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17화>
나는 모든 판단은 경험을 근거로 한다.
여태 내가 지켜봐 온 ‘책’은 절대 내용을 틀리게 쓰거나 미래를 왜곡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책만이 알고 있는 미지의 사건이 현재 진행 중이라면.
과연 그 문장이 말하던 외부의 적은 어디서 온, 또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군벌? 약탈자?
그 어떠한 정보도 없는 지금으로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그렇게 한참 상념에 빠져 있는데 화톳불을 뒤적이던 상식 아저씨가 말을 걸어왔다.
“이것저것 고민할 게 많아서요. 요즘 밖에서 뭐 들려오는 소문 같은 거 없죠?”
“왕래가 있어야 소문도 듣지. 겨울만 되면 다들 밖으로 안 나오려고 하잖여.”
하긴 오늘 아침만 해도 영하 10도를 가볍게 돌파하는 혹독한 추위가 찾아왔다.
이제 막 초겨울인데 이 정도면 앞으로는 얼마나 더 추워질지가 걱정이었다.
“자, 먹자고.”
그사이 한참 정성스레 무언가를 끓이던 아저씨가 양은 냄비를 들고 다가왔다.
메뉴는 온갖 통조림을 때려 박은 잡탕찌개.
익숙한 듯 둘러앉아 수저를 부지런히 움직이니 허하던 속도 따뜻하게 데워졌다.
물론 잠시 여유를 가져도 될 식사 시간에도 우리는 요새 운영을 위해 바삐 떠들었다.
“그나저나 요즘 배터리 잔량이 아슬아슬해. 다들 아껴서 쓰고 있기는 한디······.”
“어디 고장 났어요?”
“날씨가 계속 흐리잖아. 평소라면 100% 완충해서 쓰는데 이젠 50%도 고작이야.”
태양만 있으면 쓸 수 있다는 장점은 반대로 태양이 없으면 먹통이라는 단점이 있다.
확실히 요즘 눈이 오는 날이 많아진 것을 생각하면 미리 대비라도 해둬야 한다.
“일단 펌프 쪽 열선이랑 외벽 서치라이트만 유지하시고 나머지는 전부 꺼버리세요.”
“난방은 어쩌구?”
“기름부터 구해보고 아니면 뒷산에서 장작으로 쓸 목탄이라고 베어와야죠.”
박강수가 언제 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결국 외부 활동은 정해진 수순이다.
“으아.”
아이, 시발! 진짜 일하기 싫다!
벌써부터 몸이 뻐근해지는 것을 느낀 나는 기지개를 켜며 노인네 소리를 냈다.
“식사하세요?”
그러자 마침 차량 정비를 끝낸 이은서가 얼굴 기름때를 닦으며 다가왔다.
어서 와! 어서 와! 이에 우리는 순식간에 의자를 옮겨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차 상태는?”
“최근 계속 과적을 했더니 맛이 가기 직전이에요. 부품 교체 안 하면 또 퍼질걸요?”
“우리 요새에는 당연히 부품이 없겠고.”
“헤헤, 아시면서 또 그러신다.”
일단 굴러가기만 하면 값어치를 하는 게 차량이다 보니 부품 가격도 천정부지다.
그나마 부품 몇 개로 땜빵 칠 수 있어서 다행이지 엔진이 고장 안 난 게 어디인가.
머릿속 체크리스트에 부품이라는 글자를 추가로 새긴 나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땡땡땡- - ! 땡땡땡 - - !
“아오!”
그런데 이번에는 외벽 위 달린 경종이 시끄럽게 울리며 식사를 방해한다.
나는 곧바로 숟가락을 내팽개친 뒤 요새 외벽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서치라이트부터 비춰요!”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고 나서 그런가, 하루에도 두어 번씩 감염체가 침공해온다.
이에 진절머리가 난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주민들을 닦달하며 외벽 위로 올라왔다.
끼기기기이이익!
끼아아악!
“저, 저쪽입니다!”
요새 반경 500m 앞으로 다섯 마리쯤 되는 감염체 무리가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와 달리 표적은 요새가 아닌 도망치는 한 생존자 무리였다.
“여기로 오는디?”
짊어지고 있는 큰 배낭들을 보아 다른 요새로 이주하려는 자들이 분명하다.
하필 도망쳐도 여기로 도망치나.
잠시 짧게 고민한 나는 결국 아저씨가 내미는 카빈총을 견착한 뒤 조준했다.
끼릭, 끼릭.
대충 거리를 400m로 잡고 모래주머니 위에 카빈총을 거치한 뒤 쭈그려 앉았다.
스으.
이빨 사이로 작게 숨을 내쉬자 자연스레 모든 신경이 방아쇠로 향한다.
나는 일단 첫발은 가볍게 당겼다.
탕!
쒜에에엑, 빠각!
고요함을 깨트린 초탄은 허공을 꿰뚫고 날아가 선두 감염체 머리를 터트렸다.
여기까지 느껴지는 타격감에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탕탕! 탕!
그러자 미친 속도로 달려오던 감염체들은 신체 어딘가가 꿰뚫리며 꼬꾸라졌다.
이에 이주민들은 살 희망이 보였는지 뒤뚱뒤뚱 요새 입구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동장.”
“예?”
“어디 부대 나왔다고 했지?”
“말해도 모르실걸요.”
한국 군대가 다 개판이 나버린 마당에 어디 출신이요 할 부대는 남아 있지 않다.
나는 감탄하는 아저씨에게 다시 카빈총을 돌려준 뒤 외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굳게 닫힌 정문 앞에는 생존자 다섯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덜덜 떨고 있었다.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저, 저희 모두 양양에서 온 이주민입니다! 혹시 여기가 KLF이라는 곳입니까?”
또 양양 출신에 목적지가 KLF? 미간을 찡그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길을 잘못 찾으신 것 같습니다.”
길을 잘못 찾았다는 말에 무리 리더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머리카락을 움켜쥔다.
“기, 길을······.”
하지만 이러고만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간절한 목소리로 사정하기 시작했다.
“일행들이 많이 지치고 다쳤습니다! 집이 아니어도 괜찮으니 요새 안으로만 들어갈 수 있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안된다고 말하려는 그 순간 외벽 위에 있던 모든 시선이 내게 향했다.
“저대로 두면 얼어 죽을 텐디.”
“어머, 갓난아이도 있어요.”
아니, 이 사람들아. 질병이나 물린 사람이 있으면 어쩌려고 외지인을 막 받나.
하여튼 이제 좀 먹고살 만하다고 다른 불쌍한 사람들까지 먹여 살리려고 한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결국 나쁜 역할을 자처하기 위해 앞으로 나섰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신분이 확실치 않은 외지인은 저희도 열어드릴 수가······.”
“저, 저희 모두 양양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료팀입니다! 여기 신분증도 있어요!”
“······있겠네요!”
아니, 의료계 종사하시던 분들이셨으면 빨리 말씀하시지 얼마나 추우셨을까.
손바닥 뒤집듯 결정을 철회한 나는 직접 문을 열어주기 위해 후다닥 뛰어갔다.
“동장도 이럴 때 보면 참 뻔뻔해.”
“저 너무 부끄러워요.”
물론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쑥덕거림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냥 못 들은 척하는 게 최고다.
* * *
일단 정해진 절차대로 간단한 신체검사를 통해 물린 자국과 감기나 독감 같은 전염병 증상이 없는지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모든 검사가 끝날 때쯤 그들에게 따뜻한 숙소를 안내했고 리더인 중년 남성만을 따로 불러 식사 자리를 가졌다.
“아파트 동장 박범석입니다.”
“차, 차지철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차지철은 멸망한 세상에서 제일 보기 힘들다고 알려진 의사 중 무려 외과 의사였다.
나는 이런 귀한 인재가 어쩌다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 물어봤다.
“양양 쪽에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번에 만난 이주민도 양양에서 왔다던데요.”
“한 달 전부터 날씨가 급격하게 변하더니 대대적인 감염체 웨이브가 있었습니다.”
담담하게 설명하던 차지철은 그때가 떠오른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저희도 최대한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예상치 못한 시기에 터진지라 요새 대부분이 멸망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감염체 놈들한테 붙잡혀서 아아······.”
“진정하세요.”
듣는 건 여기까지 해야겠다.
나는 패닉이 일어나기 직전인 차지철을 안심시키며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홀짝.
일단 정비공과 증언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양양에 무슨 일이 있던 건 확실하다.
그럼 책은 대규모 감염체 웨이브가 남쪽으로 내려올 것을 예언한 것일까?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그 뉘앙스나 단어 선정이 무척이나 모호한 점이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우연히 두 번이나 듣게 된 특정 키워드 중 하나를 언급하려 했다.
“KLF이라는 곳으로 가신다고.”
“예에. 맞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희는 처음 들어보는 곳입니다. 혹시 연고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런데 그 순간 표정이 어둡게 변해버린 차지철이 갑자기 피곤을 호소했다.
“제, 제가 지금 조금 피곤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못 드릴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시선을 피한다. 눈동자가 흔들린다.
달싹이는 입술에서 망설임이 느껴진다.
짝!
나는 작게 손뼉을 쳐 주의를 끌었다.
“바쁜 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요. 일단 들어가셔서 푹 쉬시고 내일 말씀 나누시죠. 가지고 계시던 소지품은 가져가세요.”
이에 나는 시간이 꽤 지났다는 걸 깨닫고 흔쾌히 일행들 곁으로 보내주었다.
끼익, 덜컹.
차지철이 나가고 난 자리, 나는 의자 위에 가만히 앉아 손가락을 두드렸다.
탁. 탁. 탁.
내 무릎 위에는 그의 소지품에서 빼돌린 수첩과 선전물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거짓말이 서투네.’
KLF(Korean Liberation Front).
한국 해방 전선? 시발 이름하고는.
원래 소재지는 강릉이 아니라 양양과 속초에서 활동하는 집단이라 쓰여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연고지도 없는 이 동네로 기어와 이주민들을 끌어모으고 있다.
양양에서 내려온 이주민과 하나 같이 KLF이라는 곳을 언급하는 공통 키워드.
뻔하디뻔한 사상 집단.
이놈들 지금 세력을 넓히기 중이다.
“경태 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경태를 불렀다.
* * *
“이야기······끝냈습니다.”
차지철이 수척한 얼굴로 들어오자 그의 일행들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처음 요새로 들어올 때와는 달리 그 넷은 두 가지 그룹으로 나뉘어있었다.
한쪽은 갓난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의료팀 간호사. 아니, 차지철의 아내와.
또 다른 한쪽은 KLF 소속을 숨기고 있는 젊은 두 남녀였다.
“허튼소리는 안 했겠지?”
“예, 예.”
만약 살려달라거나 사실을 말했다면 이 자리에서 아내와 딸 아이를 죽였을 것이다.
가까스로 공포를 인내한 차지철은 두 남녀 앞에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퍽!
그러자 반쯤 풀린 눈동자를 깜빡이던 남자가 불현듯 차지철의 가슴을 걷어찼다.
“그런데 아까부터 계속 돌발 행동을 하더군. 혹시 내 주의가 부족했었나?”
“커억, 컥! 아, 아닙니다. 너무 힘들어서 말이 헛나왔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차지철은 아내와 아이가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항 한 번 하지 못했다.
수년째 이어진 정서적 학대와 심리 지배가 그를 이미 한 마리 노예로 만든 것이다.
“에이, 너무 뭐라고 하신다. 이렇게 된 거 그냥 여기부터 작업하시죠? 요새 규모치고는 내실도 좋고 물자도 많은 거 같은데.”
“······확실히 풍족한 곳이군. 전진 기지로 삼으면 지도자님도 좋아하시겠어.”
원래 계획은 1년 전 강릉으로 내려왔던 현지 단원과 접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삼키기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것도 모자라 이를 꿀꺽 할 수도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그냥 보고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
남성은 쓰러진 차지철을 향해 말했다.
“그 동장이라는 남자의 환심을 최대한 사라. 무기고, 물자창고, 그걸 모아둔 열쇠 위치까지 전부 알아 오는 거야. 알겠나?”
“······알, 알겠습니다.”
“연기 제대로 하세요, 아저씨. 혹여나 잘못해서 걸리면 스으으으윽. 아시죠?”
차지철은 자기 아내와 딸 아이 입을 찢겠다는 여성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인간성이라는 게 결여된 그들은 마치 인간 가죽을 뒤집어쓴 감염체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절망에 빠진 차지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아파트에 외벽에 쓰인 ‘희망’이라는 단어를 힐끔거리는 것 말고는 없었다.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악몽이 계속될 뿐이다.
“·········.”
이 광경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던 이경태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겉으로 볼 때는 정말 평범한 생존자들이었는데 이런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니.
만약 작정하고 꾸민 계획을 알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변을 당할 뻔했다.
동장님은 어떻게 눈치채신 걸까.
이경태는 모든 위험을 예상하고 대응하는 범석에게 또 한 번 감탄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그는 우락부락한 근육과는 어울리지 않은 민첩한 움직임으로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