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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24화 (24/180)

<아포칼립스의 상속자 24화>

[여기는 폴리텍대 요새입니다. 들리세요?]

“잘 들립니다. 신호도 좋네요.”

[당연하죠, 이게 얼마나 좋은 물건인데. 아마 날씨만 좋으면 희망 요새는 물론이고 다른 요새랑도 통신이 가능할 거예요.]

폴리텍대 요새는 주기적으로 통신이 가능한 무전기를 무려 두 대나 증여해주었다.

한 대는 픽업트럭에 또 나머지 한 대는 희망 요새에서 쓰기 위함이다.

이젠 나가면 깜깜무소식이었던 예전과는 달리 실시간으로 무전이 가능하겠구나.

이 픽업트럭도 정말 대단한 선물이지만, 솔직히 이 무전기만큼은 아니었다.

[저는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희망 요새에 합류할게요. 다행히 수뇌부 중 살아남은 분이 한 분 계셔서 복구 속도도 빨라졌어요.]

“잘됐네요. 저희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그럼 통신 끝.]

보조석에서 짧은 통신을 끝낸 나는 운전석 쪽에 이경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녀석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잔뜩 흥분한 얼굴로 픽업트럭을 몰고 있었다.

“좋냐?”

“형님, 이 차 진짜 미쳤습니다.”

“나도 한 번만 운전해보자.”

“손 다치셨잖아요. 조금 쉬세요.”

쉬기는 시발, 벌써 1시간째 보조석에 처박혀서 무전기나 조물조물하고 있다.

나는 붕대가 감긴 오른손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다 이내 투덜거리기를 멈췄다.

“요새로 바로 가실 거죠?”

“응. 구할 건 다 구했으니까.”

원래라면 요새에 필요한 연료나 의약품들을 구한 뒤 복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폴리텍대 요새로부터 받은 물자가 짐칸 가득 실려있다.

이 정도면 겨울나기는 물론 한 몇 개월은 물자를 걱정할 일은 없을 터.

이번 원정으로 많은 것을 얻은 우리는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도로를 달렸다.

“잠깐.”

그런데 그때 부지런히 주변을 살피던 내 시야로 무언가 이상한 점이 하나 포착되었다.

“차 좀 멈춰봐.”

끼이이익.

고개를 끄덕인 이경태는 즉각 차를 멈췄다.

나는 권총과 망원경을 챙긴 뒤 눈보라가 몰아치는 차 밖으로 걸어 나왔다.

“- - - - - -.”

저 멀리 큰길 한가운데 감염체 무리가 어딘가로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웨이브 같지는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쫓는 게 소음이 원인인 게 분명해 보인다.

누가 시내를 활보하기라도 하나?

나는 망원경을 들어 눈보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도시 쪽을 조용히 관찰했다.

“뭐가 좀 보이세요?”

“아니, 안 보여.”

괜한 것에 신경을 썼나? 별 조짐이 없는 걸로 보아 단순한 이동인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내민 경태를 향해 고개를 흔들어준 뒤 다시 차에 탑승하려 했다.

콰아아앙 - - !!

그 순간 저 멀리서 들려온 엄청난 규모의 폭음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나는 다급히 트럭 위로 올라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망원경을 들었다.

삐이이이이이 - - -쾅!

그러자 또 한 번 폭발이 작렬하며 감염체 무리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둥지가 있는 시내에서 저만한 폭탄을 터트린다고? 도대체 어떤 미친놈들이지.

마른 입술을 핥으며 곰곰이 생각해본 나는 트럭 위를 통통 두드리며 외쳤다.

“조금만 더 접근해 봐.”

“위험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확인은 하고 가야지.”

고개를 끄덕인 이경태는 나를 짐칸에 태운 채 더 가까운 관찰 포인트로 이동했다.

덕분에 눈보라 때문에 흐릿하던 시내 광경은 충분히 볼 수 있을 만큼 뚜렷해졌다.

꿀꺽.

대략 4~5대 정도 되는 군용 트럭이 시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물론 트럭마다 기관총이 거치되어 도로를 원활하게 확보하고 있었고,

그 뒤를 무장한 인원들이 빠르게 따라가며 깔끔하게 뒤처리까지 하고 있었다.

흡사 군벌을 연상케 하는 압도적인 모습.

나는 군용 트럭 바로 앞에서 참 지겨운 이름이 적힌 붉은 깃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KLF’

이 새끼들 벌써 강릉에 도착했구나.

“다른 도로로 우회해서 가자.”

“······예, 형님.”

혹여나 움직이는 모습이 들키거나 뒤를 밟히는 날에는 요새 전체가 침공당한다.

나는 잽싸게 보조석에 올라탔고 마찬가지로 표정을 굳힌 경태는 천천히 차를 운전했다.

우리가 수색 반경을 벗어나는 그 순간까지 감염체를 정리하는 폭음은 멈추지 않았다.

* * *

대기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더니 한밤중에는 결국 영하 20도를 찍었다.

상식 아저씨 말로는 여기서 5도나 10도 더 아래로 더 떨어지는 일도 있다고 하는데,

과장 조금 보태서 예전 핵겨울을 떠올리게 할 만큼 정말 치가 떨리는 추위였다.

하지만 추운 건 추운 거고, 살아남기 위해선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야 했다.

“전부 상가로 모이게 했죠?”

“급한 대로 침구류만 챙겨서 모이게 했어. 방 배정은 성별, 나이순으로 나눴고.”

“잘했습니다. 숙소는 주기적으로 환기하시고 하루에 3번씩 위생점검 해주세요. 독감이라도 도는 날엔 진짜 큰일 나는 거예요.”

난방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불편하더라도 공동생활을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겨울이면 꼭 주의해야 할 위생과 전염병 문제에도 소홀하지 않았고,

야외 활동할 때 꼭 필요한 각종 방한 도구도 빠짐없이 전부 챙겨두었다.

나는 군시절 행정 보급관이 왜 그렇게 짜증이 나 있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불침번은 어떻게 할까?”

“인원을 늘리는 대신 로테이션을 빨리 돌릴 겁니다. 초소 옆에 꼭 난방 기구 가져다 두시고 자경대도 당직 준비해두세요.”

“KLF 그놈들 때문이지?”

“예.”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밤이면 몰라도 낮에는 충분히 야외 활동이 가능하다.

KLF 본대가 왔다는 걸 확인한 이상, 적어도 최소한의 방어 준비는 해두어야 했다.

결국 이 카드를 꺼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평소 근무 태도가 성실했던 주민들만 추려서 총기 사용법을 익히게 합시다.”

“사격은?”

“적어도 인당 3발씩은 쏴보게 하죠. 군필들도 있을 테니 금방 적응할 거예요.”

혹시 모를 사고를 걱정해 자경단이 아닌 인원한테는 총기를 지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KLF 본대가 코앞에 온 지금은 그런 걸 하나하나 따질 틈이 아니었다.

적어도 기본적인 총기 숙련도를 갖추게 해 요새를 방어하는데 동원해야 했다.

“동장,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디.”

“예?”

“가은이 그 녀석이 합류한다 해도 자경단 인원이 넷을 못 넘잖여. 앞으로 일을 생각하면 더 뽑아두는 게 좋지 않을까?”

“그쵸, 아무래도. 추천이라도 하시게요?”

아니나 다를까,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꺼낸 상식 아저씨가 수줍게 웃었다.

“아니, 원래는 그냥 얼굴만 아는 막연한 사이였거든. 근디 어쩌다 불침번을 두어 번 섰다고 갑자기 친해져 버렸지 뭐여.”

“괜찮은 분이 신가 보네요.”

“사람 착하고, 성실하고 아주 진국이여. 아! 그리고 동장처럼 참전 군인이라고 하던디. 어디더라 용인 전투였다고 했던가.”

“용인 전투요?”

“동장도 알어? 그 양반은 용인이라는 말만 꺼내도 표정을 싸악 굳혀버려.”

알다마다, 내 소속 부대가 참전했던 중요 전장 중 하나가 바로 용인이었다.

당시 북에서 내려오는 초대규모 감염체 웨이브를 막느라 피똥 싸던 기억이 있는데,

거기서 살아남은 참전 군인이 설마 여기 희망 요새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 번 데려와 보세요.”

“어, 어! 알았어! 좀만 기다려!”

군 출신에 심지어 지옥이라고 일컫던 용인 전투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그런 인재를 안 뽑을 이유가 없었던 나는 만나서 이야기라도 해보려 했다.

“동장님! 아저씨!”

하지만 그 순간 옥상을 급히 올라온 이은서가 문을 급히 열며 외쳤다.

“라디오요! 지금 라디오 켜보세요!”

라디오? 밖으로 나가려던 상식이 아저씨는 떨떠름한 얼굴로 라디오를 켰다.

그러자 늘 좋은 노래를 송출해주던 강릉 FM에선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 모든 요새에 알린다. 현재 시각 21시 30분 이후로 강릉은 한국 해방 전선 지배 아래에 놓인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받은 적법한 권리를 근거로 하며,]

[이를 거부하거나 응답하지 않을시. 적으로 간주, 권리를 행사할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라디오를 듣고 있는 모든 요새와 생존자는 속히 KLF로 합류하라.]

늘 발랄한 목소리로 라디오를 진행하던 여성이 강제로 포고문을 읽고 있다.

이는 본대가 진입한 지 하루 만에 시내와 방송국까지 점령당했다는 것을 뜻했다.

[해방 전선의 날이 왔다. 위대한 지도자를 위하여······흐윽, 흑! 아, 안돼! 할게요! 계속할 테니까 제발! 꺄아아악 - - -쾅! 콰직! - - - 치이익, 칙! - -뚝.]

무언가를 부시고 때리는 살벌한 소음을 끝으로 라디오에선 잡음만이 새어 나온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상식 아저씨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라디오를 껐다.

우린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강수 씨.”

어제 라디오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와중에 아침 일찍 박강수가 캐러밴을 끌고 왔다.

강릉항에서 헤어진 게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쓸만한 트럭을 구해온 것이다.

“다들 잘 계시죠?”

“예에. 별 탈 없이 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그 저번에 말한 사람인가?”

“잘 부탁드립니다! 강릉항에서 사장님께 크게 신세 진 박강수라고 합니다!”

얼굴이 한층 밝아진 박강수는 일행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안면을 텄다.

앞으로 캐러밴이 오갈 때마다 보게 될 사이인데 친하게 지내서 나쁜 것 없었다.

“탄약이랑 무기가 제일 급하실 것 같아 여유가 되는 건 전부 다 챙겨왔습니다.”

“마침 필요하던 차였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물은 얼음인데 괜찮을까요?”

“아유, 없어서 못 먹죠. 부피가 조금 나가긴 해도 당분간은 불티나게 팔릴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주민들은 박강수의 트럭에서 탄약과 총기를 하역한 뒤 부지런히 물통을 실어주었다.

그사이 아끼던 담배를 꺼내 온 나는 트럭 뒤편에서 박강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제 방송 들으셨죠?”

“네, 그래서 급히 왔습니다.”

“사람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입니다. 생전 이런 일이 없는 동네였는데 갑자기 대한민국 정부니, 해방 전선이니 떠들어대니까······. 번영회 쪽에선 여전히 상황 파악 중입니다.”

희망 아파트와 폴리텍대 쪽이야 KLF를 몸소 경험해봤으니 그렇다고 쳐도,

아무것도 모르는 강릉항 입장에선 이게 지금 무슨 난리인가 싶을 것이다.

나는 자세한 설명 대신 조금 전 급히 써온 편지 한 장을 품에서 꺼내 내밀었다.

“돌아가시면 혜지 씨한테 전해주세요.”

“이게 뭡니까?”

“KLF라는 단체에 대한 자세한 정보입니다. 요새에 프락치를 심어놓기도 하는 놈들이니까, 꼭 비밀리에 전달해주셔야 합니다.”

“맡겨주십시오, 사장님.”

편지에는 그동안 내가 겪었던 모든 사건과 KLF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쓰여있다.

마음 같아선 강릉에 존재하는 모든 요새에 전달하고 싶지만, 일단은 이게 최선이다.

“아 맞다.”

편지를 박강수는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보조석 서랍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온도가 영하 2~30까지 내려가면 가스압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총기가 많습니다. 어머님이 계속 사장님 걱정을 하시길래 괜찮은 녀석으로 하나 구해봤습니다.”

“이건······.”

“콜트 파이슨입니다. 8인치 총열에 곰도 때려잡는 녀석이죠. 어떻습니까?”

은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실린더에 리볼버치고는 너무나 긴 8인치 총열.

손잡이 부분에는 분명 내 이름으로 추정되는 이니셜이 멋지게 박혀 있었다.

“요즘 멋진 선물을 많이 받네요.”

“사장님이 노력하신 결과죠. 어떤 위험이 닥치셔도 거뜬히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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