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4화>
사실 할아버지가 유산을 남겼다고 해서 요새 소유권을 주장할 생각은 없었다.
꽤 귀찮은 일이기도 했고, 굳이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내보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경우를 따지고 드니 나도 조금 삔또가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분이 누군지 알아! 바로 동장님 하나뿐인 친손주여! 느그들 사는 땅이랑 집! 다~ 여기 박범석이 것이라 이 말이여!”
내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얼굴이 상기된 오상식 씨가 친히 판을 깔아주신다.
하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집문서니 토지 대장이니 모두 직접 보관하시던 분인데 내가 나타나기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는 다른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짜 동장님 손주야?”
“맞네, 맞네! 사진이랑 똑같잖아!”
요새를 개떡으로 운영하셨으면 몰라도 할아버지는 한때 존경받는 지도자셨다.
그 당시 번영을 기억하고 있던 주민들은 동장님과 겨우 같은 핏줄이라는 것만으로도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
이로써 곤란한 처지의 처한 것은 괜스레 내 신경을 건든 중년 남성이었다.
그와 그의 무리는 점차 몰려오는 주민들이 부담스러웠는지 작게 헛기침했다.
“소유권이라도 주장할 생각인가?”
“하하, 아뇨. 그쪽도 아시잖습니다. 요즘 세상에 뭐 법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가 누구 땅인지 분간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왜······.”
나는 돌발적으로 앞으로 다가가 중년 남성의 어깨를 잡고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서로의 얼굴과 표정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이 좁은 거리는 딱 한 가지를 경고했다.
여기 이 무방비한 복부.
언제든지 눈이 먼 칼이 들어올 수가 있다는 걸 말이다.
“경우 따지지 말자는 소립니다. 좀스럽게 총알 한 발로 지랄하지 마시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미간 위로 아주 작은 땀방울이 스며드는 게 보였다.
떨리는 동공으로 심정을 대변한 중년 남성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좋은 충고, 명심하지.”
짝!
“좋습니다.”
긴장의 끈이 풀렸다.
어깨를 놓아준 나는 작은 손뼉과 함께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자 중년 남성은 불쾌한 숨소리를 내뱉더니 이내 상가로 돌아가 버린다.
상황은 그렇게 허무히 끝이 났다.
“닭 먹읍시다, 닭.”
다시 닭 먹으러 가자는 내 말에 넋을 놓고 있던 오상식이 화들짝 놀란다.
“어, 어! 그려! 빨리 먹어야지.”
이은서 그 여자는 오는 내내 같이 먹자고 조르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네.
하지만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내가 쭐레쭐레 앞서가자 오상식 씨가 말했다.
“자네······할아버지를 많이 닮았구먼.”
“그렇습니까?”
“으응, 맞어. 정말 닮았어.”
어린 시절 기억뿐인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해도 지금은 크게 와닿지 않는다.
나는 그냥 웃고 넘겼다.
* * *
소중하게 키웠다는 것을 증명하듯 한번 삶은 씨암탉은 정말로 맛있었다.
양념이라고는 겨우 소금 한 종지가 다인데 어째서 스테이크 맛이 나는 걸까.
나는 일단 염치불문하고 고개를 숙인 뒤 양쪽 볼이 터지도록 닭고기를 쑤셔 넣었다.
물론 식사하는 동안 오상식 씨가 해주는 이야기를 놓쳐 듣지는 않았다.
“그 양반이 이만석이라고 하는 놈인데, 원래는 저기 삼척 길바닥에서 알아주는 사채업자였어. 그 알지? 고리대금 하는.”
“어쩌다 여기로 왔답니까?”
“뭐 다들 비슷혀. 그때는 여기만큼 번화한 요새가 없었으니 먹고 살기 위해 오는 거지. 그 양반도 물건 빌려주다 정착한겨.”
사채업자라.
어쩐지 사람을 대하는 꼬락서니가 질척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사람들이 싫어했겠네요.”
“당연히 싫어했지! 빌려준 쌀 못 갚는다고 어린 딸을 달라는 게 그게 인간이여? 아주 쓰레기만도 못한 놈이었어.”
한참 열변을 토한 오상식 씨는 마치 옛 시절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감상에 젖었다.
“그때 나선 게 너거 할아버지여. 딱 어깨부터 잡고! 요즘 살기 좋지? 이러니 이만석이가 일단 대가리부터 박았다니까.”
조금 전이랑 상황이 같구나.
왜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담이 큰 양반은 아니던데요.”
“뒤에서 수작질이나 하는 비열한 놈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앞으로 조심혀.”
현지인의 말은 모두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중요한 정보다.
닭죽을 미친 듯이 퍼먹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맛을 다셨다.
“뭐, 앞으로 계획이라도 있나?”
“일단 짐이랑 유품 정리부터 하고, 곧 겨울이니까 월동 준비도 좀 해놔야죠.”
으음, 음. 그래야지.
한참 맞장구를 쳐주던 오상식은 곧 눈을 게슴츠레 뜬다.
“그니께, 정착한다고 만다고?”
“해야죠. 어디 갈 곳이 있는 곳도 아닌데.”
그래도 나도 사람이라고 할아버지의 발자취에서 이유 모를 그리움을 느끼고 있다.
어차피 목적성을 잃고 방황하고 있던 때, 여기 정착하는 것도 나쁠 것 같진 않았다.
“그치! 맞지?! 하하하하! 조금만 기다려! 내가 숨겨둔 소주 하나 가지고 올 테니까!”
그러자 얼굴에 함박웃음을 띄운 오상식 씨는 헐레벌떡 경비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동안 소중하게 모셔두었던 빨간 뚜껑은 입주 환영을 위해 딸 예정이었나 보다.
나는 부랴부랴 창고로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흘러내린 코를 훌쩍였다.
그렇게 소주 한 병으로 의기투합한 우리는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야 헤어졌다.
* * *
끼이이익.
한 손에 나이프를 쥔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할아버지가 살던 집의 문을 열었다.
이유 모를 따뜻함이 느껴지는 집 내부는 내가 나왔을 때랑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후우, 작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뚜벅뚜벅 안으로 들어가 의자 위에 앉았다.
돌아가지 않는 목을 억지로 움직이니 마침 그 문제의 책이 시야에 들어왔다.
첫 줄, 두 번째 줄.
이번에도 역시나 다음 문장이 쓰여있었다.
약탈자들을 막고 밥까지 얻어먹고 온 그사이 지가 벌써 소설을 써버린 모양이구나.
나는 차라리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책상 앞으로 다가가 책을 읽었다.
[영웅다운 활약으로 약탈자를 몰아낸 ‘그’는 두 사람으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희망 아파트 주민 이만석은 건방진 외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늘 내 행동을 전부 꿰고 있는 흔히 전지적 시점으로 쓰인 짧은 글이다.
나는 이것으로 이 책이 트릭이나 누군가의 장난질이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사각, 사각.
그 순간 가만히 있던 황금색 만년필이 다시 한번 책 위에 글을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그’는 생각했다. 앞으로 요새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전기가 꼭 필요하다고 말이다. 이는 과거 망가졌던 태양광 발전기를 통해 어떻게든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태양광 발전기? 들어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책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문장 바로 아래 유치한 보물 지도를 그렸다.
[발전기를 관리하던 기술자가 살해당한 이후 태양광 시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이는 없다. ‘그’는 일단 남겨진 단서를 따라 요새 뒷산에 의구심을 품었다.]
아주 시발, 제멋대로 글을 쓰는 것도 모자라 사람한테 이래라저래라한다.
나는 책을 확 찢어버릴까 하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엉성하게 그려진 보물지도.
분명 희망 요새와 그 뒷산을 그린 게 분명했다.
만약 이 책 말대로 요새 뒷산에 태양광 발전기가 숨겨져 있는 게 맞다면······.
사각, 사각.
[희망 아파트 주민 이은서와 그의 동생 이경태가 104동 옥상을 찾아왔다. 이 둘은 ‘그’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았다.]
뭐야,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있을 일도 알려주고 그런다고?
깜짝 놀란 나는 저 말이 정말인가 싶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구면인 이은서와 한 덩치 하는 남성이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책을 한번 노려본 뒤, 용건이 있어 보이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
내가 갑자기 문을 열고 나오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은서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이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곧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저, 쉬시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이쪽은 제 동생인데 뵙고 싶다고 해서···.”
그녀의 말 채 끝나기도 전 키가 185는 거뜬히 넘을 것 같은 남성이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경태 씨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까 물 뜨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책이 맞혔다.
하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이경태는 작게 감탄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때는 제가 자리를 지켰어야 했는데, 상황이 녹록지 않아서.”
“이해합니다.”
손과 목 곳곳에 보이는 흉터 자국을 보아하니 일반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아마 경태라는 이 남자가 요새 경비를 담당하는 실질적인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반갑게 손을 맞잡은 그는 주머니에서 왠지 익숙한 키 하나를 건네주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두셨더라고요. 노리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서 일단 104동에서 보이시는 곳에 주차해 뒀습니다.”
와 씨 큰일 날뻔했네.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짐과 택시를 그만 잊고 있었다.
병신처럼 차 키를 꽂아두고 온 나는 압도적인 감사를 표하며 양손으로 키를 받았다.
“그리고.”
하지만 이경태는 용건이 끝이 아니라는 듯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약탈자 한 놈을 죽이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인상착의 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역시 본론은 따로 있었다.
오늘 내가 오전에 사살한 약탈자의 인상착의라.
“체구는 이 정도, 머리는 완전히 밀었고 오른쪽 어깨에 문신 하나가 있습니다. 앞니 두 개가 없는 대신 어금니 하나가······.”
“그, 그 정도면 됩니다.”
어금니 하나가 금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멈추라니까 일단 멈췄다.
쏟아지는 정보량에 잠시 당황한 이경태는 곧 턱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제가 아는 녀석이 맞을 겁니다.”
그런데 약탈자 하나를 죽인 것 치고는 표정이 어딘가 복잡해 보였다.
“죽이면 안 되는 놈이었습니까?”
“아뇨, 훌륭한 대처였습니다. 다만, 알아내고 싶은 것이 조금 있어서······.”
말끝을 흐린 이경태는 옥상에서 보이는 요새 뒷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 1년간, 요새를 끈질기게 공격해오던 놈이었습니다. 소문으로는 저기 뒷산에 본거지가 있다고 하는데 찾을 수가 없네요.”
뒷산과 약탈자 본거지, 그리고 태양광 발전기.
순간 단어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퍼즐 조각이 맞춰진 기분이다. 모든 단서는 오직 저 뒷산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교차하는 사건을 따라 요새의 안전과 미래를 확보해야 할 때라는 걸 직감했다.]
[차량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 이경태 주민은 성실하고 강직한 사람이다. 만약 ‘그’가 뒷산으로 간다고 한다면 그 누구보다 먼저 무기를 들고 나서줄 것이다. 휴식을 취하는 대신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다음 화에 계속.]
뭐, 다음 화?
시발 아주 자기 멋대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