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18화>
“됐습니다. 하루 한 번 꼭 깨끗이 소독해주시고, 되도록 무리해서 걷지 마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날이 밝자 차지철은 마치 암묵적인 약속이라도 한 듯 순회 진료를 돌기 시작했다.
물론 한발 앞서 진실을 알게 된 일행들은 꺼림칙한 눈으로 이를 지켜봤지만,
의외로 그는 주민들 한명 한명 꼼꼼하게 살피며 제대로 된 의료 행위를 펼쳤다.
아무리 표정을 흉내 내고 행위를 연기해도 그 눈빛만큼은 속일 수 없다고 했던가.
차지철은 지금 강압이 아닌 분명한 자기 의지로 환자를 보살피고 있었다.
“······의외구먼.”
“그러게요.”
지속적인 정서적 학대로 내면이 완전히 무너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
처음에는 꺼림칙한 눈으로 차지철을 바라보던 일행들은 점차 동정을 표했다.
“아내랑 딸이 붙잡혀 있다고 했지? 우리한테 솔직하게 말해주면 도와줄 텐데.”
“가스라이팅이 그래서 무서운 거예요. 아마 저 사람은 반항할 의지도 없을걸요?”
경비실에 모여 한참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던 아저씨와 이은서가 나를 발견했다.
“어! 동장님 언제 오셨어요?”
“저 저! 또 혼자 음흉하게 웃고 있네.”
쓰읍, 너무 노골적으로 웃었나?
나는 재빨리 입술을 슥 닦으며 일행들이 모여 있는 경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동장 생각은 어때?”
“차지철이 말입니까?”
“응. 저 두 연놈이야 잡아 족치면 그만이라고 해도 저 양반 가족들은 좀 그렇잖여.”
사실 이번 일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총 들고 한 명씩 쏴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차지철과 그의 가족이 강제로 끌려왔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고,
또 내가 외과 의사라는 귀중한 인재를 놓치기 싫은 것이 한몫하고 있었다.
“동장, 우리 솔직하게 따져보자고.”
“말씀하세요.”
“동장도 저 양반이 탐나는 거지?”
당장 서울 요새만 가도 돈이 없는 생존자는 의사에게 진료받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이런 강릉 변두리에, 그것도 외과 의사가 섬 바리 헬 미를 외치고 있다고?
이건 절호의 기회나 마찬가지.
KLF가 꿀꺽하는 꼬라지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네, 가지고 싶죠.”
가지고 싶다는 대답에 입맛을 쩝쩝 다시던 상식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게 조금 그렇긴 한디, 나는 일단 동장 생각이 옳다고 봐.”
뒤이어 이은서도 동의를 표했다.
“저도요. 이것도 요새 지키는 일이잖아요?”
좋다 좋아.
성향이 다른 나와 일행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은 오랜만에 본다.
나는 어느새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들에게 앞으로 계획을 하나씩 지시했다.
“은서 씨 역할이 중요합니다. 경태 씨와 함께 최대한 여자 쪽을 감시하시면서 차지철 가족과 최대한 멀어지는 때를 노리세요.”
“나는?”
“아저씨는 차지철한테 붙어주세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게. 아시죠?”
이런 식으로 손발 맞추기야 이만석 때 한번 해봤으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 쪽은 제가 맡을게요.”
이제 남은 것은 청소하는 일뿐.
섣불리 들어온 걸 후회하게 해줘야겠지.
일행들과 이야기를 끝낸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경비실 빠져나와 공원으로 걸어갔다.
오늘따라 유독 어두운 겨울 먹구름은 당장이라도 눈보라를 뿜어낼 것 같았다.
* * *
“안녕하세요?”
한참 요새 주변을 관찰하던 남자는 대뜸 다가온 나를 향해 깜짝 놀라 뒤돌았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동장님.”
하지만 곧 능숙하게 웃는 표정을 연기하며 앞으로 내민 손을 공손히 맞잡았다.
“여기 참 괜찮은 곳이죠?”
“아아, 맞습니다. 주민분들이 칭찬 일색이라 한번 둘러봤는데 정말 좋네요.”
둘러보긴 지랄.
외벽이 어떻게 생겼고 무기는 어디에 있고 아주 열심히 관찰하던데.
속내를 몰랐다면 모를까, 호탕하게 터트리는 웃음이 이렇게 가식적일 수 없다.
근데 그 가식, 나도 제법 하는 편이다.
“저희가 다른 요새보다는 작아 보여도 생각보다 외벽도 높고 가진 물자도 많습니다. 아! 그리고 저기 102동 옥상 보이시죠?”
“아, 저기요?”
“저 위에 진짜 비싸게 주고 산 중기관총이 하나 달아뒀거든요. 강릉항에서 사 온 귀한 물건인데 거의 새거나 다름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가진 물자가 많고 식수까지 나온다! 또 꿍쳐놓은 총과 탄약은 얼마나 많은가!
나는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희망 요새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아. 근데 한 가지가 아쉽네요.”
“네?”
“곧 KLF라는 곳으로 떠나시지 않습니까? 마음 같아선 함께 하셨으면 좋겠는데.”
내가 아쉬움을 표한 그 순간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남자의 눈에 이채가 깃들었다.
잠깐의 뜸 들이기로 고민한 척 연기까지 한 그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동장님. 사실은 차 선생님께서 이 요새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시더라고요.
“예? 그게 정말입니까?”
“따뜻한 인심에 감동하신 모양이에요. 저희야 평소 선생님 결정에 맡기는 편이라 아마 모두가 긍정적으로 생각할 것 같습니다.”
정말 우습게 보였던 모양일까.
대가리가 너무 쉽게 미끼를 물었다.
“그,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나는 정말 순수하게 기뻐하는 척 남성의 손을 붙잡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아뇨, 제가 더 감사하죠.”
일이 쉽게 풀린다, 만만한 상대다.
아마 놈의 머리통은 이런 생각으로 가득할 것이다.
하지만 원래 덫 위로 올라온 쥐는 치즈를 물기 전까지 운명을 모르는 법.
의구심이라는 마지막 의심조차 허물어져 가는 지금, 나는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웠다.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 * *
[KLF가 요새를 점령하는 방식은 비열하다 못해 추악하기 그지없다. 왜냐하면, 생존자들이 가장 경계하면서 또 갈망하는 타인의 ‘호의’를 미끼로 삼기 때문이다.]
책에 쓰여 있던 대로 놈들은 차지철을 앞세워 주민들의 신뢰를 얻는 것에 집중했다.
요새를 구성하는 것은 곧 인간, 집단 민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 때문이다.
‘이틀.’
하지만 나는 놈들의 진짜 의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방치했고,
두 남녀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요새를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니도록 방관했다.
‘나흘’
그러자 놈들은 과감하다 못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들락거리는 만용을 부렸다.
이제는 아예 이 요새를 허수아비로 보고 단기간에 먹어 치울 준비를 끝내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그 결과.
‘숙소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졌어요.’
‘차지철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야.’
놈들은 방심하다 못해 경계를 풀었다.
‘시작합시다.’
나는 정확히 놈들이 루틴을 벗어난 시점 약속한 신호를 빠르게 주고받았다.
그러자 일행들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각자 역할을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늘이 바로 그동안 짧은 숙성 기간을 거친 달콤한 과실을 취할 시간이었다.
“아이고, 의사 양반! 많이 힘들지?”
그동안 차지철과 제법 친해진 상식 아저씨가 한참 진료 중인 그를 향해 다가간다.
그 사이 아파트 근처를 기웃거리던 남매는 아무도 모르게 의료팀 숙소로 향했다.
준비는 이제 끝.
마찬가지로 차량을 세차하는 척하던 나는 운전석에 탑승해 시동을 건다.
모든 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부르르릉, 끼익!
주차장에서 택시를 운전해온 나는 마침 숙소로 돌아가려는 남성을 차로 가로막았다.
“오늘도 고생하시네요.”
“동장님?”
“요즘 주민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좋으신 분이 없다고.”
“하하, 부끄럽네요.”
십새끼 웃는 거 봐라.
나는 일단 같이 한번 웃어준 다음 뒤늦게 본론을 꺼냈다.
“혹시 지금 시간 되십니까?”
“예?”
갑자기 시간이 되냐는 말에 남자는 당황했다.
평소 인사만 하고 지나가던 내가 갑자기 이리 물으니 당황한 모양이다.
“다름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오는 캐러밴과 중요한 거래가 있어서요.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혼자서는 조금 무섭네요.”
“이 날씨에 말입니까? 아니 다른 자경대 분들은 뭘 하시고·········.”
“하필 모두 바쁘셔서요.”
밖으로 같이 나가자는 말에 남자는 무척 꺼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아무리 동료가 남아있다고 해도 차지철 곁을 떠나기 껄끄러운 것이겠지.
“하긴 맨몸으로 밖에 나가기는 좀 그렇죠. 그렇다고 총을 드릴 수도 없고······. 아! 이참에 자경대를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이를 예상했던 나는 미리 준비해둔 권총이 들어간 가죽 홀더를 그에게 내밀었다.
자경대를 상징하는 권총과 홀더.
순간 남자의 눈이 반짝이다가 사라진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도 조금 믿음직한 분한테 맡기고 싶어서요. 어떻게 이번만 임시직이라도?”
이 희망 요새에서 동장 휘하, 자경단이라는 신분이 가지는 힘은 정말 막강하다.
일단 주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기본이고 질 좋은 무기 지급과 탄약이 있는 물자창고로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다.
이를 소문을 통해 알고 있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으며 고민했다.
그래, 끌릴 것이다.
내게 신임을 얻었다는 건 앞으로 있을 사전 공작에 힘을 더할 수 있다는 말.
만약 KLF가 왔을 때 요새 문이라도 열어준다면 그 공로는 엄청날 것이다.
“원래라면 거절하는 게 맞는데······.”
신중에 신중을 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섣부른 욕심이 그의 등을 떠민다.
“동장님께서 원하시면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유혹을 이기지 못한 남성은 권총이 들어있는 홀더를 옆구리에 찼다.
“얼마나 걸릴까요?”
“금방~ 돌아올 겁니다.”
손수 조수석까지 열어준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요새 밖으로 차를 운전했다.
.
.
.
.
“잠, 잠깐. 어디 가는 거야? 야! 야아!!”
한참 아파트 옥상에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던 KLF 소속 여성은 깜짝 놀랐다.
원래라면 숙소로 복귀해야 할 동료 남성이 갑자기 차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이다.
분명 반경 100m 이상 떨어지지 않는 게 정해진 약속이었는데 갑자기 왜 저러는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한 여성은 허둥지둥 담배를 끄며 난간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 - - - -!!”
분명 반대편 아파트 공동 현관에서 진료를 보고 있어야 할 차지철이 사라졌다.
담뱃불을 붙이기 전까지만 해도 보였던 인간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이 개새끼들이······!”
일이 무언가 틀어졌음을 느낀 여성은 황급히 신발 옆에서 날붙이를 꺼냈다.
그리고 곧바로 차지철의 가족이 있는 숙소로 가기 위해 문으로 뛰어가려 했다.
퍽!
“컥!”
하지만 그 순간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누군가가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세요?”
옥상에는 이미 오늘 아침 개시 신호를 받은 이은서와 이경태가 올라와 있었다.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사람을 왜······!”
“다 들통 났어요, 아줌마.”
“연기 그만하셔도 됩니다.”
불쌍한 척 부르르 몸을 떨던 여성의 표정이 순간 감정이 사라진 무표정으로 변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하는 꼬라지가 하나 같이 호구이길래 일이 쉽게 풀리나 했더니 제대로 당했다.
이에 책의 존재를 모르는 여성은 한참 빗나간 억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차지철이 알려줬나 보네.”
그제야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흐으 웃은 여성은 떨어트린 날붙이를 쥐고 일어났다.
“뭐, 잘됐어. 순진한 척, 착한 척하느라 마침 얼굴에 쥐 나기 직전이었거든. 뭐, 알아챘으면 어쩔 건데? 죽이기라도 하려고?”
가볍게 스텝을 밟는다.
진한 살기를 풍긴 그녀는 순식간에 달려와 칼을 휘둘렀다.
촤르르륵!
깡!
‘막아?!’
하지만 그보다 앞서 삼단봉을 뽑은 이경태가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칼을 막아낸다.
동시에 동생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이은서가 반동을 이용해 그녀의 얼굴을 걷어찼다.
콰직!
“꺄아아아아악!”
재수 없게 웃던 안면이 일그러진다.
이에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이은서는 떨어진 날붙이를 주우며 통보했다.
“원래라면 즉결 처형인데, 동장님이 정보가 필요하다고 하셔서요. 항복하실래요?”
항복하라는 말에 부러진 코를 부여잡은 여성이 악다구니를 지르며 일어났다.
“좆까, 이 시발 년아! 여기서 나만 잡으면 다 끝인 줄 알아? 그 동장이라는 새끼 밖으로 나간 거 못 봤어? 그 새끼 지금······!”
동장님이 위험하다고?
남매는 순간 서로 시선을 마주치더니 피식 웃었다.
“웃, 웃어?”
“이봐요 아줌마, 당신들이 이럴 거라는 거 누가 다 예상했는지 진짜 모르겠어요?”
퍽!
여성을 발로 차 제압한 이은서는 그대로 팔다리를 묶으며 현실을 알려주었다.
“누가 위험한 지 저랑 내기하실래요?”
살인 택시는 이미 요새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