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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6화 (6/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6화>

보통 의리라고 한다면 손가락 몇 개쯤은 부러져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 약탈자는 겨우 엄지발가락 하나를 부러뜨렸다고 아는 걸 전부 털어놓았다.

“사, 살려줘! 내가 아는 건 전부······컥!”

참 의리도 없는 놈이다.

나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돼지 멱을 따듯 버둥거리는 약탈자의 목숨을 끊었다.

시체랑 장비는 대충 풀숲에 숨겨 놓고 내려오는 길 깔끔하게 수거해갈 생각이다.

그렇게 쓰레기를 잘 처리한 우리는 풀숲이 우거진 한편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대략 8명 정도네요.”

사실 대략 8명이 아니라 ‘겨우’ 8명밖에 안 되는 거 아니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표정이 어두운 이경태를 보고 있자니 그런 가벼운 질책도 할 수 없었다.

“후.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겨우 8명도 안 되는 놈들한테 휘둘리기나 하고······.”

“뭐, 상황이 상황이지 않습니까.”

왜 마을 자경단이 겨우 3명뿐인지, 왜 다른 주민들은 집에 처박혀 가만히 있는지는 아직 물어볼 타이밍이 아닌 것 같다.

나는 그냥 복잡한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손에 묻은 핏물을 낙엽에 닦았다.

“인원을 빼기엔 무리가 있겠죠?”

“예, 아무래도.”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2명이 최소한의 경비를 하고 한 명이 움직였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와 이경태 둘뿐이라는 것이다.

“까짓거 둘이 해봅시다.”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정도도 못 할 거면 그냥 요새 팔고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죠.”

세상이 멸망하기 전이야 이래저래 따지고 재보며 상황을 회피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과 공간만이 남은 지금 세상에선 포기는 곧 죽음을 뜻했다.

적이 우리 앞마당까지 왔다.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나는 따가운 질책에 풀이 죽은 이경태의 어깨를 툭 쳐주며 다시 힘을 북돋웠다.

“기습하는 조건이면 우리가 훨씬 유리합니다. 보셨잖아요? 벌써 한 명 죽인 거.”

그러자 강단이 있는 사람답게 이경태는 금세 사기를 되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나는 다시 장비와 무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톡, 톡.

마침 하늘에서 비가 온다.

먹구름은 곧 장대비가 내릴 거라는 걸 알려주듯 불운을 담고 일렁이고 있다.

죽음이 특별한 세상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차마 다 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장대비가 모든 것을 파묻어버리길 기도했다.

* * *

쏴아아아아 - - - !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과는 어울리지 않게 장대비는 세상을 흠뻑 적시기 시작했다.

당연히 먹구름은 하늘을 가렸고 마침 산이라는 점 때문에 주변이 더욱 어두워졌다.

참 몰래 움직이기 좋은 상황이다.

우리는 흐릿한 등산로를 지표 삼아 위로 올라가며 놈들의 본거지를 찾아 나섰고

오후 4시가 될 무렵, 약탈자들의 베이스캠프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끼이이이익 - - - !

밤에만 돌아다니는 감염체들은 해가 없는 틈을 타 도시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이에 약탈자 놈들은 돌아다니는 것을 포기했는지 하나둘 캠프로 모여들었다.

원래 날씨가 좋지 않으면 쉬는 거지.

잠시 캠프 근처를 서성이며 지켜보니 곧 잔뜩 해이해진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전기가 들어오네요?”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주변이 더욱 어두워지자 캠프는 조명을 하나씩 점등했다.

작은 배터리로는 어림도 없는 전력량.

역시 희망 요새가 분실했던 태양광 발전기를 저 약탈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슬슬 움직여봅시다.”

반년을 이러고 지냈는데 설마 먼저 쳐들어올 거라는 생각도 못 할 것이다.

드디어 풀숲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허리춤에 토마호크를 뽑아 든 채 걸어갔다.

마찬가지로 작게 숨을 몰아쉰 이경태가 마체테를 들고 내 뒤를 따라온다.

하하하! 미친 새끼!

시발, 오늘은 텄네!

조명을 주변을 경계하는 용도로 써야지, 자기들끼리 비추고 놀면 그건 병신 아닌가.

나는 고작 한 명뿐인 경계 인원을 보며 참 갈 데까지 갔다는 한심함이 몰려왔다.

이 새끼들 그동안 참 운이 좋았구나.

나는 캠프 감시탑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초병을 향해 그대로 토마호크를 던졌다.

후웅, 후웅, 퍽!

허공을 두세 번 회전한 토마호크는 무방비하게 서 있던 놈의 머리통을 깨부쉈다.

머리뼈를 한 방에 터트린 찰진 타격감이 멀리 떨어진 여기까지 전해진다.

내가 곧장 수신호를 보내자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경태가 시체를 끌어내린다.

푸숙!

잽싸게 뛰어가 합류한 나는 토마호크를 뽑아 챙긴 뒤 시체를 구석에 밀어 넣었다.

핏물은 금세 씻긴다.

장대비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우리는 그대로 양쪽으로 찢어져 캠프 외곽에서부터 천천히 조여 들어갔다.

“시발럼들. 또 나만 가지고, 딸국.”

마침 술을 처먹다가 오줌이 마려운 또 다른 놈이 비틀비틀 걸어와 등지고 선다.

서걱!

이번에는 자세를 낮춘 채 다가가 입을 막고 토마호크 뒷날로 친절하게 목을 긋는다.

비명이 점점 사그라질 때까지 기다리며 이경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 - -.”

내가 먼저 덮치길 기다린 그가 옆으로 지나가는 놈에게 몸을 날려 넘어트린다.

그리고 한 치 망설임 없이 목을 긋고 반대편에 서 있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걱정했는데 알아서 잘하네.

하긴 이쯤 살아남았으면 자기 앞가림은 다 할 수 있는 사람들만 남았을 거다.

엄지를 척 들어준 나는 다음 표적을 찾으라는 제스처와 함께 앞으로 발을 디뎠다.

지금까지 셋.

하나둘 정도만 더 잡고 일시에 캠프를 습격해 깔끔하게 처리하면 베스트다.

“어, 어?! 누, 누구야 너!”

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이경태가 지나가려는 바로 앞 텐트에서 한 놈이 걸어 나왔다.

나는 아주 침착하게 리볼버를 뽑아 황급히 총을 꺼내려는 놈을 겨냥했다.

탕!

그리고 등판을 쏴 깔끔하게 즉사시킨다.

물론 크게 울려 퍼진 총성은 조용하던 베이스캠프에 한순간 혼란을 불러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기다! 여기 적······!”

탕!

정신을 차릴 시간을 주면 안 된다.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두 놈들을 발견한 즉시 바닥에 냅다 엎드려 또 한 발 쐈다.

“컥!”

그렇게 발사한 두 번째 총알은 둔기를 들고나오던 놈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옆 동료를 잃어버린 나머지 한 놈은 엉거주춤 총을 꺼내 내게 쏘려 했다.

“으아아아아아아 - - -!!!”

쿵!

하지만 그 순간 반대편에서 고함을 지르며 뛰어온 이경태가 황소처럼 들이박았다.

커다란 체구에서 오는 엄청난 힘!

태클을 당한 놈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콰직!

딱 보아도 흥분한 이경태는 추켜든 마체테로 머리를 찍고 또 찍어 버린다.

나는 그사이 나머지 놈들을 찾기 위해 인기척이 느껴졌던 텐트로 뛰어갔다.

타앙-! 핑!

“이크.”

그러자 여기로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총알이 머리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간다.

잽싸게 바닥에 엎드린 나는 쏟아지는 장대비 사이에서 총염 위치를 찾아냈다.

‘상자 뒤, 엄폐 둘.’

하나는 총을, 하나는 둔기를 들고 동시에 공격할 타이밍만을 재고 있다.

엄폐한 적이라.

나는 허벅지에 묶어둔 나이프를 꺼내 상자 옆 서치라이트로 던졌다.

쨍그랑! 퍼엉!

“끄아아아악 - - -!!”

서치라이트 조명 유리가 터지며 총을 조준하고 있던 놈의 안면으로 쏟아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나는 장대비를 뚫고 달려 놈들이 숨은 상자를 뛰어넘었다.

“어?”

반 반자 빠른 타이밍이었다.

설마 벌써 올 줄 몰랐던 놈은 넋이 나가 버린다.

콰직!

축을 옮겨 안면을 발로 차 준 뒤 토마호크를 내려찍어 확실히 죽여놓는다.

“살, 살려줘! 살려줘어어어!”

뜨거운 유리 조각에 실명당한 또 다른 놈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바닥을 기었다.

잠깐, 숨이 차네.

빗물로 흠뻑 젖은 얼굴을 닦으니 이번에는 핏물로 흠뻑 젖는다.

퉤! 나는 입안으로 들어온 피를 뱉고 버둥거리는 놈을 처리한 뒤 숫자를 센다.

콰직!

‘마지막 하나가 남았는데.’

그사이 도망친 건 아닌가 싶어 뛰어왔던 방향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끄르르륵······!”

그곳에는 이미 도망친 놈을 붙잡은 이경태가 두꺼운 오른팔로 목을 조르고 있었다.

어우, 시발 팔뚝 두께 좀 봐.

생긴 것처럼 번듯하게 싸우겠거니 했는데 하는 짓을 보면 과격하기 그지없다.

더 이상 적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털썩 주저앉은 이경태의 어깨를 툭 쳤다.

“다친 곳은 없죠?”

“허억, 헉! 괜, 괜찮습니다.”

2:8 치고는 할 만 했지? 농담을 건네고 싶은데 표정을 보니 숨넘어가기 직전이다.

나는 비틀거리는 이경태를 일으켜 준 뒤 쑥대밭이 된 약탈자 캠프를 둘러보았다.

반년 동안 꾸역꾸역 처먹기만 한 돼지 저금통의 배를 반으로 가를 때가 왔다.

* * *

남의 물건을 뺏는 게 더 짜릿하다는 건 한 젓가락씩 뺏어 먹은 라면이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이 약탈자 새끼들도 성실하게 일하지 않고 남의 물건을 뺏어 먹는 거겠지.

물론 그런 놈들 물건을 즐겁게 약탈하고 있는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덜컹!

“이야, 땡잡았네.”

보통 약탈자들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라 비축 같은 건 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놈들은 털어오면 털어오는 족족 캠프 창고에 물자를 보관했고

심지어 배터리를 충전해서 가져다 파는 것으로 캐러밴 활동도 하고 있었다.

이 새끼들 나름 유능했을지도?

근데 기왕 알뜰한 거 총알이나 무기 좀 아껴 쓰지, 남는 게 하나도 없을까.

매번 아쉬운 게 넉넉하지 못한 탄약이다 보니 이럴 때가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범석 씨! 여기입니다!”

한참 캠프 주변을 수색하던 경태가 다급히 손전등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찾았습니까?”

“예, 맞는 거 같습니다.”

옮기던 상자를 내려놓고 서둘러 가보니 콘크리트로 지은 돔이 하나 있었다.

산 어딘가로 이어져 있었던 전설들과 마찬가지로 캠프와 연결된 전자기기들.

내가 손을 내밀자 경태가 빠루를 넘겨준다.

빠각! 끼이이익!

굳게 닫힌 자물쇠를 비틀어 뽑아내자 녹이 잔뜩 슨 경첩이 비명을 지른다.

결국 문을 뜯어내다시피 개방한 나는 돔 안쪽을 손전등으로 비춰보았다.

“오?”

겉으로만 봐도 발전기라는 걸 알겠다.

물론 전문가가 아니기에 어떤 구조인지, 현재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구석에 가득 쌓여 있는 배터리를 통해 정상 작동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넉넉히 쓸 정도는 아니어도 기본적인 인프라는 조성할 수 있을 거다.

“대, 대단합니다. 발전기가 있다는 말만 들었지, 설마 이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이것도 역시 동장님께서 알려주신 겁니까?

“아, 네. 그렇죠.”

할아버지가 아니라 혼자 소설 쓰는 책이 말해줬다고 하면 미친놈 취급받겠지.

나는 대충 둘러댄 다음 혹여나 빗물이 들어갈지도 모르는 틈을 밀봉하고 문을 닫았다.

“일단 여기서 하루 묵고, 해가 밝는 대로 돌아갑시다. 아마 여러 번 올 거 같으니.”

장대비가 내리고 해까지 진 관계로 도로에는 감염체들이 득실거릴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약탈자들이 만든 캠프에서 밤을 보내고 돌아갈 생각이다.

“경태 씨.”

“예?”

“창고에서 반병 남은 양주를 찾았는데, 주무시기 전에 술 한 잔 어떻습니까?”

비 오는 날과 사람을 죽인 날은 유독 술이 당긴다.

하필 그 두 가지 모두가 해당하는 순간이 왔으니 굳이 안 마실 이유가 없다.

“좋습니다.”

비는 밤새 내렸다.

이상하게 취하지 않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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