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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8화 (8/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8화>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솥을 걸고 불린 쌀과 온갖 재료들을 모두 때려 박았다.

그리고 1시간가량 팔팔 끓여주자 제법 맛있는 냄새가 나는 죽이 완성되었다.

깡깡깡!

아침 배급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들리지 않았던 냄비 두드리는 소리가 요새를 깨운다.

처음에는 주민들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만 내밀고 쳐다봤지만,

이내 솥에서 나는 따뜻한 김과 냄새를 참지 못했는지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런 소란도, 물음도 없었다.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배급하고 질서를 지키며 밥을 먹었다.

사람들이 모인 아파트 공원에는 오직 죽을 퍼먹는 소리와 옅은 훌쩍임만이 들려왔다.

“4인분만 주세요.”

“여, 여기 있습니다. 동장님!”

마찬가지로 죽 4그릇을 떠온 나는 자경단 사람들과 함께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아저씨, 죽 식어요.”

“으응, 그려. 먹어야지.”

그러자 어젯밤부터 넋이 나가 있던 상식이 아저씨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죽 한 입, 입김 한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앉은 우리는 조용히 죽을 떠먹었다.

그리고 죽 그릇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나는 일행들을 향해 넌지시 물어보았다.

“생각은 좀 해보셨어요?”

지난밤, 이 셋을 조용히 불러 그동안 밝히지 못했던 내막을 전부 말해주었다.

당연히 이만석과 주민들이 붙어먹은 줄로만 알았던 일행들은 이를 부정하려 했지만,

곧 탄식과 허탈함을 반복하며 그동안 쌓였던 오해를 뒤늦게나마 받아들였다.

제일 가슴앓이가 심했을 상식 아저씨는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한탄했다.

“용서를······해야 하겄지?”

생각이 복잡할 만하다.

머리로는 아는데 그동안 설움이 쌓였던 마음이 쉽게 따라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용서를 해야 하냐고 묻는 아저씨를 향해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용서하지는 마세요.”

이 사건의 배후는 식량을 인질 삼아 사람들을 겁박하고 조종하려 한 이만석이 맞다.

그렇다고 해서 이에 굴복한 주민들에게 잘못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왜? 동장이 원하는 게 용서 아니었어?”

“제가 원하는 건 요새 정상화지 눈물 짜고 끝내는 신파극이 아니에요. 저들 대다수가 비겁했다는 건 사실 맞잖아요?”

누군가는 끝까지 의무를 지키려 했고, 누군가는 이를 포기한 채 굴복했다.

이 둘에게 아무런 차등을 두지 않는다면 요새는 온통 비겁한 인간들만 남는다.

“미워해도 되고 무시해도 됩니다. 다만, 그들을 인간이 아닌 공동체로 바라보세요.”

마음씨 착한 아저씨가 주저한다.

“아무리 그래도······.”

“어젯밤처럼요. 어려우셨어요?”

어제 불침번 지원자가 너무 많은 나머지 무려 약식으로 면접까지 진행했었다.

덕분에 하루 몇 시간 자지 못했던 일행들도 어젯밤만큼은 푹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려, 편하긴 했지.”

“진짜 살 것 같더라고요.”

원래 피부로 직접 겪어봐야 아는 법.

초상집 분위기였던 처음과는 달리 일행들은 점점 수긍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은서가 끼어들었다.

“이만석 그 개새끼는 어쩌죠?”

이번 문제와는 별개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종양 덩어리도 하나 있었다.

바로 이만석.

배후에 그놈이 있다는 걸 안 이상 놈과 우리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었다.

“그 시벌럼은 죽여 마땅한디······.”

“밤을 노리는 건 어떨까요.”

최소 추방, 무조건 죽이는 것을 전제로 깐 살벌한 대화가 일행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다만 놈을 따르는 부하들 숫자가 많은 탓에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점점 추워지는 날씨와,

곧 다가올 혹독한 겨울.

바삐 의견을 나누던 일행들의 시선은 어느새 죽을 마저 먹는 내게 향하고 있었다.

“일단 자극하지 마세요.”

“예?”

“먼저 움직일 기미가 보일 겁니다.”

내가 뜬금없이 아침 배급을 시작한 건 놀고먹는 주민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다.

이 행위는 단순히 이만석이 쌓은 아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사전 준비일뿐.

판도가 한 차례 바뀐 이상, 점점 목이 죄이는 건 다름 아닌 이만석 본인이다.

한 걸음 기다려야 한다.

싸움이라는 건 원래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시간에 해야만 유리한 법이니까.

그나저나.

“한 그릇 더 먹을까요?”

죽 맛있네.

* * *

먹었으니 일을 한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동안 당연한 상식이 통용되지 않았던 희망 요새는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콘크리트 외벽도 수리하고, 정문 부품도 갈고, 막힌 하수구 쓰레기도 정리하고.

할아버지가 작성한 일과표만 봐도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거기! 제대로 옮기세요!”

“어, 어어! 다들 조심해!”

아침 배급을 받은 주민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요새 보수에 동원되었다.

그들은 저녁에도 똑같이 밥을 준다는 소리에 열정적으로 일에 매달렸고,

아이들은 고사리손까지 동원해가며 버려야 할 쓰레기와 물자를 부지런히 옮겼다.

이제야 무언가가 좀 돌아가는 기분이네.

수건으로 땀을 닦은 내가 공원 벤치에 앉자, 아저씨가 마실 물을 가져다주었다.

“예비 동장! 아니, 이제 동장이지.”

“그냥 동장 시키기로 한 거예요?”

“아암! 박 동장님 손주가 동장이 아니면 누가 동장을 해? 불만 있는 사람 나오라고 해! 내가 이번엔 아주 지랄해놓으려니까!”

그래, 포기하면 편해.

이젠 부정하는 것도 힘에 부친 나는 이미 동장으로 찍힌 낙인을 떨쳐내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요새도 번듯하게 재건하고 내 인생도 번듯하게 펴 볼 생각이다.

희망 요새 동장? 만약 은퇴해도 연금 통조림 정도는 받을 수 있는 직함이었다.

“동장님! 아저씨!”

저쪽에서도 이젠 그냥 동장이라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이은서가 물에 젖은 꼴로 뛰어오고 있었다.

“뭔 물맞은 생쥐 꼴이네. 비라도 맞은겨?”

“비가 뭐예요! 이젠 지하수가 나오는데!”

지하수? 설마 펌프를 고친 거야?

전력이 생긴 이후 계속 각만 보고 있었는데 이은서가 기어코 고쳐낸 모양이다.

깜짝 놀란 나와 아저씨는 방정맞게 손을 흔드는 그녀를 따라 후다닥 뛰어갔다.

“동장님!”

전기가 끊긴 뒤 방치되어 있던 수돗가엔 이미 이경태가 물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우리를 반겼고 곧 이쪽으로 맑은 물을 흘려보냈다.

펌프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지하수.

이에 얼굴에 함박웃음이 맺힌 상식 아저씨가 내 옆구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강릉 물맛 중 최고가 바로 우리 희망 요새라고. 동장이 함 판단해줘.”

매일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물을 마시느라 고생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

이런 건 절대로 절대로 사양하지 않는 나는 펌프 앞으로 다가가 손을 모았다.

양손 가득 떠진 맑고 투명한 물.

조심히 입으로 가져가 삼키니 시원한 물맛과 함께 청량함이 입맛을 돋운다.

“와, 죽이네요.”

“그치! 최고라고 했잖여!”

멸망한 세상에서 식량을 구하는 만큼이나 힘든 것이 바로 마실 수 있는 식수다.

물 한 병 때문에 살인이 벌어지는 게 흔하니 그 중요성이야 말해봐야 입 아프다.

그런데 전력만 있다면 언제든지 깨끗한 지하수를 뽑아낼 수 있는 요새라니.

나는 퐁퐁퐁 새어 나오는 지하수에서 희망 요새가 지닌 또 다른 잠재력을 엿봤다.

“이거 팔죠?”

“으잉? 갑자기?”

“예전에 주 상품이었다면서요. 이 정도 수질이면 없어서 못 팔겠는데요?”

당장 서울에 가져다 팔아도 돈 좀 있다는 양반들이 멍멍 짖으며 사 갈 것이다.

이건 과장이 아니고 전문적인 특산품으로 취할 만큼 괜찮은 물이라는 뜻이었다.

“그게 요즘 캐러밴이 도통 오지를 않아. 그나마 오는 것도 이만석이 꽉 잡고 있고.”

하지만 문제는 다른 요새로까지 운반하여 물건을 교환할 판매 루트였다.

보통 이동 캐러밴이 이 일을 도맡아 하는 데 희망 요새는 아예 정기 상인이 없다.

“그럼 우리가 가져다 팔면 되죠.”

“예? 다른 요새까지 말입니까?”

“네. 캐러밴이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못 할 건 뭡니까. 택시 차량도 하나 있겠다, 부지런히 다녀오면 될 것 같은데.”

좋은 상품이 있다는 입소문만 한 번 타면 캐러밴이 몰려오는 건 시간문제이다.

나는 또 얼타고 있는 일행들을 지나쳐 주변에 놓인 통에 물을 담기 시작했다.

“뭐합니까, 안 담고? 이거 다 돈인데.”

우리 집 마당에서 유전이 터지면 이런 기분일까? 나는 콧노래를 흥흥흥 불렀다.

그나저나 상품 이름은 뭐라고 할까.

아리수? 삼다수? 어쨌든 메이드 인 호프였다.

* * *

“사, 사장님! 제발 용서를······.”

콰직!

한참 자기 부하를 구타하던 이만석은 머리를 내려찍는 것을 끝으로 각목을 버렸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지하실 한복판에 놓인 의자로 다가가 조용히 앉았다.

“이래서 길거리 출신들은 쓰지를 않는 거야. 주면 주는 대로 처먹으니 제 주인이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하거든. 안 그런가?”

“······맞습니다, 사장님.”

단순히 주는 배급을 얻어먹었다는 이유로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사장 이만석의 심기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칙, 치익.

“내가 맛있는 음식은 참 공들여 먹는 사람이야. 그래서 이 요새 하나 가지겠다고 늙은이 뒤질 때까지 10년을 기다렸지.”

이만석은 비싼 담배를 쭈욱 빨았다.

그리고 연기를 내뱉자 그동안 숨겨놓았던 뱀 눈깔이 부하들을 훑어보았다.

“근데 이제는 늙은이 손주라는 놈이 나타나서 훼방을 놓는군. 체면이 말이 아니야. 이 이만석이가!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아직도 그 눈빛이 기억이 난다.

제 할아버지를 쏙 닮아 마치 사람 속을 훤히 들여보는 것 같은 무서운 눈.

세상 무서운 게 없었던 이만석은 그때만큼은 아무런 말 없이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늙을수록 쌓이는 아집과 자존심은 그의 속을 썩어 문드러지게 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점점 속을 긁어오는 그놈을 떠올린 이만석은 피고 있던 담배를 비벼껐다.

“요즘 물을 가져다 판다고 난리지.”

“맞습니다, 사장님.”

한참 상행을 준비 중이니 겨울이 끝나기 전, 필요한 물건을 사 올 게 분명한 상황.

여기서 기회를 놓쳤다가는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채 요새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출발하기 전날 낌새가 보일 거다. 그때 칼 잘 쓰는 녀석들로 뽑아서 전부 보내.”

절대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놈들의 거처, 택시까지 전부 표적이 되어야 했다.

때는 가장 방심하고 있을 어두운 밤.

평생을 비열하게만 살아왔던 이만석은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간혹 예외도 있는 법이다.

사각, 사각, 사각.

[‘그’는 할아버지와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이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정해진 답이 없듯, ‘그’의 방식은 효과적으로 요새를 재건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모든 일의 배후였던 사채업자 이만석은 생각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그동안 숨겨왔던 비열한 야심도, 손에 넣으려고 했던 요새도 전부 빼앗기겠다고 말이다.]

[어느 야심한 밤, 내부의 적은 방심한 틈을 노리고 있다. 제 몸은 물론 자경단의 목숨도 지켜야 하는 ‘그’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고 본격적인 투쟁은 머지않았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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