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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11화 (11/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11화>

비몽사몽 잠에서 깨어나 옥상으로 나와보니 요새가 흰색 눈으로 덮여있었다.

새벽까지 불던 차가운 바람이 기어코 하늘에서 흰색 쓰레기를 불러온 것이다.

아, 진짜 겨울이구나.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 나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후우, 후우.”

온도는 이 정도면 영하 1도? 손에 입김을 불며 택시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간다.

걱정과는 달리 차량에는 눈을 털어낼 필요가 없는 가림막이 씌워져 있었다.

아저씨가 해주신 건가.

역시 센스가 좋으시다니까.

부르르릉! 털털털털.

엔진 소리 양호하고 타이어 상태 괜찮다.

운전석에 탑승한 나는 104동 주차장을 빠져나와 정문으로 차를 몰았다.

끼익, 덜컹!

정문 앞에는 먼저 일어난 자경단 일행들이 화톳불에서 손을 녹이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우리도 방금 일어났어. 아무리 피곤해도 동장이 나가는 길은 배웅해야지 않겠어?”

얼마나 멀리 간다고 배웅까지야.

그래도 이렇게 다들 나와서 한마디씩 거들어주니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자, 이거 받어! 싹 기름칠 해뒀어!”

어제 상가 현장을 정리했던 아저씨가 이만석이 가지고 있던 총을 건넸다.

욕심이 많은 새끼답게 거의 새거나 다름없이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다들 여유분은 있으세요?”

“혹시 몰라서 각자 하나씩은 챙겼어. 뭐,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여차하면 아끼지 말고 쏘세요. 총알이야 다른 요새에서 사 오면 그만이니까요.”

새벽에 벌어진 총격전으로 이만석이 가지고 있던 탄약 대부분이 소모되었다.

덕분에 이번 상행에는 식량과 물자보다는 무기에 집중해야 할 판이다.

“늦었네요. 이만 갈게요.”

그렇게 총과 탄알집 받은 나는 다시 운전석에 탑승해 사이드 브레이크를 밀었다.

때마침 외벽 위로 올라간 이경태가 육중한 요새 문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끼이이익!

기어를 변경하고 액셀을 밟는다.

택시는 순식간에 정문을 통과해 세상 밖으로 나갔다.

“몸조심해, 동장! 다들 기다리고 있응께!”

사이드미러를 힐끗 보자 양팔을 흔드는 아저씨 뒤로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엥, 다들 언제 뒤따라왔대?

나는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들어주며 첫날 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갔다.

* * *

사실 희망 요새와 강릉항까지 거리는 직선 경로상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워낙 도로 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빙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고,

내 의도와는 달리 감염체가 득실거리는 강릉 시내 부근을 돌아야 할 때도 있다.

조심스럽게 도로 장애물을 피한 나는 한 버려진 셀프 주유소에 차량을 세웠다.

끼익!

택시 기사가 가지고 있던 망원경을 꺼내 저 멀리 보이는 강릉 시내를 살펴보았다.

저기가 남대천, 그 위로 제일 큰 시내와 반쯤 붕괴한 대형 마트도 시야에 들어온다.

물론 수만 마리는 거뜬하게 넘어 보이는 감염체는 말하지 않아도 자동 옵션이다.

“바글바글하네.”

날씨가 추워지고 흐려지는 겨울이 옴에 따라 감염체들의 움직임은 활발해진다.

특히 뭉치는 습성이 있는 무리는 인간이 모인 요새를 간혹 습격하고는 하는데,

이를 일찍이 말했던 무리 습격, 생존자들은 보통 감염체 웨이브라고 불렀다.

그런데 강릉은 특이하게도 요새가 몇 개 없는 것에 비해 감염체가 너무나 많았다.

저 정도 규모를 막으려면 적어도 기관총 몇 정이나 박격포 정도는 있어야 하겠네.

이거 물장사로 될까?

작게 혀를 찬 나는 망원경을 다시 집어넣은 뒤 차량 트렁크 위 가림막을 치웠다.

“읍읍!”

“으으읍!”

그곳에는 밤사이 묶여 있던 이만석 똘마니 둘이 시끄럽게 벌레처럼 몸을 꼬고 있었다.

거기서 죽었으면 얼마나 좋아.

나는 살려달라고 비는 그 두 놈을 바닥으로 내린 뒤 주유소로 질질 끌고 갔다.

“살, 살려주세요! 동장님 제발!”

“저흰 시키는 대로만 했습니다!”

입마개를 풀어주자 역시나 똑같은 레퍼토리로 변명이 후두두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놈들을 주유소에 묶었다.

“시키는 대로 안 했으면 좋았잖아요?”

저능아도 아니고 본인들이 했던 행위가 나쁜 짓이었다는 걸 왜 모르나.

변명을 해도 참 좆같이 한다는 생각에 나이프를 뽑아 허벅지 칼침을 놔주었다.

“끄아아아악!”

그리고 놈들 옷에 피를 닦은 뒤 유유자적 택시로 돌아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빠앙! 빠앙!

평소에는 못 눌러보는 클락션을 열심히 눌러주자 깜짝 놀란 놈들이 발작한다.

“무, 무슨 짓이야! 그만해 미친놈아!”

“으아아아아! 온다! 놈들이 온다고!”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소리를 듣고 반응한 감염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주유소에서 천천히 벗어났다.

“으아아아아! 이 시발 새끼야!”

뭐 나라고 고문하는 악취미가 있어서 주유소에 사람 둘을 묶어두는 게 아니다.

이왕 본인들이 피해를 준 거, 공동체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기회를 준 것이다.

끼이이이에엑 - - -!!

캬아악! 끼이아악!

수많은 감염체 무리가 주유소로 들이닥쳐 피를 철철 흘리는 먹이를 씹는다.

나는 덕분에 텅 비워진 도로를 가로질러 강릉항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 * *

[곧 겨울이 다가오고 있죠? 청취자분들이 사시는 요새는 월동 준비가 잘 끝나셨는지 모르겠네요. 저희는 지난 방송 이후 약탈자들이 들이닥쳐 상당수 물자를 잃고 말았습니다. 아~ 앞으로 겨울이 막막하네요.]

[아마 다음 눈이 내릴 때쯤이면 저희 강릉 FM도 마지막 방송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신 청취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눈이 내리는 날 어울리는 재즈 한 곡 듣고 가시겠습니다.]

달칵, 끼이익.

참 듣는 사람이 우울해지는 해적 라디오를 끄고 조용히 차량 속도를 줄였다.

어느덧 어둑해진 아래에는 오랜만에 보는 바다와 한 요새가 어우러져 있었다.

‘강릉항’

희망 요새보다 두 배는 높은 외벽과 차량을 겨누고 있는 중기관총이 보인다.

외관에서부터 느껴지는 격세지감에 나는 경비들이 지시한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요새 입구에는 이미 나와 같이 상행을 나온 캐러밴 차량으로 가득 차 있었다.

통통!

보닛을 두드리는 소리에 창문을 내리자 한 자경단원이 다가와 대뜸 물었다.

“어디서 온 누구요?”

“희망 요새에서 온 캐러밴입니다. 괜찮은 상품이 있어서 조금 가져다 팔려고요.”

“희망 요새? 거기 아직도 사람이 있어?”

그동안 수많은 캐러밴을 검문했을 자경단원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동료를 불렀다.

“이봐! 희망 요새에서 왔다는데?”

“뭐? 거기 동장 죽고 망한 곳 아니었어?”

워낙 캐러밴으로 속여 말하는 약탈자들이 많다 보니 요새에서도 주의하는 모양이다.

차량을 검문하던 자경단원은 의심스럽다는 얼굴로 차량과 실린 짐을 살펴보았다.

“물 유명하시던 곳 모르세요? 요즘 다시 살아나고 있으니까, 잘 좀 봐주세요.”

나는 미리 담아둔 깨끗한 물 한 통과 총알 한 발을 꺼내 공손하게 내밀었다.

그러자 인상이 험악하던 자경단원은 표정 관리를 못 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총알 말고 물로 주면 안 됩니까?”

물이 귀하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였어?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총알을 다시 회수한 뒤 이번에는 물통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동료분하고 같이 드세요.”

좋다고 코가 벌름벌름 움직인다.

그는 뇌물로 받은 물통을 잽싸게 숨긴 뒤 자연스럽게 요새 문을 열어주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사장님!”

겨우 물 몇 통으로 사장님 소리를 듣나.

나는 그들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강릉항 요새 안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비릿한 바다 냄새와 엄청난 규모의 번화가였다.

몇 년 전만 해도 강릉에서 제일 큰 요새가 희망 요새였다면서요, 아저씨.

이제 보니까 완전 허풍쟁이셨네.

“캐러밴 차량은 이쪽입니다!”

한참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관리자로 보이는 여성을 따라 한쪽에 택시를 주차했다.

“오후 5시부터 야간 할증 붙어서 판매하시는 물품 5% 요새로 납부하시면 됩니다.”

“거래 수수료는 없습니까?”

“그건 품목마다 다르죠? 아마 아저씨는 정도 시면 10~8% 정도 내실 거에요.”

이거 완전 총 없는 강도잖아.

역시 돈을 벌려면 자리 잡고 하는 배짱 장사가 최고다.

“경매는 당연히 안 되고.”

“그건 공인된 캐러밴들만 가능합니다.”

나는 예의가 바른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무시하는 여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물건 내리는 것도 수수료를 받을 기세길래 내가 하차하기로 했다.

“······저기요?”

그런데 갑자기 물건을 확인한 여성이 갑자기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설마 휘발유나 바닷물 아니죠?”

“식수인데요.”

여기 통에 담겨 있는 물 전부 지금 당장 마셔도 되는 맛 좋고 깨끗한 식수다.

“제, 제가 확인 좀 해봐도 될까요?”

“싫은데요.”

나물 늘어놓고 장사하는데 사지도 않을 사람이 콕콕 집어대면 기분이 나쁜 법이다.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사무적이던 여성이 한순간 태도를 바꾸며 굽신거렸다.

“부탁드립니다, 사장님! 상품만 확인하게 해주시면 서류는 제가 다 써드릴게요!”

아까 물을 받아 간 자경단도 그렇고 이 여자도 그렇고 식수라는 말에 반응이 다르다.

귀한 편이긴 해도 이렇게 호들갑 떨 정도는 아니지 않나? 나는 물 한 컵을 따라줬다.

꼴깍.

마른 입술을 재차 핥은 그녀는 마치 감로수를 삼키듯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정, 정말 물이네요. 심지어 맛있어요.”

이게 그냥 물인 것 같아도 아저씨랑 남매가 정성을 다해 뽑은 메이드 인 호프다.

물이 맛있다는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알았으면 이제 가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또 이 여성이 질척거린다.

“사장님! 이거 파시려고 오신 거면 무조건 경매 맡기셔야 합니다. 괜한 캐러밴 잡고 흥정해봤자 제대로 된 값 못 받아요!”

“갑자기 말이 다르시네.”

“아까는 제가 조금 불친절했죠? 이 정도 되시는 분인지도 모르고 주제넘었습니다! 경매? 되죠! 당연히 되죠! 제가 모실게요!”

사람이라면 이쯤 눈치채야 한다.

내가 가져온 상품이 어떤 값어치를 하는지 말이다.

“2%.”

“네?”

“수수료 2%.”

10~8%는 거래 수수료를 2%로 후렸다.

이 정도 수치면 서울에서도 극히, 아주 극히 소수만이 해주는 낮은 퍼센트다.

“2%는 조금······.”

“앞으로도 계속 거래할게요.”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사장님!”

하지만 앞으로도 있을 거래를 계속 맡긴다는 말에 여성은 냅다 고개부터 숙였다.

나중에 가서 수소문해보니 유일한 식수 공급처인 남대천 상류에 감염체 둥지가 생겨 강릉 식수원 대부분이 오염되었다고 한다.

남은 방법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일일이 녹여 정수 과정을 거치는 것뿐인데,

그런 와중에 깨끗한 지하수가 다량으로 나오는 요새가 있다고 하니 식수가 급한 이들은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표적이 될지도 모르겠네.’

짧게 생각하면 기회일 것이고,

길게 생각하면 위기일 것이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무기를 구해 희망 요새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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