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5화>
해가 밝았다.
나는 대충 물 한 줌으로 세안하고 끼니를 얻어먹은 뒤 가지고 온 장비부터 점검했다.
일단 기본적인 나이프 두 자루.
서울 요새에서 출발할 때 산 건데 절삭력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내구성이 별로다.
벌써 손잡이 부분이 헐렁한 것을 보아 역시 군부대 앞에선 뭘 사는 게 아니다.
리볼버 한 자루와 총알 하나.
택시 기사가 가지고 있었던 이 리볼버는 그분의 썩은 이빨보다 관리가 잘 되어있다.
연식은 좀 되어 보여도 옷이든 무기든 원래 손때묻은 구제가 최고인 법이다.
약탈자한테 약탈한 재생 탄 스무 발.
보통 공장 생산된 총알과 10:1 비율로 교환되는 신뢰도 최악인 쓰레기 탄이다.
심지어 규격이 맞는 총도 없어서 그냥 쌀 바꿔먹는 용도로 쓸 수밖에 없겠네.
이 정도면 희망 요새에선 상위 1% 부자라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건 왜일까.
속이 든든한 리볼버 탄 몇 개만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그렇게 장비 점검을 끝낸 나는 요새로 들어오기 전 모습 그대로 나갈 준비를 끝냈다.
“예비 동장 있는감?”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옥상으로 올라온 상식 아저씨가 뒷짐을 지고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별건 아니고. 오늘 뒷산에 간다길래 얘기 좀 할 겸 먹을 것 좀 조금 챙겨왔어.”
아침 끼니도 직접 챙겨 주시더니 이제는 밖에서 먹으라고 도시락까지 싸주셨다.
무한 감동! 이런 건 거절하는 타입이 아니라 넙죽 락앤락 도시락통을 챙겼다.
“경태랑 같이 간다며? 그래도 밖에서 하는 일인디 겨우 둘만 가서 되겠어?”
“살펴보기만 하는 건데요, 뭐.”
어젯밤 이경태와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일단 뒷산부터 정찰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물론 명목상 이유는 희망 요새를 위협하는 약탈자의 근거지를 파악하는 거였지만,
내 진짜 속내는 책이 알려준 태양광 발전기의 존재를 찾아내는 데 있었다.
“다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햐. 들어온 지 겨우 이틀밖에 안 된 사람도 이렇게 바쁘게 일하는디, 다들 덜덜 떨기 바빠서는.”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요새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자체적인 전기 생산이다.
한참 몰락하던 희망 요새도 전력이라는 피가 돈다면 곧 활기를 되찾을지도 몰랐다.
“엽총이라도 빌려줄까? 아, 총알이 없지.”
그나마 빚을 갚지 않고 숨겨둔 총알은 어제 내가 발사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상식 아저씨는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반쯤 벗겨진 이마를 '탁' 쳤다.
“맞다! 저번에 물건이 조금 들어왔다고 들었는디 상가로 가보면 있을 수도 있겠어.”
“들려나 볼까요?”
“그러자고. 싸게 준비하고 나와!”
안 쓰는 재생 탄이 20발 정도 있으니 혹시 필요한 장비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창 준비하고 있을 이경태도 기다릴 겸 아저씨를 따라 집 밖을 나서려 했다.
“- - - - - -.”
하지만 그 순간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 했던 그 ‘책’이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다음 화에 계속.’
어이가 없었던 저 문장을 끝으로 다음 날이 될 때까지 그 어떠한 갱신도 없었다.
발동 조건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기분이 조금 불쾌하다는 것과는 별개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예비 동장! 안나와?”
“예, 예! 갑니다!”
오기 전에 또 써놔라.
땔감으로 쓰이기 싫으면.
* * *
“캐러밴은 자주 옵니까?”
“뭐, 어쩌다 한 번씩은 와. 저기 이만식이 그놈도 거기서 물건을 떼다 파는 거니까.”
보통 요새는 고립된 하나의 집단인 것 같아도 교류가 없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아무래도 지역마다 잘 나오는 자원이 있고 유난히 부족한 자원이 있는 법이니까.
그리고 그런 요새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캐러밴과 같은 이동 상인들이었다.
“우리도 한때는 캐러밴이 뻔질나게 오고 가고 그랬지. 지금은 뭐 팔 게 있남?”
“그래도 주 상품이 있었나 보네요.”
“깨끗한 지하수가 나왔거든. 강릉에서 물맛 하면 바로 우리 희망 요새였는데 말이여.”
하긴 조명을 켤 전기도 없는 마당에 깊은 지하수를 퍼 올릴 수가 있겠나.
여기에도 많은 사정이 있는지 TMI 기계이던 아저씨도 오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게 말없이 걷고 있는데 마침 저 멀리 아파트 단지 내 상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총 6개 가게로 이루어진 2층 건물.
세탁소, 문방구, 치킨집이라고 쓰인 낡은 간판들이 어째 친숙하기 그지없다.
딸랑, 딸랑.
그중 문이 열린 곳을 찾아 들어가니 제법 구색을 갖춘 가게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
한참 낡은 잡지를 보고 있던 가게 주인이 우리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다.
“물건 사러 온 거니까, 지랄 말어.”
어제 이만석과 함께 왔던 떨거지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엉거주춤 자세를 푼다.
나는 쿨내를 풀풀 풍기는 아저씨와 함께 똘마니가 있는 매대 앞으로 다가갔다.
“38구경 탄을 사고 싶습니다.”
“몇, 몇 발 찾으시는데요.”
나는 약탈자에게서 노획한 재생 탄 스무 발을 전부 매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작게 헛기침한 똘마니는 총알 상태를 살피며 물건값을 감정했다.
“10:1에 거래 수수료로 한 발······.”
“수수료는 시벌, 옥수수를 털어줄까?”
아저씨가 옆에서 흥정을 돕는다.
이에 겁먹은 똘마니는 매대 아래서 원하는 38구경 총알을 두 발 꺼내 올려두었다.
어디 흠난 곳도 없고 상태도 좋아 보이는 총알.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겨우 두 발뿐이라 아쉽기는 한데 어쨌든 신뢰성 높은 총알을 구하기는 했다.
철컥!
그 자리에서 리볼버를 장전한 나는 갖가지 물건이 진열된 가게를 둘러보았다.
통조림부터 시작해서 생수와 약품, 다양한 총기와 날붙이까지 정말 없는 게 없다.
끽해야 동네 사채업자라고 무시했는데 그래도 장사 수완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오.”
한참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는데 한가운데 진열된 도끼 한 자루가 내 시선을 끈다.
제대로 된 철로 단조한 것도 모자라 손잡이까지 동물 가죽으로 잘 마감 해뒀구나.
이런 도끼를 뭐라고 하더라, 토마호크? 딱 찍고 던지는데 특화된 녀석 같다.
나는 토마호크를 쥐며 물었다.
“이런 건 얼마씩 합니까?”
“100발은 주셔야죠.”
냉큼 다시 올려두었다.
역시 좋아 보이는 물건은 그에 맞는 가격이 있는 법이다.
“그게 마음에 드나벼?”
“좋잖아요. 딱 봐도.”
한 번 쏠 때마다 재산이 거덜 나는 총보다는 이런 근접 무기를 애용하는 편이다.
내가 아쉽다는 듯 뒤로 물러나자 눈을 게슴츠레 뜬 아저씨가 토마호크를 쥐었다.
“이거 하나 계산해 줘.”
“예? 아니······.”
토마호크를 매대 위로 올려둔 아저씨는 그대로 손목시계까지 풀어 올려뒀다.
“배터리 어제 간 거야. 이거면 되지?”
“뭐. 얼추 맞겠네요.”
갑자기 왜 그래? 깜짝 놀란 나는 무리하는 상식이 아저씨를 극구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더니 이내 구매한 토마호크를 건네줬다.
“고마우면 무사히 돌아오기나 혀. 예비 동장이 해줄 일이 아주 천지빼까리니까.”
말은 툴툴거려도 뭐 하나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절실히 느껴진다.
무사히 돌아오라는 말에 나는 기분 좋은 웃음으로 화답할 수 있었다.
* * *
“쉿, 여기입니다.”
준비를 끝내고 요새 정문을 지나치지 미리 밖에 나와 있던 이경태가 나를 불렀다.
어젯밤 두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눈 그는 조금 친숙해진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예, 대충.”
“그럼 곧바로 출발하시죠.”
도보로 이동하는 시간이 있다 보니 지금 출발해야 해가 지기 전 돌아올 수 있다.
나는 군말 없이 앞서 걸어가는 이경태를 따라 요새 뒷산을 향해 출발했다.
마침 구름 한 점 없는 날이라 감염체 걱정 없이 이동할 수 있는 건 덤이었다.
‘책은 조용했지.’
혹시 무슨 변수라도 있을까 싶어 오기 전에 책을 잠깐 확인하고 나왔다.
하지만 어제는 참 바쁘게 움직였던 만년필은 이상하게도 일을 하지 않았다.
역시 무언가 사건이 터져야 하는 걸까.
계속 이런 식으로 의지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보는 걸 참을 수가 없다.
“저, 범석 씨.”
그 순간 이경태가 말을 걸어왔다.
“사실 조금 걱정했었습니다.”
“예?”
“알지도 못하는 외지인이 갑자기 유산을 물려받았다길래, 다들 다른 지역 밑으로 넘어가겠거니 했거든요. 희망 요새가 보기엔 이래도 탐을 내는 세력들이 꽤 많습니다.”
확실히 이 정도 요새면 평생 먹고살 물자와 식량을 대가로 팔아넘길 만했다.
“하지만 저희를 도와주시는 걸 보고 역시 동장님 손주분이시구나 했습니다. 사실 요즘 남을 위해 싸운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범석 씨는······.”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생판 모르는 요새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
나야 뭐, 할아버지 유산을 물려받았다는 생각에 의무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지.
이 경태라는 남자처럼 우직하고 성실하게 사람들을 도와줄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 참 좆같은 놈들투성이인 세상에 이런 착해빠진 사람도 있어야지.
서울 요새에서 잔뜩 피폐해져 있다가 이런 순수한 변두리에 오니 기분이 묘했다.
“쉿.”
하지만 그 순간 흔적을 발견한 내가 중얼거리는 경태를 보며 제스처를 취했다.
이제 도로를 벗어나 산으로 들어가는 길, 질척한 흙 위로 바퀴 자국이 남아있다.
“······오토바이네요.”
단순히 한 번이 아니다.
꽤 오랜 시간 이곳을 오고 다녔는지 자국이 깊고 짙다.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 흔적을 하나하나 살펴본 나는 한 가지 결과를 도출했다.
“많아 봐야 3~4대겠군요.”
“그게 보이십니까?”
“잔재주가 많아서.”
짬에서 오는 바이브가 있지 이 정도 흔적도 추측 못 하면 죽은 중대장이 운다.
지난번에 내가 한 대를 파괴했으니까, 기껏해야 남은 오토바이는 2대나, 3대.
이경태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총인원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잘하면 오늘 밤 쇼부를 치겠는데?
손을 탁탁 턴 나는 이경태를 부르려고 했다.
부아아아아앙 - - - -!
그런데 저 멀리 산 아래 도로에서 익숙한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부품을 있는 데로 가져다 조립해 저질스러운 소리가 나는 누더기 오토바이.
약탈자다.
“하필 지금······.”
이대로 두면 근거지로 올라갈 것이다.
주변이 산이다 보니 들킬 염려는 없지만, 공격할 수단이 없다는 게 아쉽다.
하지만 나는 안 좋은 경험을 통해 효과적으로 오토바이를 잡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혹시 밧줄 같은 거 있습니까?”
“아! 등산 로프는 있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밧줄 한쪽 잡으시고 저기 반대편 풀숲으로 가 계세요.”
말뜻을 단박에 알아챈 이경태는 밧줄을 잡고 반대편 풀숲으로 뛰어갔다.
나도 마찬가지로 반대쪽 밧줄을 잡고 오토바이가 오는 길목 옆에 숨었다.
부아아아아아앙 - - - -!!
가까워진다.
다행히 오토바이는 한 대, 약탈자는 늘 그렇듯 비탈길을 올라갔다.
나는 놈이 우리 사이를 지나가기 직전 휘파람 신호와 함께 밧줄을 들어 올렸다.
휘리릭, 컥!
쿠당탕!
오르막길이라 목을 자르진 못했지만, 오토바이를 멈추게 하기는 충분했다.
안면에 밧줄이 걸린 놈은 그대로 바닥을 굴렀고 오토바이는 주인을 잃은 채 쓰러졌다.
스르릉!
혹시 몰라 토마호크를 뽑은 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놈을 향해 다가갔다.
빠각!
다행히 살아있구나.
나는 턱을 한번 가격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기절시켰다.
“새, 생각도 못 한 방법입니다. 서울에서는 다 이런 식으로 싸웁니까?”
“아뇨, 제가 이렇게 당했었거든요.”
말했잖아, 안 좋은 기억이라고.
나는 이마 흉터를 긁적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