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12화>
본인을 ‘강혜지’라고 소개한 여성은 강릉항 상가번영회 소속된 직원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내게 냄새나고 더러운 여관이 아닌 제법 괜찮은 숙소를 시켜줬다.
덕분에 반나절이 넘던 주행으로 지쳐있던 나는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나 만덕 상회 주인이요.’
‘제발 물 한 통만 팔아주십시오!’
희망 요새 캐러밴이라는 곳이 좋은 물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밤사이 쫙 퍼졌다.
당연히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은 거의 10분 간격으로 숙소를 찾아왔고,
누구는 권위를, 누구는 애걸복걸해가며 물 한 통이라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미 계약까지 체결한 상황에서 굳이 그들과 거래를 틀 이유는 없었다.
내가 신의는 없는 인간이라도 적어도 약속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전부 내쫓은 나는 오전 일찍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강릉항 부두에는 녹색 점퍼를 입은 강혜지가 불안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사, 사장님!”
“왜 그렇게 놀랍니까? 귀신 본 사람처럼.”
“안 나오실 줄 알고······.”
얼굴도 퀭하고 머리도 부스스한 걸 보아 밤새 잠이라도 설친 게 눈에 보인다.
“이런 거래는 중간에 가로채려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이번에도 당하면 이 일 접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히 나와주셔서.”
“저를 뭐로 보신 겁니까.”
“그럼요! 사장님이시라면 당연히 약속 지키실 줄 알았죠! 제가 관상을 조금 보는데 딱 봐도 신의가 있으신 영웅상을······!”
시끄럽다 시끄러워.
주변에 TMI 캐릭터는 상식이 아저씨면 충분하다.
나는 옆에서 쫑알쫑알 수다를 떠는 강혜지를 무시하며 부두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오전 10시면 열리는 경매로 시끄러운 인파가 몰려 있었다.
“몇 번이에요?”
“189번 받았습니다! 품목 중 유일하게 담수라서 경매사가 한 번 언급해줄 거예요!”
정말 온갖 국적을 가진 배들이 몰려드는 만큼 부두에는 물건이 한가득하다.
하지만 그중 189번을 받았다는 것은 나름대로 신경 좀 썼다는 것을 의미했다.
“30!”
“삼일 상회, 30, 30.”
“35!”
“자, 35! 35! 다음 없습니까?”
품목이 다양하고 많은 경매인 만큼 손가락 한 번, 말 한 번으로 순식간에 낙찰된다.
그날 잡은 생선부터 시작해서 러시아제 밀수 무기까지 정말 없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경매가 시작된 지 약 1시간가량이 지나자 경매사가 급하게 손을 들었다.
“다음 189번!”
그 순간 시끌벅적하던 부두 경매장이 한순간 189번이라는 소리에 반응했다.
여러 물건이 팔려나간 부두 앞에는 내가 가져온 식수가 가득 쌓여 있었다.
“100!”
“110!”
“120!”
시작가 100, 흥분한 상인들은 10단위로 경매가를 올리며 손을 번쩍 들었다.
이에 경매사는 정신없이 눈동자를 움직이며 빠르게 올라가는 숫자를 확인했다.
“150!”
“180!”
경매가가 순식간에 180을 치솟자 어중간한 캐러밴들은 알아서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가지고 있는 총알 개수가 넉넉한 이름 값하는 캐러밴뿐이었다.
“200!”
아무리 물이 귀해도 평소 가격이 50인 것을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는 입찰가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은 한 일본인 남성이 인파 사이를 헤치고 나오며 외쳤다.
“250!”
끝났다.
250이라는 말에 끝까지 경쟁이 붙었던 캐러밴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총알 많네, 저 양반.
내가 일본인 남성 쪽을 쳐다보다 강혜지가 조용히 속삭였다.
“방금 낙찰해 간 저 남자가 저기 요시다 호 선장이에요. 진짜 악질 쪽바리로 유명한데, 식수 때문에 출항을 못 하고 있었거든요.”
하긴 육지도 물을 못 구하고 있는 마당에 바다 위 선박들은 오죽하겠는가.
악질 쪽바리나, 여기 이 사람들이나 물 없으면 3일도 버티지 못하는 건 다 똑같다.
“현물로 받아올까요? 아니면 어음?”
“어음으로요”
예상가를 월등히 뛰어넘는 250을 벌었으니 적어도 구색은 갖출 수 있겠지.
원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돈 쓰는 거라고,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나는 강혜지가 가져온 어음을 받아 챙긴 뒤 그대로 강릉항 시장을 향해 걸어갔다.
“사장님! 혹시 물건 사시게요?”
그런데 이제 용건이 모두 끝난 줄 알았던 그녀가 내 옆을 쭐레쭐레 따라왔다.
“왜 따라와요?”
“바가지 쓰이실까 봐 그렇죠. 아시잖아요? 딱 봐도 외지인이면 가격부터 후리는 거. 제가 괜찮은 가게 하나 안내해드릴게요.”
하긴 강릉항에 처음 방문하는 외지인보다는 번영회 직원인 그녀가 더 잘 알 것이다.
억척스러운 흥정에는 영 자신이 없었던 나는 이번에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손님 데려오고 비율 받는 거 아니죠?”
“······네.”
대답이 한 박자 늦다.
이것 봐, 역시 사람은 믿으면 안 된다니까.
* * *
“정말 좋은 가게 맞습니까?”
“겉모습으로만 판단하시면 안 돼요.”
강혜지가 나를 안내한 곳은 강릉항 제일 외진 곳에 있는 한 허름한 총포상이었다.
일단 보고 판단하라고 재차 설득한 그녀는 나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할머니 안에 계세요?”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나를 반긴 익숙한 기름 냄새들은 의심을 지우기 충분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총기를 손질했는지 매대 위에 올라온 부품과 윤활유 통.
진열되어있는 총기들은 하나같이 중후한 명품 시계처럼 장인의 손길이 담겨 있었다.
여기, 제대로 된 총포상 맞다.
“죄송해요. 원래 항상 계시는데······.”
“괜찮습니다.”
나는 당황하는 강지혜를 향해 손을 휘적인 뒤 무언가에 홀린 듯 진열대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이 총포상을 상징하는 것 같은 M2A1 브라우닝 중기관총이 놓여 있었다.
‘미치겠네.’
죽인다. 진짜, 죽인다.
서울 요새에서도 찾기 힘든 품질이 이런 변두리에 있다.
직접 개조까지 한 걸까?
이 정도면 감염체가 한 무더기씩 몰려와도 모조리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나는 쫙 뻗어있는 총열과 손에 착 감기는 노리쇠를 보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젊은 양반이 보는 눈이 있네.”
그 순간 가게 창고 안쪽에서 가죽 안대를 쓴 노파가 휠체어를 끌며 다가왔다.
“어디서 구한 물건입니까?”
“5년 전 삼척에서 이 녀석하고 함께 왔지.”
보통 진열장 바로 앞에 두는 총은 총포상을 상징하는 위세이자 마스코트다.
그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중기관총은 정말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가격은?”
“4500. 그 이하는 안 팔아.”
본체 가격만 4500, 거기다 동봉되는 탄까지 사려면 6000은 훌쩍 넘을 것이다.
이제 막 250을 벌고 희희낙락 좋아한 게 10분 전인데 갑자기 싸하게 식어버린다.
깔끔하게 포기했다.
나는 현실과 빠르게 타협하며 노파를 향해 물어보았다.
“중고가로 들어온 구제 총들 없습니까?”
“종류는?”
“탄 소모가 적은 거면 다 됩니다.”
가뜩이나 부족한 탄약 탓에 군 시절처럼 총알을 흩뿌리는 짓은 할 수 없다.
한 발 한 발 저지력이 좋고 신뢰성이 높은 반자동 총이 지금으로선 제격이다.
마침 좋은 물건이 하나 들어왔지. 휠체어를 끈 노파는 익숙한 총 하나를 내밀었다.
“M1 카빈. 써봤지?”
그래, 감염체 사태 당시 있는 총 없는 총 다 끌어모은 것 중에 이런 것도 있었다.
나는 깨끗하게 손질된 M1 카빈을 살핀 뒤, 곧바로 오늘 받은 어음을 올려뒀다.
“현명한 선택이야.”
그 자리에서 카빈 3자루와 총알을 전부 교환하는 것으로 오늘 번 모든 걸 털었다.
하지만 확실한 거래처와 물건을 찾은 것만으로도 이번 상행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거 팔지 마세요.”
“끌끌, 기운이 넘치네.”
나는 떠나기 전 마음을 홀라당 뺏겨버린 중기관총을 가리키며 엄포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물 팔아서 총을 사는 기적을 한 번 보여줄 테니까.
어쨌거나 일정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 * *
‘오후 1시.’
대충 점심을 때우고 구매한 총기를 싣고 다닌 벌써 정각이 한참 지나 있었다.
이쯤 되면 출발해도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택시를 운전해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사장님!”
그러자 잠시 상가에 다녀왔던 강혜지가 한 종이 포장지를 창문 틈으로 내밀었다.
“이건 가시면서 드세요! 다음에 오셔도 저 잊지 마시고 꼭 맡겨주셔야 해요!”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시장에서 파는 건어물을 구워서 가져온 모양이다.
첫인상이 영 꽝이어서 그렇지 이런 세상을 사는 사람치고는 괜찮은 여자다.
“잘 먹을게요.”
“헤헤, 감사합니다!”
그녀와 짧게 인사한 나는 그대로 차를 몰아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행렬을 뒤따랐다.
그러자 곧 요새 정문이 열리며 거래를 끝낸 캐러밴 차량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르르릉 - - -!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흩어지고.
꼭 피가 도는 심장을 보는 것 같다.
알게 모르게 계속 희망 요새를 떠올렸었던 나는 한동안 바다를 바라보다 곧 출발했다.
‘첫 시작이 좋았어.’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해보는 상행치고는 많은 운이 따라줬다.
이 정도 탄력이면 온도가 본격적으로 더 떨어지기 전 몇 번 더 왕복할 수 있었다.
나는 강혜지가 건네준 종이 포장지에서 건어물 하나를 찢어 입에 물었다.
우물우물.
코끝으로 퍼지는 바다 내음과 함께 택시는 한적한 시골 도로를 가로지르려 했다.
파스스스스스스스!
“?”
그런데 그 순간 저 멀리 보이는 소나무 숲에서 새들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그 장면을 유심히 지켜본 나는 그 변화가 저 멀리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확인했다.
새가 날아오른다?
그것도 동시다발적으로?
순간 불길함을 느낀 나는 천천히 속도를 줄인 뒤 재빨리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숲이 흔들린다.’
외부적인 환경 변화가 더욱 노골적으로 보인다.
분명 저 멀리 숲의 나무들은 좌우로 혹은 앞뒤로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심코 망원경을 아래로 내려보니.
끼에에에에에엑 - - - - -!!!!!!
끼기기긱! 끼이익!
수천 마리 감염체가 몰려오고 있었다.
끼익!
나는 곧바로 핸들을 돌려 지나쳐왔던 도로를 다시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예고 없는 대규모 웨이브라고?
살려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지역을 빠져나갈 수 있는 다른 길은 해안 도로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택시를 급히 몰아 교차로로 빠져나갔다.
쾅!
끼에에에에에엑!!
덜컹!
그런데 갑자기 도로 바로 옆에서 튀어나온 검은색 물체가 달려가던 택시를 덮친다.
고개를 황급히 돌려보니 입이 찢어진 감염체 하나가 조수석에 매달려 있었다.
쨍그랑!
끼기기기긱!
나는 재빨리 권총을 뽑아 창문을 깨고 들어오려고 하는 놈의 대가리를 쐈다.
탕! 타앙! 탕!
두 발은 가슴팍, 한 발은 기어코 머리를 맞추자 검은 피를 뿌리며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이미 도로 옆에는 열댓 마리 감염체가 맹렬하게 택시를 추격하고 있었다.
끼아아아아아악 - - - -!!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저 멀리 일렁이는 검은색 파도가 보인다.
앞서 도망쳤던 숲보다 배는 많은 웨이브가 해안 도로에서 쏟아져 오고 있었다.
탕탕탕! 탕탕!
침착해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거다.
나는 집요하게 따라붙는 감염체를 향해 납탄을 한 발씩 먹여주며 핸들을 꺾었다.
부우우우웅, 끼이이익!
쾅!
달려드는 감염체 두 마리를 치면서 방향을 바꾼 나는 해안과 반대편으로 달렸다.
애초에 이놈들 목표가 따로 있었다.
바로 저 멀리 보이는 강릉항, 평화로운 오후를 만끽하고 있는 생존자들의 요새였다.
빠아아아앙! 빠아앙!
길이 전부 막힌 나는 어쩔 수 없이 클락션을 울리며 나가려는 차량을 돌려세웠다.
대규모 웨이브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