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3화 (3/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3화>

그래.

살다 보면 멀쩡하던 세상이 대뜸 멸망하기도 하는데 갑자기 할아버지 책이 혼자 소설을 쓰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냥 저기 아래 열도처럼 방사능이 만든 유령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았다.

·········.

아니, 아니지.

드디어 미쳤냐?

나는 일단 가만히 앉아 양쪽 뺨을 한 번씩 때려보았다.

하지만 따끔한 볼때기는 지금 내가 명백한 현실 속에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아, 머리가 너무 아프다.

나는 일단 현장 보존을 위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집을 빠져나왔다.

마침 조금 전 눈을 치우기 위해 내려갔던 경비 아저씨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유품 정리는 끝났나?”

“조금 천천히 하려고요.”

책에서는 분명 씨암탉을 잡았다고 했다.

나는 정말,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씨암탉 잡으셨습니까?”

“엥? 그걸 어째 알았는감!”

“닭털이 붙어있길래요.”

거짓말이다.

경비 아저씨는 붙어있지도 않은 닭털을 찾기 위해 옷을 연신 털었다.

들리지 않게 심호흡한 나는 태연한 척 연기하며 아저씨와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혹시 근래 연료랑 장작이 부족해서 다가오는 겨울이 걱정되고 그러십니까?”

“에엥?! 그건 또 어째 알았는감!”

“요즘 안 부족한 요새가 있나요.”

이것도 거짓말이다.

경비 아저씨는 그런가? 혼자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정말 마지막, 정말 마지막으로 아저씨를 향해 물었다.

“앞으로 자주 보고 살 것 같은데 통성명이나 나눕시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 이름? 나는 오상식이여.”

“저는 박범석이라고 합니다.”

경비 아저씨, 아니 오상식 씨와 나는 만난 지 뒤늦게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물론 하하 웃고 있는 내 정신은 저기 우주 너머 어딘가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정말 책이 다 맞혔다.

방금 씨암탉을 잡았다는 것도, 요새에 마침 연로와 장작이 부족하다는 것도, 아저씨 이름이 오상식이란 것도 전부 말이다.

안 되겠다.

일단 짐 정리가 끝나는 대로 다시 위에 올라가서 책을 확인해봐야겠다.

그렇게 혼자 심각해져 있는데 큼큼 헛기침한 오상식 씨가 말을 걸어왔다.

“그, 있잖여.”

“예?”

“내가 그냥 솔직하니 물어보는데, 혹시 동장님한테 무슨 이야기 들은 거 없어?”

아, 하긴 요새 사람들은 잘 모르겠구나.

나는 유산 상속을 최대한 돌려 말했다.

“할아버지가 소유하신 재산을 전부 상속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현재 통용되는 상식도 아니고 일단 머물면서 생각을······.”

“그럼 다음 동장 하면 되겠네! 이 요새랑 아파트 전부 자네 할아버지 소유였어!”

할아버지 땅 부자셨구나?

어릴 적 집안을 매몰차게 뛰쳐나온 아버지가 갑자기 원망스러운 순간이다.

“그래도 실질적인 소유라는 게 있으니까요. 굳이 권리를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캬아~ 겸손하기까지. 역시 동장감이야!”

아잇, 싯팔 나이프 맛 좀 볼래?

나는 계속 귀찮은 일을 몰아주려고 하는 오상식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투덜거렸다.

요즘은 그냥 한 가지만 바라건대, 최대한 소란 없는 곳에서 조용히 요양하고 싶었다.

“저 짝에 보이는 건물들 있지? 저기가 바로 상가고 그 앞이 공원이여. 원래는 동장님께서 배급제를 하던 곳인디, 그렇게 돌아가신 이후로 똥파리만 날리고 있지.”

“그땐 사정이 꽤 괜찮았나 봅니다?”

“아이고, 말해 뭐해. 몇 년 전만 해도 강릉에서 제일 큰 요새였어. 오죽하면 다들 여기 살겠다고 몰려와서 난리였었다고.”

서울 요새에서도 못하는 배급제를 했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꽤 요령이 있으셨나 보다.

먼지 쌓인 명품이라는 첫 평가와 마찬가지로 잠재력이 썩 나쁜 요새는 아니었다.

괜찮은데? 마냥 흘려듣기만 하던 나도 시간이 갈수록 귀가 솔깃해졌다.

땡땡땡땡땡땡땡땡 - - - !!!

하지만 그 순간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시끄러운 경종 소리가 아파트 요새를 강타했다.

휘몰아치는 바람, 깜짝 놀라는 사람들.

오상식은 순간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밥때입니까?”

“이런 미친놈! 공격 경보잖여!”

원래 요새라는 게 하루에도 몇 번씩 감염체를 막고 약탈자와 싸우는 게 일과다.

당연히 희망 아파트도 요새였기에 숙제처럼 찾아오는 습격을 감당해야 했다.

보통은 자경단이 알아서 하잖아.

나는 지하 주차장에 있는 차량과 짐이 걱정되어 돌아가 볼 생각이었다.

“가자고 예비 동장!”

하지만 불길한 예상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고 오상식은 힘차게 나를 불렀다.

당연히 따라올 거라고 믿는 저 확신 찬 뒤통수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예에.”

나는 주차장으로 향하려던 발걸음을 돌려 우다다 뛰어가고 있는 오상식을 따라갔다.

* * *

탕! 타앙-!

뒤늦게 도착한 외벽 너머에선 산발적인 총성과 성난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와 오상식 씨는 혹시 모를 눈먼 총알을 피해 조심스럽게 외벽 위로 올라갔다.

마침 외벽 위 초소에는 한 젊은 여자가 쳐들어온 적과 홀로 응전하고 있었다.

뭐야, 자경단 어디 갔어.

외벽 그 어디를 둘러봐도 저 츄리닝을 입은 여자를 제외한 인원은 보이지 않았다.

“왜 이리 늦게 왔어요!”

“경태 이 새끼는 어디 간겨!”

“물 구하러 나갔다가 아직 안 돌아왔어요!”

오상식 씨와 여성은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능숙하게 자리를 스위칭했다.

하지만 문제는 초소에서 꺼낸 무기가 기껏해야 개조한 작살총이라는 것이다.

부아아아아앙 - - - !!

드르륵! 드르르륵!

오토바이를 탄 약탈자들은 콘크리트 외벽 주변을 돌며 파이프 권총을 발사했다.

이딴 짓거리가 한 두 번은 아닌지 약탈자들을 연신 우리를 조롱하며 연신 소리쳤다.

기껏해야 날아오는 작살총으로는 자신들을 잡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뭐합니까, 지금?”

“보면 몰라! 싸우는 거!”

“총은 어디에 두고요.”

총은 어디 있냐는 말에 한참 펌프질을 하던 젊은 여성이 대뜸 욕설을 해왔다.

“진즉 팔아먹고 하나 남았다, 왜! 그거 한 발 쏠 돈으로 시발 쌀을 사다 먹지······.”

아니, 아무리 총알이 귀하다고 해도 기본적인 방어에 쓸 무기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분명 오상식 씨가 외벽 위에서 총을 겨눴던 기억이 있는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있네, 저기.’

외벽 한쪽에는 길쭉한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상자 하나 놓여 있었다.

몰래 기어가 상자를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갈색 엽총 한 자루가 놓여 있다.

철컥!

조준경은 어따 팔아먹었는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한 발이 장전되어있다.

상태도 준수하고 관리도 잘 되어있으니 당장 방아쇠를 당겨도 문제가 없었다.

나는 기분 좋게 길이든 엽총을 들어 능숙하게 견착과 외벽 밖 조준 과정을 걸쳤다.

부릉! 부아아앙!

꺄하하하하!

상대는 싸구려 약에 취해 중구난방 오토바이를 몰고 있는 병신 약탈자 둘.

나는 그중 짐이 가장 많아 보이는 하나를 노려 그대로 가늠좌 안에 담았다.

“어, 어? 박범식이! 뭐하는겨!”

“야! 야 이 미친 새끼야!”

총알 하나 줄 테니 조금만 참아라.

나는 방아쇠 위로 올린 검지를 가볍게 당겼다.

탕!

“컥!”

그러자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이 한참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약탈자를 맞혔다.

끼이이익, 쾅!

놈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는지 오토바이와 함께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진다.

총알 한 발로 정적이 찾아온 요새 외벽.

나는 깜짝 놀라 도망치는 약탈자들과 넋이 나간 사람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요.”

* * *

‘즉사했네.’

외벽 아래로 내려가 깔끔하게 목을 맞춘 약탈자의 시체를 질질 끌고 왔다.

언덕 아래로 떨어진 오토바이는 못 쓸 거 같고 그나마 총알이 조금 남았다.

“이, 이래도 되나 모르겠네.”

아까는 안 내려오겠다고 그리 난리를 치더니 결국 따라오는 오상식이 보인다.

나는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 놈이 가지고 있던 총알 몇 개를 내밀었다.

“여기요. 이자까지 합해서 갚을게요.”

“어? 아니, 빡빡하게 왜 그려? 우리 사이에 총알 몇 개쯤은 그냥 주고받는 거지.”

거짓말.

아까 쏘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냅다 달려와 엽총을 뺏을 기세였었다.

살면서 두 번은 권한 적이 없는 나는 잽싸게 사양하는 총알을 따로 챙겼다.

그러자 오상식 씨는 입맛을 쩝쩝 다시더니 이내 옆에서 장비 노획을 도와주었다.

“아까 보니 총 쏘는 게 장난이 아닌던디. 서울 사람들은 다 그래 사격을 잘하나?”

“못 쏘는 놈은 다 죽었거든요.”

총알이 화폐로도 쓰이는 마당에 한 발, 한 발 꽂아 넣는 게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내 동기 중에 이보다 못 쏘는 머저리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부 죽었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에 기분이 가라앉은 나는 홀딱 벗긴 장비를 챙겨 일어났다.

“권총은 못 쓰겠네요. 갑시다.”

“그, 그려.”

슬슬 배도 고프고 오랜 여행으로 쌓인 피로가 한순간 몰려오기 시작한다.

팬티 한 장 빼고 전부 챙긴 우리는 그렇게 다시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덜컹!

그러자 친히 요새 문을 열어준 츄리닝 여성이 멋쩍게 머리를 긁으며 다가왔다.

“그으, 동장님 손자분이시라고.”

“갑자기 존댓말?”

“아까는 조금 급한 상황이라 말이 막 나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아······.”

으응, 나는 절대 미친 새끼야 라는 욕설에 기분이 나빠지거나 그러지 않았다.

그래도 쿨하게 사과하고 손을 내밀기에 일단 맞잡고 악수부터 해주었다.

“박범석이라고 부르세요.”

“아! 이은서라고 합니다.”

약탈자들과 싸울 때는 사나운 개를 보는 것 같더니 지금은 또 이미지가 다르다.

깔끔하게 인사와 통성명을 끝낸 우리는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다.

“배고프지? 내가 씨암탉 실한 거 한 마리 잡아뒀으니까, 같이 가서 먹자고.”

“아저씨, 저는요?”

“너는 알아서 처먹어!”

백숙, 백숙을 먹어본 지 얼마나 지났더라.

아니, 닭이라는 걸 먹어본 것이 정말 오래전이라는 것은 기억이 난다.

잃어버렸던 입맛이 싹 돌아온 나는 조금 경쾌해진 발걸음으로 뒤를 따라갔다.

터벅, 터벅. 턱.

“엥, 왜 멈춥니까?”

하지만 잠시 뒤 앞서 걸어가던 오상식과 이은서가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을 바라보자 한 무리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 있었다.

“······이제야 기어들 나오는구먼.”

같은 요새 소속 생존자가 분명한데 이 둘의 표정에는 혐오감들이 가득하다.

마침 저쪽에서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한 남자를 필두로 얼굴을 마주했다.

꼬질꼬질한 여타 생존자들과는 다르게 깔끔한 옷을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말했다.

“누가 총 쏘는 걸 봤다는데.”

“쐈으니까, 봤겄지.”

“분명 총알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오상식이 표정을 일그러트린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혐오감이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어떤 관계이길래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적대감을 표하는 걸까.

빨리 가서 닭 먹어야 하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처음 뵙네요.”

“······외지인인가?”

“예. 어젯밤 도착했습니다.”

“바깥사람하고는 할 말이 없네만.”

“총 쏜 사람 찾지 않으셨습니까?”

깔끔하게 한 방 쏘고 챙긴 탄피를 주머니에서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약탈자들이 몰려왔길래 한 발 쏴서 쫓아 보냈습니다.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까?”

말인즉슨, 정작 필요할 때 요새 안쪽에 처박혀 있었던 놈들이 외벽에서 고작 총 한 발 쐈다고 왜 뒤늦게 지랄이냐는 것이다.

말속에 가시가 있다는 걸 눈치챈 중년 남성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갚아야 할 총알이 있는데, 채무자 허락 없이 써버리는 건 경우가 없지 않나?”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아, 경우 따지시는구나!”

중년 남성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한 뒤 주머니에서 이자까지 총알 10발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요새가 지어진 아파트를 한 동, 한 동 훑어보며 작게 혀를 찼다.

“그럼 우리 관계도 한 번 따져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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