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9화>
요새 보수가 그럭저럭 완료될 때쯤 새벽 온도가 처음으로 영하로 내려갔다.
지난 첫눈 이후 들쑥날쑥하던 날씨가 드디어 코앞까지 다가온 겨울을 알린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계절, 겨울.
세상이 회색빛으로 물드는 시기가 왔다.
하지만 멸망해버린 무채색 도시 속, 희망 요새만큼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깡깡깡깡깡!
오늘 하루도 어김없이 냄비를 두드리는 시끄러운 소리로 아침을 시작한다.
이젠 누가 지시하지 않아도 주민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먹을 식사를 준비했고,
또 자연스럽게 오늘 할 일거리를 챙겨 외벽을 오르거나 내부를 돌아다녔다.
이제 소수만이 책임을 지는 불합리한 공동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이대로 겨울만 잘 버티면 희망 요새는 금방 옛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아~ 일하기 싫다.”
“아니, 동장 그게 무슨 말이여! 원래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말 몰러?”
“제가 노가 되는 건 아니고요?.”
“아이 또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하고! 와서 이거나 좀 들여다 봐봐. 어때, 괜찮어?”
상식 아저씨가 재촉하길래 뭔가 싶더니 손으로 직접 지도를 그려주었다.
내비게이션이 없는 택시를 위해 이 근방 강릉 지도를 만들어준 것이다.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참 길눈 보는 눈이 어둡구먼. 이래서 목적지까지 도착이나 할 수 있겠어.”
솔직히 지도라기보단 지나가는 동네 꼬마가 크레파스로 낙서를 해둔 것 같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식 아저씨는 지도를 짚으며 열심히 설명했다.
“여기가 우리 희망 요새. 여기가 강릉 시내, 터미널하고 도로 위치 확인해봐.”
유독 붉은색으로 칠해둔 시내는 이미 둥지를 튼 감염체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말 안 해도 위험하다는 걸 알기에 아저씨는 대충 길을 따라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여서 외곽으로 돈 다음 동쪽으로 빠지면 해안가로 가는 길이 있을겨. 거기서 길을 따라 쭉 가면 강릉항이랑 방파제가 나와.”
“해안 요새인가 보네요.”
“담수가 오염된 곳이라 먹을 식수가 무척 귀한 곳이여. 어때, 딱 좋지?”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고 시내와도 떨어져 있어 위험도도 극히 낮은 곳이다.
그런데 담수까지 귀하다고 하니 물을 가져다 비싸게 팔기 딱 좋은 요새였다.
“구매 목록만 조금 추려봤는디.”
배가 오고 가는 항구이니 필요한 물자가 없을 걱정은 안 해도 될 것이다.
나는 식량부터 시작해 온갖 부품과 무기들이 적힌 구매 목록을 챙겨 넣었다.
“올겨울은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무릎이라도 시큰거리세요?”
“작년에 강릉에서 제일 큰 요새가 쓸려나갔어. 살아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데 아마 대규모 웨이브가 아닌가 싶어.”
하긴 수만 명이 사는 대형 요새도 하룻밤 만에 지워버리는 게 바로 대규모 웨이브다.
나는 구매 목록 중 무기라고 쓰인 곳에 동그라미를 거듭 친 뒤 주머니에 챙겼다.
“동장님!”
마침 창고에서 택시를 점검하던 이은서가 104동 앞까지 차량을 끌고 주차했다.
“엔진이랑 브레이크 싹 다 손봤어요. 마침 남아 있는 부품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식수는요?”
“최대한 가득 실었어요.”
트렁크와 뒷좌석에는 물이 가득 담긴 플라스틱 통들이 출렁이는 게 보인다.
이거 브레이크 잘 밟아야겠네.
자칫하다가는 고물 택시가 뒤집힐 수도 있겠다.
나는 이은서가 건넨 자동차 키를 받고 집에서 챙겨온 가방을 차에 실었다.
“예정대로 내일 출발하죠.”
“정말 혼자서 되겠어? 경태라도 데려가.”
“그 사람 근육이 너무 무거워서 안 돼요.”
현재로선 사람 한 명 더 태울 자리에 물건 하나 더 실어 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는 일행들의 걱정을 가볍게 일축한 뒤 택시 트렁크와 좌석 문을 힘차게 닫았다.
“동장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이번에는 이경태가 헐레벌떡 우리를 향해 뛰어왔다.
요즘 24시간 이만석을 감시하는 그가 다급한 얼굴로 뛰어왔다는 건 역시.
“오늘따라 유난히 조용합니다. 특히 늘 어슬렁거리는 직원들이 보이지 않아요.”
그래, 보는 눈이 있으니 차량 정비가 끝났다는 건 이만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책이 말해준 습격 시기는 밤, 생각이 있다면 떠나는 날 일을 치를 게 분명했다.
유명한 사채업자였다길래 똑똑한 양반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말려 들어 주네.
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일행들을 보며 이번에도 정신 차려요 손뼉을 쳐주었다.
짝!
“왜 그렇게 죽상이에요? 예상한 일인데.”
“······동장은 떨리지도 않은가 봐.”
내가 모이라고 손짓하자, 일행들은 언제 긴장했냐는 듯 일사불란하게 다가왔다.
“주민들한테는 도움을 기대하지 마세요.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말고 깔끔하게. 아셨죠?”
나는 이번에 약탈자 캠프에서 노획한 재생 탄과 싸구려 파이프 권총을 넘겨줬다.
대략 인당 5~10발씩은 쏠 수 있는 분량, 이 정도면 옥상 입구를 막기는 충분하다.
“세분은 오늘 옥상 집에서 주무세요.”
“동장은?”
“택시에서 기다려야죠.”
놈들은 분명 집이 있는 104동 옥상과 유일한 도망 수단인 택시를 노릴 것이다.
그 말인즉슨 습격이 진행되는 순간에는 이만석이 있는 상가가 텅텅 빈다는 뜻.
뒤에서 작당 모의를 했으니 뒤통수를 맞는다는 게 뭔지 알려줄 생각이다.
“근데 동장은 참 촉이 좋아.”
“예?”
“처음 왔을 때도 그렇고, 혼자 아다리가 계속 척척 맞네. 정말 운이 타고난 건가?”
책이 가까운 미래를 예견해주는데 그걸 받아먹지 못하는 게 멍청한 거다.
하지만 나는 차마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었기에 눈썹을 긁적이며 대충 둘러댔다.
“여기 터가 좋아서 그래요.”
아무튼 그래.
* * *
우리는 계획한 대로 완전무장을 갖춘 채 셋은 옥상, 나는 택시로 돌아왔다.
주차는 놈들이 미끼를 물기 좋도록 조명이 없는 그늘진 곳에 해두었다.
또, 차량 창문은 안을 들여볼 수 없게 찢어진 천을 엮어 커튼을 걸어두었다.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불침번만이 남은 어두운 새벽, 요새에는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찌지직.
“- - - - - - -!!”
유리를 밟는 소리에 두 눈이 번쩍 뜨인다.
나는 곧바로 리치가 짧은 나이프를 뽑은 뒤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바스락!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미리 주변에 뿌려둔 유리 조각 너머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접근하고 있다.
빠르게 사태를 파악한 나는 곧바로 커튼 틈으로 느껴지는 기척을 확인했다.
“······정말 있는 거 맞아?”
“시발, 들어가는 걸 봤다니까.”
예상이 맞았다.
이만석이 보낸 부하 넷이 무장한 채 택시로 다가오고 있었다.
두 놈은 권총을 들고 있고, 나머지 두 놈은 딱 봐도 질 좋은 둔기랑 나이프다.
사박, 사박.
문 바로 앞까지 다가온 놈들이 커튼으로 가려둔 차 안을 살피려고 한다.
지체할 틈이 없다. 판단을 빠르게 끝낸 나는 숨을 참으며 기회를 엿보았다.
적은 넷, 나는 하나.
선공권이 내게 있다 하더라도 여차하면 총알이 날아온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조심스럽게 뒷좌석으로 이동한 나는 놈들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타이밍을 계산했다.
발걸음 소리에 집중한다.
왼쪽, 그리고 오른쪽과 정면.
하나, 둘, 셋.
지금이다.
덜컹!
쾅!
순식간에 잠금장치를 푼 나는 뒷좌석 문과 함께 차량에 붙어있던 놈을 걷어찼다.
“꺼억!”
탁!
졸지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놈을 비명과 함께 엉덩방아를 찍었다.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는 나는 떨어진 권총과 걷어찬 뒤 턱을 밟아 으깨버렸다.
“시, 시발 뭐해! 덮쳐!”
그리고 깜짝 놀라 외치는 다른 놈을 향해 한 치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후웅!
녀석이 힘껏 둔기를 휘두른다.
하지만 내가 휘두른 나이프는 이미 급소인 목을 향해 날아든 지 오래였다.
서걱!
목을 자르는 건 기대도 하지 않는다.
적당히 힘과 속도를 조절해 나이프를 휘두른 나는 그대로 목젖을 그었다.
푸슉!
날이 급소로 제대로 들어갔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피를 정면으로 맞은 나는 비틀거리는 놈을 끌어안는다.
“컥, 커억!”
바로 죽이지 않는다. 아직 살게 둔다.
버둥거리는 몸을 붙잡고 방패막이로 쓰자 바닥이 시뻘건 피로 흥건해졌다.
“상, 상철아!”
“이런 개새끼가!”
변고를 눈치챈 나머지 놈 중 하나가 내게 권총을 발사하기 위해 총구를 겨눈다.
하지만 상철이라 불리는 직원이 붙잡힌 탓에 함부로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척!
아마추어들은 이래서 안 돼.
두 눈이 붉게 충혈된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놈들을 향해 나이프를 겨눴다.
“3초 센다?”
이보다 더한 경고는 없다.
여기서 잘못 움직이면 동료가 죽는다는 것을 흘러내리는 핏물을 통해 보여주었다.
둘 중 누가 먼저 반응할까.
상철이라는 이름을 애타게 부른 동료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나머지 나이프를 든 놈은 눈동자를 움직이며 기회를 엿보았다.
시야가 닿은 곳은 내 사각지대.
동료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저놈이 가장 먼저 움직일 확률이 높았다.
“컥, 꺼억······.”
목이 그어진 놈이 위태로운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사각을 노리던 나이프가 기다렸다는 듯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타닥!
사람을 한두 번 쑤셔본 솜씨가 아니다.
순식간에 뛰쳐나온 남성은 오른쪽 옆구리를 향해 나이프를 찔러 넣었다.
푹!
하지만 잭나이프는 내 옆구리가 아닌 인질로 잡고 있던 놈의 복부에 꽂혔다.
시기 적정하게 중심을 옆으로 튼 덕분에 방패막이가 사각을 대신 막은 것이다.
나는 그대로 인질을 앞으로 밀었다.
“시, 시바아알!”
나이프 남성은 날을 뒤로 빼기도 전에 목숨이 끊긴 시체 때문에 중심을 잃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나이프를 힘껏 휘둘렀다.
푹!
나이프가 정확히 급소를 관통한다.
날의 날카로움보다는 정확하게 실린 힘과 궤적이 놈을 단번에 즉사시켰다.
이제 마지막 한 명.
나는 이번에도 즉사한 시체를 붙들어 잡은 뒤 총을 든 놈한테 접근했다.
“으아아아아 - - -!!!”
그제야 혼자 남았다는 걸 알게 된 놈은 내게 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탕! 탕! 타앙! 탕!
하지만 조명이 없는 어두운 공간에서 제대로 된 조준이 가능할 리 없다.
총알이 모조리 빗나간 것을 확인하는 나는 리볼버를 뽑아 번쩍이는 총염을 조준했다.
탕!
“끄아아아아아악 - - -!!!”
아껴두었던 마지막 38구경 총알이 놈의 허벅지를 깔끔하게 관통한다.
나는 그대로 시체를 옆으로 던지고 바닥에 쓰러지는 놈을 향해 잽싸게 뛰쳐나갔다.
콰직!
오른손을 밟아 총을 놓게 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에는 핏물이 흘러나오는 허벅지를 밟았다.
“사장 어딨어?”
“아아아아아악! 살, 살려줘! 제발!”
하긴 물어봐야 뭐하겠는가.
아마 상가에 처박혀 내 멱을 따오길 기다리겠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째 엇비슷하게 좆같은 놈들은 행동 패턴이 다 비슷하다.
콰직!
나는 옆에서 뒹구는 둔기로 머리통을 내려찍어 편히 죽을 수 있도록 도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성과 총성이 오가던 어둠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았다.
“푸우.”
턱 끝까지 차오른 숨.
흘러내린 땀을 닦자 비릿한 피 냄새가 양손 가득 묻어있다.
“이, 이게 무슨 일······.”
“동장님? 동장님 아니십니까?”
마침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불침번 두 명이 늘어진 시체를 보며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무관심하던 주민들이 이렇게 나와주다니.
감동한 나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안심하세요. 시체입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총을 재빨리 수거한 다음 곧바로 택시에 탑승했다.
드르륵! 탕탕! 탕!
타앙! 타앙! 탕!
마침 104동 옥상에서도 뭣 모르고 올라온 놈들이 납탄 세례를 받는 게 들려온다.
나는 한 치 망설임 없이 핸들을 돌려 이만석이 있는 상가로 택시를 몰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