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포칼립스의 상속자-19화 (19/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19화>

덜컹덜컹.

끼릭끼릭.

삐거덕거리는 와이퍼를 30분째 지켜보던 남성이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군요.”

“어휴, 하필 눈이 또 와서요. 죄송합니다.”

그냥 달리는 것도 힘들어하는 택시인데 눈이 쌓인 도로 위에선 거의 거북이다.

젠장 느리다고 짜증을 낼 수도 없고, 남성은 가까스로 한숨을 참는 게 보였다.

아주 미칠 노릇이지? 반대로 즐겁게 웃고 있던 나는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원래는 무슨 일을 하셨어요?”

“구급대원이었습니다.”

“아아, 119 부르시면 오시는 그분들이요? 그래서 의료팀에 함께 계신 거구나.”

“예. 그렇죠, 아무래도.”

사람을 살리는 구급대원이라고 하기에는 칼을 쥐는 굳은살이 너무 도드라진다.

아마 같이 팀으로 위장한 그 여성도 의료 종사자가 아니라 훈련된 프락치겠지.

그쪽도 이 정도면 정리됐을까?

힐끔 시계를 확인한 나는 핸들을 돌려 우회전했다.

“저기 보이네요.”

마침 도로 옆에는 버려진 지 한참 된 카센터가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끼이익.

나는 이곳에 자주 와봤다는 듯 능숙하게 자리를 골라 주차하고 시동을 껐다.

오직 하얀색 눈과 적막함이 깔린 카센터 근방은 정말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담배 태우십니까?”

“아, 예.”

날씨가 춥다.

차에서 내린 나는 아껴두었던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남성은 짜증이 올라오는 참에 잘됐는지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입김 섞인 담배 연기와 묘한 정적이 흐를 때쯤 나는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후회하지 않으세요?”

“예?”

“구급대원 일 말입니다. 나는 살리려고 하는 일인데 사실 죽는 사람을 보는 때가 더 많잖아요. 괜히 내 탓인가 싶고.”

“······사명감 때문에 하는 거죠.”

“그렇죠, 사명감. 사람 죽이는 일이나, 살리는 일이나 그게 없으면 못 하더라고요.”

한참 담배를 맛있게 피우던 남성은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처음 와보는 공간과 적막한 바람, 주제와는 한참 벗어난 대화가 갑자기 이질적이다.

그는 허리춤에 조용히 손을 올리며 아무것도 없는 카센터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다.

“캐러밴은 언제 옵니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구나.

나는 차량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흔들었다.

“안 올 겁니다. 부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럼 왜? 이 말을 뱉으려던 남성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의문, 부정, 분노. 기어코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냈을 때는 입보다 손이 빨랐다.

철컥!

두 눈을 크게 뜬 놈은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 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달칵, 달칵!

하지만 총알이 들어있다고 생각한 권총은 발사되기는커녕 그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시, 시발!”

깜짝 놀란 남성은 허둥지둥 숨겨두었던 칼을 뽑아,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물론 이를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던 나는 놈의 오른쪽 허벅지에 총을 격발했다.

탕!

“아아아악 - -!!”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리며 달려오던 놈은 허물어지듯 쓰러져 눈밭을 굴렀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나름대로 훈련을 받은 게 있는지 칼을 놓지는 않았다.

탕!

“끄아아아악! 개새끼야아아!”

이번에는 그냥 오른쪽 손목을 쏴, 반항할 수 있는 의지 그 자체를 꺾어버린다.

놈은 자비 없는 총질에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며 피가 넘치는 손목을 부여잡는다.

“제가 이름도 모르는 인간한테 총을 왜 주겠습니까. 호구 새끼도 아니고.”

하긴 호구보다 더한 병신으로 봤으니 선뜻 준 총이 멀쩡히 나갈 줄 알았겠지.

나는 웃음기가 완전히 지워진 얼굴로 다가가 놈의 머리채를 잡고 들어 올렸다.

“KLF 소속 맞죠?”

“끅, 끄윽! 시발! 닥치고 죽······아아악!”

다 들통난 마당에 그냥 이야기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왜 꼭 일을 만드는지 모르겠다.

나는 버둥거리는 놈의 얼굴을 그냥 눈 속에 처박은 뒤 품속을 뒤적거렸다.

그러자 차지철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수첩 속에 무언가가 함께 들어있었다.

“위치 수신기네요?”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하나 했더니 본대로 요새 위치를 보내주고 있었구나.

내가 위치 수신기를 발견하자 온몸을 버둥거리던 놈이 힘겹게 웃기 시작했다.

“지금 실수한 거다. KLF 소속 군인만 몇인지 알아? 본대가 강릉에 도착하면 너는 물론이고 그 좆같은 요새 새끼들도······.”

탕!

“아아아아아악!! 시바아알!”

집중하는데 시끄럽다.

나는 놈의 아가리를 닥치게 만든 뒤 다시 수신기를 살폈다.

어떻게 검사를 피했나 했더니 부품 단위로 쪼개 입이나 항문에 숨겼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머리를 쓰네.’

만약 책이 미래를 알려줘서 다행이지 멋모르고 있었으면 진짜 당할뻔했다.

하지만 나는 이게 다른 요새도 해당한다는 걸 알기에 웃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 나를 어쩔 생각이야.”

내가 갑자기 말이 없자, 얼굴이 창백해진 남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왜요. 갑자기 겁이라도 나세요?”

“어차피 침공은 예견된 일이야! 내가 여기서 죽은 걸 알면 KLF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너도 냉정하게 생각해 보라고!”

“그래서요?”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나를 치료하고 요새로 같이 가! 분명 용서해주실 거야!”

허벅지에 구멍을 내주고 오른손을 통째로 날려버린 상대를 용서해준다고 하다니.

이딴 짓을 벌일 거면 참 일관적이었으면 좋을 텐데, 좋은 기분을 싹 가시게 만든다.

“제가 말한 사명감 말이에요.”

“뭐?”

“사람을 죽이는 일이나 살리는 일이나 보통 그 사명감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바뀌더라고요. 하나는 나처럼 추하게 살아남거나.”

철컥.

“둘은 당신처럼 추하게 죽거나.”

나는 총구를 머리에 겨눴다.

놈은 죽음이 다가온 것을 느꼈는지 울부짖었다.

“잠, 잠깐! 살려줘! 다 말할게! 뭘 하려고 온 건지 다 말해줄 테니까, 제발 살려줘!”

탕!

가볍게 권총 방아쇠를 당기자 버둥거리며 도망치려던 놈이 영원히 침묵한다.

빠각!

나는 그 자리에서 위치 수신기를 밟아 부서트린 뒤 시체 위에 올려두었다.

KLF 놈들이 마지막 신호기 위치를 따라온다면 이 시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충분한 경고를 남긴 나는 잠깐 마실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요새로 돌아갔다.

* * *

돌아온 희망 요새는 어수선해졌다.

이번에 합류한 친절한 의료팀 덕분에 오랜만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나 했더니,

갑자기 자경단이 여자를 밖으로 끌고 나오며 주민들에게 진실을 공표한 것이다.

KLF는 뭐고, 프락치는 또 뭐야?

친절한 얼굴에 속았던 주민들은 분노보단 놈들의 치밀했던 행위에 두려움을 느꼈다.

‘가둬놓고 물 한 방울 주지 마세요.’

하지만 그 두려움은 곧 밖에서 돌아온 내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안정되었다.

이 모든 음모를 알아차리고 대응한 것이 바로 자신들의 동장이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이제는 은연중 나를 리더라고 인정한 걸까.

평소 쭈뼛거리며 어려워하던 주민들은 순순히 사후 통제를 잘 따라주었다.

그렇게 반나절도 안 되어 내부 프락치를 소탕한 희망 요새는 또 한 번 밤을 맞이했다.

달칵.

“드세요.”

나는 마주 보고 앉은 차지철에게 저번처럼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얼굴이 초췌한 그는 바닥만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5년 넘게 노예처럼 살았던 끔찍한 나날이 겨우 하루아침에 끝나버려서일까.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기에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대화를 기다렸다.

그러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차지철이 드디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 둘은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는 죽고 하나는 곧 처형 예정입니다.”

희망 요새를 노린 적이라고 판명이 난 이상 사실 죽음도 자비로운 처사다.

“하고 싶은 말 없습니까?”

내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자 차지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많은 죄를저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절망이라는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죠. 처음에는 나도 피해자다, 불쌍한 인간이다, 자조했는데 언제부턴가 저도 같은 공범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한참을 읊조리던 차지철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신께 죽여달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놈들에게 저를 죽여달라고 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두려움에 그냥 복종하고. 정말, 정말 숨만 쉬는 송장처럼 살았습니다.”

고해성사는 곧 자기혐오와 절망감이 점철된다.

그는 손을 모으며 내게 애원했다.

“하지만 그런 저한테 마지막으로 남은 기회가 있다면 가족만큼은, 가족만큼은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둘 다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끌려온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무능한 남편이고 못난 아빠여도, 가족이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차지철은 진심 어린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누군지 모를 상대에게 자비를 구했다.

‘나쁘지 않은 사람이여.’

일주일간 그와 친분을 나눴던 상식 아저씨의 마지막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혹시 그때도 그랬습니까?

“예, 예?”

“진료 보실 때 말입니다. 환자분들에게 계속 웃어주시던 거, 그것도 연기였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차지철은 당황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커피잔 속 거울이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걸 인지했다.

반평생을 거짓으로 산 그에게 지금, 이 순간이 유일하게 진실을 말할 기회였다.

“그때가······제일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다.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부인과 아이는 거처를 마련해 드릴 겁니다. 간호사셨다고 하시니까, 요새에서 적응하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아아······.”

“그리고 차지철 씨는 당분간은 진료실에서 주무시면서 주민분들을 봐주세요. 때가 되면 자택 근신으로 풀어드리겠습니다.”

차지철을 나쁘게 보지 않았던 일행들도, 주민들 대부분도 모두 동의한 사안이다.

나는 통보하듯 그의 처분을 말해준 뒤 터덜터덜 취조실 겸 창고를 빠져나왔다.

“아, 그리고 속죄는 신이 아닌 같은 인간한테 하는 겁니다. 앞으로 바로 잡을 기회는 많으니,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세요.”

뒤돌자마자 들려오는 숨죽인 울음소리는 최대한 모른 척하기로 하며 말이다.

다음 날 찾아가 본 차지철은 언제 울었냐는 듯 웃으며 진료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환자를 대하는 저 진심이 그동안 그를 지탱했던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희망 아파트에는 오늘도 포근한 눈이 내렸다.

* * *

“동장님, 4시 방향에 하나 붙었습니다.”

한참 택시를 운전하던 이경태가 백미러를 통해 감염체 위치를 알려주었다.

이에 뒷좌석에서 카빈총을 꺼낸 나는 뚫린 천장 위로 몸을 내밀어 발사했다.

탕!

노리쇠가 찰칵이는 기분 좋은 소음과 함께 택시를 따라오던 감염체가 꼬꾸라졌다.

확실히 날씨가 추워질수록 이런 한적한 외곽 도로에도 출몰하기 시작한 걸까.

안전장치를 고정한 나는 뒷좌석에 다시 카빈총을 던지며 늘어지게 하품했다.

“피곤하세요?”

“죽겠어요.”

KLF와 관련된 일은 일행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무사히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책이 말한 ‘위험’은 이러한 사소한 일로 국한되지 않았다.

“다른 요새에도 경고해야겠죠?”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

강릉으로 내려온 지 겨우 이틀 만에 희망 요새로 들어오려고 한 놈들인데

우리보다 더 위에 있는 다른 요새들은 어떻게 되고 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적어도 경고나 설득을 통해 힘을 합칠 수 있는 여지는 남겨두는 게 옳았다.

“아, 저기 보이네요.”

때마침 차량을 운전하던 이경태가 교차로 바로 앞에 보이는 파란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국 폴리텍대학 강릉 캠퍼스라 쓰인 낡은 간판이 흔들리고 있었다.

“폴리텍대학 지부 전체를 요새로 만든 곳이에요. 원래는 대학생들이 주축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생존자 요새가 됐죠.”

“외지인을 대하는 분위기는요?”

“호의적인 편이에요. 차량이 고장 난 생존자들 대부분이 여기로 와서 고치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다.

이참에 덜덜 떨리는 고물 택시도 고치고 희망 요새 출신 자경단원도 데려올 생각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저쪽 요새 리더와도 만나 KLF와 관련된 이야기도 해봐야겠지.

나는 강릉항에 이어 두 번째 바깥 요새인 폴리텍대 입구를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동장님, 저 혹시.”

“예?”

“그 두 사람 만나실 때, 저는 다른 곳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왜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인데.”

“······한 명이 제 전 여친이거든요.”

“오우,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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