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6화 (16/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16화>

[안녕하세요~ 강릉 FM 오후 정규 방송입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었죠? 어제만 해도 감염체 웨이브로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청취자분들은 괜찮으신가요?]

[저희도 지난 방송에서 가슴 아픈 소식 하나를 전해 드린 기억이 있는데, 짜잔! 어느 인심 좋으신 청취자분들께서 방송국으로 많은 물자를 후원해주셨지 뭐예요.]

[덕분에 오늘까지로 예정되었던 방송을 여러분들과 쭉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 시끄럽고 노래나 틀라고요? 후후. 자 그럼 점점 추워지는 겨울과 어울리는 잔잔한 크리스마스 캐럴 한 곡 올려드립니다.]

근방에서 들을 수 있는 해적 라디오가 이거 하나뿐이라 아쉬웠는데 다행이다.

어떤 인심 좋은 생존자가 했는지는 몰라도 나중에 물이나 넉넉히 보태줘야겠다.

나는 그렇게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흥얼거리며 도로를 달렸다.

털털털털.

그런데 갑자기 한참을 잘 달리던 택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을 멈췄다.

계기판을 바라보니 엔진 쪽에 이상이 있다는 듯 붉은 등이 하나 들어온다.

나는 일단 급하게 핸들을 꺾어 최대한 인적이 드문 길옆에 차를 주차했다.

“어휴, 시발.”

도착하려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네가 여기서 뻗어버리면 어쩌라는 거니.

나는 타이어를 발로 툭툭 차며 검은색 연기가 새어 나오는 차량 보닛을 열었다.

콜록콜록!

그러자 매캐한 연기가 얼굴을 덮치며 딱 봐봐도 맛이 간 엔진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뭘 알아야 만져보지. 정비도 이은서가 해줘서 어디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난감함을 느낀 나는 일단 걸어서라도 가야 하나 근방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사박.

“- - - - - - -!!”

그런데 그 순간 멀지 않은 풀숲에서 이쪽으로 접근하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철컥!

깜짝 놀란 나는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 때아닌 불청객들을 향해 겨눴다.

그곳에는 잔뜩 움츠러든 남성과 아내로 보이는 여성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노,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무기도 없고 복장도 비루하다.

한참 먼 길을 걸어왔는지 매고 있는 짐만 한가득 한 것이 딱 봐도 이주민이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이 없었던 나는 슬그머니 길을 비켜주었다.

“지나가세요.”

그러자 잔뜩 겁에 질린 그들은 혹시 총을 쏘기라도 할까 재빨리 지나간다.

길을 비켜준 나는 뽑았던 권총을 다시 집어넣은 뒤 보닛 위에 손을 올렸다.

하, 그나저나 대책이 없다.

일단 차를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 놓고 희망 요새에서 이은서를 데려와야겠다.

“저기.”

그런데 갑자기 가족과 함께 걷던 남성이 가던 길을 멈추며 내게 물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차 좀 보실 줄 아십니까?”

“이쪽 일을 하고 있습니다.”

손가락 굳은살, 손톱 아래 언뜻 보이는 기름때.

어째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 번 맡겨보기나 하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성은 만류하는 아내를 안심시킨 뒤 차량으로 다가왔다.

달칵, 달칵.

그리고는 엔진 한쪽을 한동안 살피며 무언가를 조이고 연결하기를 반복했다.

이쪽 분야는 아주 곁다리만 알고 있는 내가 보아도 무척 능숙한 손동작이었다.

“시동 한 번 걸어보시죠.”

부르르릉!

방금까지만 해도 골골거리던 엔진이 간단한 정비 몇 번으로 시동이 걸린다.

이에 감탄한 나는 뒷좌석에 꼬불쳐둔 생수 두 통을 꺼내 남성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이, 이런 걸 바라고 한 건 아닙니다.”

“받으세요. 목마르신 것 같은데.”

거리에서 만나는 모든 생존자는 강도거나, 혹은 강도로 변할 수 있는 자들이다.

하지만 정말 간혹가다 이렇게 순수하게 남을 돕는 생존자와 마주치기도 한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는 남성을 향해 물어보았다.

“타지에서 오셨나 봐요.”

“아, 예. 원래는 본가가 양양입니다. 요새가 무너지는 바람에 강릉으로 피난 왔습니다.”

“정착할 곳은 정하셨고요?”

“제가 몸담은 곳이 있어서요. 그분들이 소개해준 요새로 가 볼 생각입니다.”

아, 아깝다. 이 정도면 기술자라면 우리 요새로 초빙해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나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 이웃이네요. 혹시 소속되신 곳이?”

“KLF 라는 곳입니다.”

KLF? 들어본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새로 생긴 요새인가?

내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갑자기 남성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혹시 관심 있으십니까?”

“예?”

“방금 말한 KLF 말입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언제든지 소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저희랑 같이······.”

순간 순박하기 그지없던 남성의 눈빛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형태로 변했다.

광기? 절제? 욕망과 일그러짐이다.

반대로 남편 뒤쪽에 서 있는 아내는 초점 없는 눈을 바닥에 내리깔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언성을 낮추며 확실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

그러자 조여오던 무언가가 탁 풀린다.

어느새 본모습으로 돌아온 남성은 다시 순박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남성이 순순히 물러난다.

나는 권총을 뽑을 뻔한 손을 슬그머니 핸들 위에 얹으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들어가세요.”

“예, 예!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리고 다음에 또 보자는 형식적인 작별 인사를 남긴 뒤,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를 보니 남성이 손을 흔든다.

KLF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던 저 남자의 눈동자가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 * *

길이 뚫린 곳을 찾아 한참을 우회한 끝에 해가 좀 어둑해질 때쯤 도착했다.

나는 이제는 집처럼 느껴지는 희망 요새 앞에 차를 멈추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동장님!”

그러자 마침 외벽에서 경계 중이던 이은서가 환한 얼굴로 손을 마주 흔들어줬다.

끼이이익, 덜컹!

내가 떠날 때 한참 보수를 시작하던 희망 요새는 정말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특히 깔끔하게 치워진 광장과 거주지역, 그리고 아파트 옥상마다 설치된 서치라이트는 감시탑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다.

이제 좀 제대로 된 요새 같네.

나는 점점 옛 모습을 찾아가는 할아버지의 유산을 보며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동장!”

내가 차에서 내리자 상식 아저씨와 남매가 기다렸다는 듯 헐레벌떡 뛰어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틀이 지나도 안 와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어?”

“어쩌다 보니 늦었네요. 별일 없죠?”

“감염체들이 몇 번 오기는 했습니다만, 두 번 다 별 무리 없이 쫓아냈습니다.”

약탈자 셋도 감당하지 못했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감염체쯤은 가뿐한 모양이다.

이에 또 한 번 흐뭇하게 웃은 나는 차량 트렁크와 뒷좌석을 자랑스럽게 열었다.

“선물이 있어요.”

그리고 중기관총을 꺼내 보란 듯이 전시하고 상자 위로 갖가지 총을 꺼내두었다.

“이, 이게 다 뭐시여?”

“어디 군부대라도 터셨습니까?”

엽총이나 몇 정 가지고 올 줄 알았던 일행들은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M2A1 브라우닝 중기관총부터 시작해, M1 카빈 10정, 중국 복제판 AKM 2정, 갖가지 권총과 성능을 입증한 산탄총까지.

목숨을 한 번 건 대가로 귀한 총과 탄약을 아주 상자째로 야무지게 털어왔다.

“어때요. 기가 막히죠?”

“당, 당연하지. 장난 아니구먼, 동장!”

상식 아저씨와 남매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총을 한정씩 쥐고 만져보았다.

작살총이나 쓰던 게 엊그제 같은데 가득 쌓인 총을 보니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다.

“총은 각자 마음에 드시는 걸로 하나씩 휴대하시고, 중기관총은 외벽하고 가장 가까운 아파트 옥상에 거치해두세요.”

“불침번 인원한테도 보급할까요?”

“아뇨. 아직은 일러요.”

아직 주민 간 신뢰와는 별개로 훈련되지 않는 총기 휴대는 언제나 사고를 유발한다.

차라리 자경단원을 점차 늘려가면서 전문적인 전투 인력을 갖추는 게 최선이었다.

“자경단 인원부터 늘려야겠습니다.”

“여기서 더?”

“3명 가지고는 턱도 없어요. 혹시 예전에 활동하셨던 분들은 전부 사망하셨습니까?”

처음에는 10명이 넘게 시작한 요새 자경단은 지금 3명으로 줄었다고 알고 있다.

꽤 복잡한 사정인 것 같아 묻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배려할 때가 아니었다.

“넷은 총 맞아 죽었고 하나는 자살했어. 아마 나머지 둘은 살아는 있을거여.”

다섯이나 사망하고 둘은 떠났구나.

상식이 아저씨가 주민들과 싸울만하다.

나는 얼굴이 어두워진 일행들을 일단 자리에 앉힌 뒤 진지한 대화를 이어갔다.

“아직 강릉에 있긴 하나 보네요.”

이경태가 답했다.

“제 대학 동기입니다. 이만석과 한 번 싸운 다음 날 바로 이주했어요. 아마 폴리텍대 요새에서 경비대로 일하고 있을 겁니다.”

이만석 시발 또 너구나. 편하게 죽여준 게 지금 와서 후회될 줄은 몰랐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돌아올 가능성은요?”

“어릴 때부터 희망 아파트에 살던 친구들이라, 이만석이 죽은 걸 알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원흉인 이만석이 죽었으니 이쪽으로 다시 포섭할 가능성이 있어서 다행이다.

엄청난 크기의 강릉항 요새를 떠올린 나는 쪼그려 앉은 일행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제 좀 살만하시다고 늘어지면 곤란합니다. 겨울부터가 진짜 고비예요. 아시죠?”

포부 가득한 말에 상식 아저씨와 남매는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재빨리 답했다.

“나는 우리 동장만 믿어.”

“갑자기 파이팅 넘치시네요.”

콘크리트 요새는 아무리 크고 단단해봤자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유산은 희망 요새가 아니라 여기 이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봅시다.”

내가 가볍게 주먹을 내밀자 일행들은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톡톡 마주 대었다.

* * *

“아, 죽겠다.”

긴 출장을 끝내고 돌아오면 이런 기분일까?

저녁까지 땀 흘리며 총기를 옮긴 나는 밤이 되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따뜻한 물로 씻은 다음 곧바로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마무리 단계가 남아있었다.

꿀꺽.

이때만 되면 좀 떨린다.

땀으로 젖은 머리를 단정하게 한 나는 책이 놓여 있는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오랜만이다?”

펄럭.

책 페이지에는 역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집필된 이야기가 가득 쓰여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뺑이 차는 사이 열심히도 소설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많이도 써놨네.’

여기까지는 아는 내용이고,

여기도 별다른 게 없는 사실이다.

음, 이렇게 전지적 시점으로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새삼 고생했다는 게 느껴지네.

한동안 글을 몰두해서 읽던 나는 드디어 마지막 에필로그 페이지에 도달했다.

[‘그’는 이번 여정을 통해 많은 이를 돕고 많은 선행으로 베풀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베푼 선행이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는 이것이 원동력이라는 걸 깨달았다. 폭력과 질서, 광기와 신앙이 아닌 요새를 재건하는 중요한 열쇠 말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변화하고 있었다.]

시발, 마음은 읽지 말란 말이야.

나는 낯이 뜨거운 나머지 주석을 통째로 넘겼다.

그러자 책은 어느덧 미래를 엿보는 마지막 문단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야만의 시대였다. 곧 들이닥칠 혹독한 추위는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 것이며 종양처럼 자란 불청객으로 하여금 요새 문을 두드리게 할 것이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황급히 마지막 줄을 읽었다.

[외부의 세력이 평화로운 강릉을 넘보고 있다. 모든 요새 지도자가 겨울만을 대비하고 있는 지금 ‘그’는 생존자들과 뜻을 모으고 이를 대비할 결속을 준비해야 한다.]

[다음 화에 계속.]

살기 좋은 곳······만들 수 있나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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