를 보낼 때와 같은 글씨체의 메모지가 한 장 놓여있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도움?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빈다고?

미간을 작게 찡그린 나는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은 책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백지.’

하지만 책에는 도움이 되는 이야기는커녕 아무것도 쓰이지 않는 백지만이 있었다.

그래, 도움은 무슨 도움이야.

모든 게 허탈해진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나머지 유품이나 치우려고 했다.

사각, 사각, 사각.

그런데 어디선가 들려온 거친 필사 소리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분명 가만히 있는 손과

제멋대로 움직이는 만년필.

아까는 분명 백지였던 책의 첫 페이지에 누군가가 휘갈겨 쓴 문장이 남겨져 있었다.

“뭐야, 이게······.”

[희망 아파트 주민 중 낯선 외지인을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파트 104동의 경비 오상식 씨만은 ‘그’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씨암탉을 잡았다.]

사각, 사각.

[발전기를 돌릴 연료는 전부 떨어졌고 난로를 피울 장작도 모자란다. 곧 겨울이 찾아올 텐데, 대책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는 과연 어떻게 움직일까?]

사각, 사각.

나는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책이 스스로 이야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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