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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22화 (22/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22화>

“당장 죽여! 죽여버리라고!”

“진정들 좀 하세요!”

모든 내막을 알게 된 생존자들은 단체로 패닉 상태에 빠져 울분을 터트렸다.

당연히 그 모든 분노는 포박당한 채 창고로 끌려가던 남자를 향해 쏟아졌다.

그나마 자정하는 소수가 이를 막지 못했다면 정말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분노는 곧 절망과 슬픔, 악을 지르고 싶은 현실 부정으로 찾아왔다.

겨우 저런 놈 하나 때문에 수많은 이웃과 내 친구, 가족이 감염체가 되었다니.

도대체 우리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일을 당하고, 이런 꼴이 되어야 하나.

그동안 살아남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오던 생존자들 사이엔 어떻게 손쓸 수 없는 탈력감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그렇게 소음 하나 없는 밤이 지나 칙칙한 눈보라를 동반한 아침이 찾아왔다.

“심문 끝냈어요. 처음부터 경비대 건물에서 감염이 시작되도록 의도한 모양이에요. 일대 정전도 저놈이 한 짓이 맞고요.”

얼굴이 수척해진 김가은이 밤새 놈을 고문하며 얻은 정보를 다 털어놓았다.

물론 대부분이 수첩에도 쓰여 있었던 것이기에 들으나 마나 한 이야기였지만,

그중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중요한 정보도 한 가지 포함되어 있었다.

“다행히 무기고랑 차량 정비소는 건드리지 못했나 봐요. 젠장, 그걸 알았으면 대학 본부가 아니라 건물 지하로 갔었을 텐데.”

어쩐지 총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했더니 무기고는 접근조차 못 했구나.

수척해진 얼굴로 과거를 후회하던 김가은은 곧 정신을 차리며 내게 말했다.

“놈은 옥상에서 처형하기로 했어요. 저희한테 맡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비록 급발진해서 놈을 잡기는 했지만, 내 손으로 직접 죽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이것이 요새를 존중한 처사라고 생각했는지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뭐, 별말씀을.

도리어 이쪽에서 고맙지.

나는 김가은이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서로 남은 감정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계획은 있습니까?”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나마 연락이 끊긴 경비대나 외부 구조대가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모두 허사가 돼버린 거잖아요.”

“남은 식량은?”

“오늘이면 끝이네요.”

당장 오늘 새벽만 해도 자살을 시도한 생존자가 무려 둘이나 나왔다고 들었다.

내막이 드러난 지 겨우 몇 시간도 안 되어 꼴이 이렇게 됐는데 앞으로는 어쩌겠는가.

아마 단체로 아사하든, 사이좋게 목을 매달든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쯤 되면 좀 생산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주변에서 슬그머니 눈치를 보던 이경태가 슬그머니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가은아.”

“뭐.”

“우리랑 빠져나가자.”

솔직히 100%는 아니어도 한 반절과 가까운 확률로 탈출한 자신이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총이 있고 탈출할 수 있는 출구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원래 포섭하려고 했던 김가은이 과연 이를 수긍할까였다.

“······미쳤냐?”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으며 이경태 손을 탁하고 쳐낸다.

“우리가 아무리 친구여도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야. 나를 생각해서 권유해준 건 정말 고마운데, 선은 넘지 마라, 이경태.”

희망 아파트 태생들은 원래 다 이렇게 정의롭고 이타적이고 그런 거야?

참 어쩌다 한 번씩 보이는 이런 성향의 생존자를 또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딱 자경단원 체질인데. 나는 들리지 않게 입맛을 다시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단 저희 둘은 여길 빠져나갈 겁니다. 상황이 이렇게 돼서 정말 유감이에요.”

“······아뇨, 충분히 이해해요.”

나는 잠시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떠나기 전에 작은 도움은 하나 드릴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닫혀 있는 정문을 열고 소음을 발생시켜 준다거나.”

풀이 잔뜩 죽어있던 김가은이 순간 고개를 추켜들며 두 눈을 반짝였다.

“감염체를 유인해주신다는 건가요?”

“네. 정확히는 밖으로 끌고 가는 거죠.”

“10분만 확보할 수 있어도······.”

“무기고로 갈 시간은 충분합니다.”

물론 내부에 있는 감염체가 전부 나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어딘가.

일단 무기고까지 가는 길만 확보한다면 요새를 되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 사람들한테 말씀드리고 올게요. 아! 그리고 이거 하나씩 먹고 계세요!”

처음으로 표정이 밝아진 김가은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을 나섰다.

성질도 급하셔라.

그녀가 먹으라고 내민 것은 군용 MRE에서나 볼법한 딱딱한 초콜릿이었다.

뭐야, 뇌물이라고 가지고 온 거야?

바스락, 똑.

나는 그 투박한 초콜릿을 정확히 반으로 나눠 이경태와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맛은 달콤하면서 쌉싸름하다.

창밖으로는 점점 거세지기 시작한 눈보라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다.

* * *

달칵, 달칵, 달칵.

남은 카빈총 탄약을 모두 꺼내 정확히 2:1로 나눠 다시 삽탄이라는 과정을 거쳤다.

그래봤자 이제 탄알집 하나와 반 개씩밖에 쓰지 못하는 신세가 돼버렸지만,

우리는 마치 신께 기도하는 죄인처럼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장비를 점검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말이 없던 이경태가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오후에 처형식 있었다는 거 들으셨어요?”

“그래요?”

계획을 점검하느라 몰랐는데, 그사이 옥상에서 처형식을 진행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경태는 기뻐 보이기는커녕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슬퍼 보였다.

“직접 보고 왔거든요. 그런 쓰레기 같은 놈도 죽음 앞에 참회할까 싶어서······.”

“하던가요.”

“아뇨. 안 했어요. 대신 지금 죽는 게 좋을 거라고 저주를 퍼붓기는 했죠.”

표정이 어두운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삽탄을 잠시 멈추며 경태와 눈을 마주쳤다.

“근데 마지막 발악이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아버지랑 진웅이가 생각나더라고요.”

총알을 줍고 있는 녀석의 손은 어느새 사시나무처럼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줘봐요.”

나는 제대로 넣지 못하고 있는 탄알집을 뺏어 대신 작업을 끝내주었다.

그러자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이경태가 아, 하는 탄식과 함께 말했다.

“동장님.”

“예.”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형님이라.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다.

나는 총알을 가득 채운 탄알집을 카빈총에 끼워놓고 마지막 장전을 끝냈다.

그리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이경태의 어깨를 툭 쳐주며 옅게 웃는다.

“살아서 돌아가면.”

“네?”

“살아서 돌아가면 형이라 불러요.”

꼭 죽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형님, 아우야 질질 울 생각은 아직 없다.

나는 이경태가 세운 사망 플래그를 빠르게 제거하며 방 밖을 나섰다.

마침 문 앞에는 싸울 준비를 끝낸 김가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는 되셨어요?”

“네. 동트면 출발하려고요.”

“2시간 정도 남았네요.”

그녀는 화염병이 가득 든 가방과 빨간색 확성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정문으로 향하시면 외벽 두 번째 초소에 발전기가 있을 거예요. 거기에 전원이랑 이 열쇠 넣으시고 오른쪽으로 힘껏 돌리세요.”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해볼 수가 있는 데까지 해봐야죠.”

화염병과 바리케이드로만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대략 3~40분이라고 했지.

손발이 잘 맞아야 우리는 물론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까지 전부 살아나갈 수 있다.

“평소에 사람을 믿는다는 말. 잘 안 하는 편이거든요. 근데 이번만큼은 꼭 해야겠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박 동장님.”

모든 준비를 끝낸 나는 어느새 줄지어있는 생존자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살아서 봅시다.”

* * *

드디어 동이 트기 시작한다.

눈보라가 부는 옥상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던 나와 이경태는 고개를 들었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엥 - - - -!!!

그러자 마침 2층에서 시끄러운 확성기 소리가 울리며 고요 속 적막을 깼다.

시작이다.

저 멀리 소음을 감지한 감염체 무리가 눈보라를 해치며 우르르 몰려온다.

끼이기기기기긱- - -!!

끼아아악!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역겨운 울음소리는 놈들의 규모를 가늠케 하기 충분했다.

저번보다 많아졌다.

눈보라를 가로지르며 튀어나온 감염체들은 미친 듯이 건물로 달려들었다.

‘갑시다.’

우리는 그대로 뒤로 돌아 옥상 뒤편 아래로 고정된 밧줄을 던졌고,

그대로 타고 내려가 감염체가 몰리지 않은 반대쪽에 조용히 착지했다.

휘익, 쨍그랑!

화르르륵!

하나, 둘, 던져!

밀리지 마세요!

화염병이 놈들을 향해 쏟아진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힘을 합쳐 바리케이드를 온몸으로 막아선다.

그 광경을 순식간에 지나친 우리는 눈이 가득 쌓인 풀숲으로 들어갔다.

사박, 사박, 사박!

거리는 불과 150m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눈이 허벅지까지 쌓인 풀숲과 경사로를 올라가며 방향을 가늠했다.

끼긱, 끼이익!

“동장님!”

그런데 하필 눈 속에 파묻혀 있던 감염체 몇몇이 우리를 뒤늦게 발견했다.

“총 쏘지 마요!”

스릉!

나는 오랜만에 토마호크를 뽑아 손바닥 위에서 가볍게 한 바퀴 회전시켰다.

콰직!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호쾌하게 휘두르며 달려오는 족족 대가리를 깨버렸다.

깡!

마찬가지로 둔기를 꺼내든 이경태도 능숙하게 놈들을 처리하며 내 뒤를 따라왔다.

“후우, 후우.”

눈과 검은 피가 거친 숨에 뒤섞인다.

3마리를 단숨에 도륙한 나는 계속 질주했다.

100m, 80m, 거친 눈보라 사이로 희끗희끗 거대한 외벽과 정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쪽!”

눈보라를 힘겹게 뚫고 오던 이경태가 내가 손짓하던 방향으로 걸음을 돌린다.

그렇게 얼마나 더 뛰어왔을까, 우리는 드디어 정문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이익?

콰직!

“꺼져, 개새끼야!”

입구를 어슬렁거리던 감염체 머리를 후려 깐 다음 3번째 초소로 올라갔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김가은이 건넨 열쇠를 꺼내 집어넣고 손잡이를 당겼다.

털털털털.

쿠르르릉! 끼이익!

잠들어 있던 발전기가 작동하며 눈이 쌓인 기계장치가 마침내 돌아갔다.

동시에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폴리텍대 요새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됐다!

주먹을 꽉 쥔 나는 마지막 순서인 대피용 사이렌 버튼을 힘차게 내리쳤다.

탁!

치지직!

하지만 붉은색 버튼을 아무리 눌러봐도 스파크만 튀길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다른 버튼을 찾을 여유가 있나?

저 멀리서 들려오는 감염체 울부짖음이 커질수록 심장을 강하게 조여왔다.

“에이, 시발!”

나는 어쩔 수 없이 초소에서 빠져나와 욕설과 함께 외벽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마침 정문에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던 이경태가 열심히 뛰어오고 있었다.

“사이렌이 고장 났어요!”

“그, 그럼 어쩌죠?”

“뭘 어째요! 일단 앞으로 뛰어요!”

나는 소리를 지른 뒤 망설임 없이 정문 밖에 주차해 둔 택시를 향해 달려갔다.

부르르릉!

끼이이이익!

곧바로 시동을 건 다음 참 답답하게도 열리는 정문 틈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타요!”

그리고 조수석을 힘차게 열어 마침 앞으로 뛰어가던 이경태를 서둘러 태웠다.

부우우우우웅 - - -!!

나는 정문 밖이 아닌 대학 본부를 향해 미친 듯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건물에는 어느덧 개미 떼처럼 모인 감염체가 바리케이드를 뚫기 직전이었다.

빠아아아앙! 빠아아아앙!

운동장을 돌며 클락션을 울렸다.

이에 조수석 밖으로 고개를 내민 이경태는 감염체 무리를 향해 총을 난사했다.

탕탕탕! 탕! 탕!

먹고 싶지? 약 올라 죽겠지?

택시는 S자 코너를 그리며 놈들을 유혹했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감염체 무리는 몸을 돌려 택시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철컥, 철컥.

끼이이이익!

“운전석!”

“예!”

이경태의 탄알집이 비었다.

급제동을 걸어 서로 위치를 바꾼 나는 보조석 창문 밖으로 총구를 겨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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