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의 상속자 21화>
“괜찮으세요?”
“죽겠어요.”
나는 굴러떨어진 바닥에 대자로 누워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진정시켰다.
아씨, 요즘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 갈수록 체력이 약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약 1분가량 숨을 갈무리한 나는 이경태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웅성웅성.
대학 본부 건물 안에는 이미 수많은 생존자가 모여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계심과 환희, 혹시 모를 기대감이 섞인 눈빛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케 했다.
“이경태!”
그 순간 조금 전 나를 건물로 끌어 올려준 여성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다가왔다.
“여긴 도대체 어떻게 들어 온 거야?”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옥상에 걸린 깃발을 봤어. 원래라면 그냥 확인만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운이 없었지.
설마 요새 내부에서 감염 사태가 터졌을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이는 이곳에 갇힌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여기저기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들은 아마 우리가 자신들을 돕기 위해 온 구조대쯤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이쪽은?”
“아! 서로 인사 나누세요. 이분은 박 동장님 친 손주분이시고, 이쪽은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던 친구인 김가은입니다.”
“전 여친이라던?”
“······예. 그 친구요.”
할아버지의 성함이 들려오자 김가은이 눈썹을 추켜 뜨며 내게 성큼 다가왔다.
입술에 걸린 작은 피어싱과 보라색으로 물들인 단발머리가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다.
“연락이 끊긴 가족이 계신다고 듣긴 했는데, 설마 여기서 뵙게 될 줄 몰랐네요.”
“저도 여기까지 올 줄 몰랐습니다.”
김가은과 반갑게 악수하자 훈련으로 단련된 서로의 손과 굳은살이 피부로 느껴졌다.
이를 느낀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는지 나를 쳐다보는 눈동자엔 호기심이 감돌았다.
“가은아. 진웅이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변을 바쁘게 둘러보던 이경태가 다른 친구의 소재를 물었다.
그 순간 김가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동시에 절망과 슬픔으로 점철이 된다.
불길한 기류가 감돈다.
그녀는 무언가를 씹는 목소리로 답했다.
“죽었어.”
“뭐?”
“놈들한테 물려서 죽었다고.”
감염되어 죽었다.
보통 감염체에 물리게 된 인간의 말로는 대체로 비슷하다.
하나는 저기 밖을 어슬렁거리는 걸어 다니는 산송장이 되거나, 또 하나는 이성이 잃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말이다.
하지만 김가은의 표정을 보아 진웅이란 친구는 그녀의 손에 최후를 맞은 모양이다.
아무리 죽음이 익숙한 세상이라고 해도 그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진웅이가 죽었다고?
혼란스러워하던 이경태는 곧 넋이 나간 얼굴로 한쪽 벽을 위태롭게 짚었다.
항상 강직하고 튼튼하던 그도 친구의 죽음 앞에 버틸 수 없는 게 눈에 보였다.
“부탁드립니다.”
“······저한테 맡겨주세요.”
이럴 때는 같잖은 타인의 위로가 아닌 아픔을 공유하는 친구가 제일 필요했다.
나는 김가은에게 이경태를 맡긴 뒤 나머지 짐을 챙겨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다.
* * *
끼이익, 끼기긱.
한참 대학 본부로 몰려들던 감염체들이 밤이 되자 또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걸 다행이라고 하기엔 놈들이나 우리나 여기 고립된 건 마찬가지다.
책 이 새끼, 왜 이런 중요한 사건은 꼭 한 번씩 빼먹으며 나를 엿 먹이려 하는 거지?
요즘 들어 상황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거나 성향을 바꾸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시발, 이걸 확 불태울 수도 없고. 나는 신경질적으로 망원경을 내리며 투덜거렸다.
“여기 계셨네요?”
그러자 오후 사이 이경태를 보살펴주던 김가은이 어두운 옥상으로 올라왔다.
그녀의 손에는 폴폴 김을 풍기는 정체불명의 수프 그릇과 숟가락이 들려 있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다들 벌써 이틀째 굶어서 죽느니 마느니 하고 있었는데.”
혹시 몰라서 가지고 왔던 보존 식량을 전부 털어줬더니 그걸로 수프를 끓인 모양이다.
으슬으슬하던 참에 잘됐네.
나는 그녀가 넘긴 수프를 천천히 떠먹으며 아깐 듣지 못했던 현 상황을 물었다.
“상황 좀 설명해주세요.”
“보시다시피 내부 감염이에요. 일단 수뇌부는 싹 쓸렸고 경비대는 연락이 끊겼어요.”
“진압 시도도 없었습니까?”
“하아, 저도 묻고 싶네요. 듣기론 사이렌이 안 울렸다고 하는데 그게 왜 일지가······.”
그날따라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다라, 확실히 어딘가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나는 맹맹하기 그지없는 수프를 단숨에 들이켜며 펄럭이는 구조 깃발을 바라봤다.
고갈된 식량, 대부분이 비전투 인원인 생존자, 그리고 밖에서 득실거리는 감염체.
아마 내가 이를 책임져야 하는 요새 지도자였다면 대가리에 총부터 쐈을 것이다.
그만큼 최악의 상황이었기에 입안을 맴도는 수프에는 오직 쓴 내만이 감돌고 있었다.
“가은 씨!”
그렇게 입김만 내뱉고 있는데 옥상으로 올라온 한 생존자가 김가은을 애타게 불렀다.
“잠시만요.”
그녀는 내게 양해를 구한 뒤 소란이 들려오는 아래층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무슨 일이 생겼나?
슬슬 추웠던 차,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김가은 따라 3층으로 내려갔다.
와장창!
“고작 이거 먹고 어떻게 싸우라고!”
“다들 공평히 나눈 거잖아요!”
이야, 역시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는 생존자 간 배급 분쟁이 나와줘야 정상이지.
가장 첫 반발은 역시 실질적인 전투를 담당하고 있는 젊은이들 측에서 나왔다.
“우리가 목숨 걸고 싸우는 동안 너희들은 뭐 했는데! 이게 진짜 공평한 게 맞아?”
두 눈이 시뻘겋게 출혈 된 한 남자가 아이들과 노인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에 동의하는 쪽도, 반발하는 쪽도 금방이라도 충돌할 듯 언성을 높였다.
이미 안쪽에서부터 붕괴하고 있구나.
“야 이 시발 새끼들아!”
“모두 진정들 하세요!”
당연히 끼어들 생각이 없었던 나는 한발 물러난 채 조용히 불구경이나 하려 했다.
“- - - - - -?”
하지만 그 순간 몸싸움을 벌이던 생존자들 사이에서 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두 눈을 크게 뜬 나는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 하나를 빠르게 떠올렸다.
‘조금 도와드릴까요?’
‘제가 몸담은 곳이 있어서요. 그분들이 소개해준 요새로 가볼 생각입니다.’
거리에서 만났던 차량 정비공.
아니, KLF로 향한다던 그 남성이 저기 있다.
깜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마치 우연처럼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움찔!
그러자 남자는 무척 당황하더니 곧 눈동자를 떨며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나는 한 치 망설임 없이 인파를 헤쳐 놈에게 달려들었다.
“뭐, 뭐야!”
“어어어?”
놈이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나는 그 뒤를 재빨리 쫓는다.
한참 언성을 높이며 싸우던 사람들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시발!”
순박한 얼굴을 연기하던 놈은 내가 뒤따라온다는 걸 알자마자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하지만 여기는 빠져나갈 곳이 없는 건물 안,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찰칵!
“오지 마, 이 새끼야!”
결국 옥상까지 올라온 놈은 품에서 재빨리 잭나이프를 꺼내 들어 사방으로 휘둘렀다.
꺄아아악!
이에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했다.
아이, 시발 왜 소란을 일으켜.
나는 총을 쏴버릴까 하다가 그냥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뚜벅뚜벅 다가갔다.
“너, 너 뭐야!”
“우리 구면이잖아, 또라이 새끼야. 본인 입으로 알려줘 놓고는 왜 되묻고 지랄이야.”
도대체 어디로 숨어들었나 했더니 설마 폴리텍대 요새에서 프락치 짓을 할 줄이야.
잘 걸렸다 새끼야.
뚜벅뚜벅 다가가던 나는 그대로 자세를 숙여 재빨리 달려들었다.
후웅!
제법 칼 쓰는 솜씨가 좋다.
얼굴을 향해 휘두르는 나이프를 가볍게 피해준 뒤 몸을 낮춰 오금을 걷어찼다.
“큭!”
그러자 놈은 중심을 잃으면서도 절대 잡힐 수 없다는 듯 나이프를 찌르려 했다.
퍽!
이번 건 피하기도 미안하다.
나는 반 박자 빠르게 잽을 날려 얼굴을 가격한다.
나이프는 당연히 허공을 갈랐고 그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급소를 걷어찬다.
퍽!
역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새끼라 가볍게 제압하는 것이 손이 쓰인다.
나는 넘어진 놈을 향해 다가가 허벅지 안쪽으로 나이프를 가볍게 찔러주었다.
서걱!
“아아아악 - -!!”
미친 듯이 발악하던 놈은 그제야 나이프를 놓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사, 사람을 찔렀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놈이 프락치인 걸 알 리가 없는 생존자들은 웅성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잠깐! 피? 이게 지금 무슨······!”
마침 인파 사이로 김가은이 헤쳐 나오며 피가 흥건한 현장을 향해 다가오려 했다.
“경태 씨.”
철컥!
하지만 내가 손을 들자 어느덧 뒤를 따라온 이경태가 카빈총을 꺼내 들었다.
반대로 총기가 아예 없는 생존자들은 순간 흠칫 놀라며 뒤로 우르르 물러났다.
좋아 좋아. 아주 깔끔해. 덕분에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소지가 잠시 멈췄다.
“지금 나한테 총 겨눈 거야?”
“미안하다, 가은아. 곧 설명해줄 테니까, 지금은 잠깐만 동장님 좀 기다려줘.”
“뭐?”
“나한테는 동장님 명령이 우선이야.”
나는 놈의 품을 열심히 뒤져 역시나 작동 중인 위치 수신기를 꺼내 들었다.
휙.
그리고 뒤쪽으로 던져주자 수신기를 집어 든 이경태가 알아서 상황을 설명했다.
“저 남자, KLF라는 집단에 소속된 인간이야. 현재 강릉에 존재하는 모든 요새를 전복시키는 것이 목표고, 프락치를 생존자로 위장해 요새로 잠입시키는······.”
그사이 나는 시끄럽게 구는 녀석을 조용하게 만들어준 뒤 품속에서 수첩을 꺼냈다.
역시 의료팀으로 위장했던 놈들과 마찬가지로 수첩 속 진행 일지가 들어 있었다.
‘폴리텍대 요새. 규모 중, 인원 중, 방어 시설 준수, 공업 시설 최상. 자체적으로 수제 총과 질 좋은 재생 탄을 생산할 수 있음.’
그사이 잘도 조사했네.
나는 놈이 체류 중 알아낸 정보를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폈다.
‘경비대 간 유대가 깊어 접근 불가, 수뇌부 평가 최상, 침공 시 막대한 피해 우려. 사전 지시에 따라 플랜 B로 넘어갈 가능성.’
플랜 B? 작전 취소가 아니라?
‘시약 투여 완료, 05시 30분 완전 정전, 숙소를 시작으로 대규모 확산, 위대한 지도자여 영원 하라. KLF에 찬란한 영광을.’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나는 놈의 허벅지에 꽂아 넣은 나이프를 옆으로 비틀었다.
“끄으읍! 끄읍!”
“플랜 B가 뭐야.”
“끄아아아악!”
“플랜 B가 뭐냐고 이 새끼야.”
난도질하여 고통을 가한다.
이를 참지 못한 놈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대답했다.
“끄으윽, 윽! 감염······! 감염 테러!”
본인들이 점거하지 못한다는 판단이 서자 그냥 내부에 감염을 퍼트린 거야?
상식 수준을 아득하니 뛰어넘는 악행 앞에 나는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런데 하필 떠올려서는 안 되는 기억 하나가 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같이 있던 여자 어딨어.”
“············.”
대답이 없다.
그래, 없겠지.
숨겨온 감염체 시약을 투여한 희생자가 바로 아내라고 속인 그 여자였을 테니까.
어두운 눈동자, 창백한 얼굴.
그 표정은 내게 외치는 구조신호였구나.
순간 힘이 빠진 나는 놈의 머리채를 잡아 옥상 난간을 향해 질질 끌고 갔다.
끼이익, 킥! 끼익!
끼아아아악!
피 냄새를 맡은 감염체가 아우성친다.
나는 놈에게 보란 듯이 아래를 보여주었다.
“잠, 잠깐! 안돼! 살려줘! 아아아악!”
미친 새끼. 자기가 만든 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거면서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그 모습이 역겹다 못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이 몫이 다른 이들에게 있다는 걸 알기에 멱살을 놓지 못했다.
“경태 씨.”
“말씀하세요.”
“이 새끼 지혈하고 묶어놔요.”
고개를 돌리자 표정이 일그러진 김가은과 넋이 나간 생존자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어떠한 말을 해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시발.
기분이 더럽다 못해 시궁창에 처박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처참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