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겨울은 모든 걸 얼린다.
물은 당연하고 방금 만든 음식도, 따뜻한 커피도, 눈 깜짝할 사이에 얼려버린다.
아무리 불을 피우고 난방을 틀어도 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기어코 온도계마저 먹통이 되게 만드는 최악의 겨울이 강릉을 강타했다.
“사인은요?”
“연세가 워낙 많으셨습니다. 계속 주무시길래 깨웠는데 일어나지를 않으신 거죠.”
지난밤 상가 숙소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님 한 분이 추운 밤을 이기지 못하고 주무시듯 돌아가신 것이다.
“같이 사는 가족은 있습니까?”
“손녀 한 분이 계셨다고는 들었습니다. 근데 작년 가을에 서울로 떠나셨어요.”
“······깨끗하게 염해드리고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주세요. 앞으로 노약자랑 아이들 있는 방은 신경 좀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동장님.”
아무리 요새라는 공동체라고 해도 이처럼 소외당하는 생존자들이 속출하고는 한다.
이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 하루는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고는 했다.
오늘도 그렇게 요새를 열심히 둘러본 나는 뒤늦게 초소 대기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타닥, 탁.
드럼통으로 만든 난로 앞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모여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로 꾸역꾸역 끼어들어 따뜻한 난로에 얼어붙은 손과 몸을 녹였다.
“별일 없으시죠?”
“예에! 춥긴 한데 버틸만합니다.”
“동장님도 고생 많으십니다!”
불편한 공동생활 중 유일한 장점은 바로 주민들과 친해질 기회가 생겼다는 거다.
아무래도 아침에 눈 뜨고 저녁에 잠들 때까지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다 보니
원치 않아도 대화를 나누게 되고 그동안 벌어졌던 거리감도 많이 좁혀졌다.
그래, 이게 원래 맞는 거겠지.
나는 밝게 웃고 있는 주민들 얼굴에서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향수를 느꼈다.
펄럭!
“동장!”
그렇게 즐거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데 상식 아저씨가 대기실을 찾아왔다.
“또 발전기 멈췄어요?”
“아니, 그거 말고! 저번에 말했던 자경단원 일 기억 나? 오늘 둘이 만나기로 했잖아.”
아, 맞다. 할 일이 워낙 많다 보니 면접 보는 일을 계속 후 순위로 미루고 있었다.
나는 주민이 건네준 따뜻한 차를 꿀꺽 삼킨 뒤 아저씨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조금 전 겨우 말렸던 모자와 옷이 불어오는 눈보라에 또 눅눅하게 젖고 말았다.
“어째 쉴 틈이 없네요.”
“에이, 복잡스러워서 좋지 않어? 원래 이래야 좀 사람 사는 거 같은디.”
“제가 과로로 죽을 것 같은데요?”
“다 동장이 잘해서 생긴 업보 아니여. 군말 말고 빨리 걷기나 혀, 추우니까.”
역시 사람은 중간만 가는 게 최고라고 열심히 뛰어다닌 벌을 이렇게 받게 되는구나.
나는 눈보라를 헤치며 나아가는 상식 아저씨를 따라 투덜투덜 숙소로 걸어갔다.
* * *
눈으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오랜만에 거울을 보며 자라난 수염을 깎았다.
그리고 깔끔한 모습으로 집무실에서 기다리니 곧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예,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며 갈색 비니를 쓴 한 중년 남성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몸이 어딘가가 조금 불편한 듯 오른쪽 다리를 조금 절뚝이고 있었다.
“성함이 혹시.”
“김정구라고 합니다.”
“편하게 앉으세요.”
나이는 상식이 아저씨와 비슷해 보이고 체구는 생각했던 것보다 왜소하다.
거기다 오른쪽 다리까지 저는 것으로 보아 자경대 일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단 한 가지, 그에게서 나는 익숙한 향기가 이 모든 평가를 접게 했다.
“용인 전투에 참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문제가 됩니까?”
“아뇨, 당시 어느 방어선에 있으셨는지만 듣고 싶습니다. 혹시 불편하실까요?”
참전이라는 단어에 조금 날 선 반응을 보이던 김정구는 곧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성남입니다.”
“예비군으로 끌려가셨구나. 그때 성남으로 좆빠지게 도망치던 부대가 저희 부대였습니다. 여기서 다시 뵙게 되니 반갑네요.”
용인 전투. 위에서 내려오는 수백만 마리 감염체를 막아섰던 게 바로 거기였다.
물론 우리 부대는 일찍이 방어선이 뚫려 남쪽으로 후퇴하는 중이었고,
김정구가 있던 곳은 아마 그곳을 대신 막아주던 55사단 방어선이었을 것이다.
“전, 전방에 계셨습니까?”
“예. 어쩌다 보니.”
서로가 같은 참전군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아픔을 공유한 공감대가 생겨버렸다.
처음에는 불쾌한 기색을 내보이던 김정구는 곧 두 눈을 반짝이며 나와 악수했다.
“군 출신이라는 건 들었는데 설마 전방 부대에서 근무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요.”
“아뇨! 그럴 리가요. 그 생지옥에서 살아나오신 것만 해도 대단하신······.”
생지옥. 순간 열변을 토하던 김정구가 다급히 입을 다물며 내게 사과했다.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괜찮습니다. 신경 안 써요.”
나도 가끔 악몽을 꾸는데 졸지에 예비군으로 끌려간 김정구는 오죽하겠는가.
우리는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끝으로 과거 이야기를 끝을 냈다.
“뭐, 여러 가지 물어보려고 했는데 자경대 일을 하시는 건 무리가 없겠네요.”
“네, 맡겨만 주십시오.”
괜한 어중이떠중이 10명을 뽑느니 김정구와 같은 사람을 한 명 뽑는 게 낫다.
나는 서랍에서 자경대를 상징하는 권총과 홀더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완전히 넘겨주기 직전, 절차상 꼭 해야 하는 필수질문을 던졌다.
“자경대에는 왜 지원하셨습니까?”
김정구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권총이 필요했습니다. 혹시나 놈들한테 물리면 제 머리를 쏘려고요.”
합격! 나는 권총 홀더를 목에 걸어주었다.
* * *
그나마 날이 따뜻한 날을 골라 최종 선정된 주민들을 데리고 뒤쪽 공터로 나왔다.
그곳에는 임의로 만든 사격장과 인원에 맞춰 가지고 온 카빈총이 놓여 있었다.
“반갑습니다.”
인원은 총 10명. 선정 기준은 주민들을 성향을 잘 아는 상식 아저씨의 안목이다.
그래선지 인원 구성은 꼭 성인 군필 말고도 다양한 나이와 성별이 섞여 있었다.
“긴장하시는 모습 아주 보기 좋습니다. 총기를 휴대하고 계실 때는 항상 알려드린 안전 수칙을 준수하세요. 아시겠죠?”
나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주민들과 일일이 눈을 맞춘 뒤 카빈총을 들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한정씩 소유하게 되실 총기입니다. 특별한 건 없습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총이 나가고 사람이 죽습니다.”
철컥, 찰캉!
나는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탄알집을 넣고 노리쇠를 부드럽게 당겨 장전했다.
“만약 실제 교전 상황이 발생하면 여러분들은 초소 대기실에서 총기와 15발이 들어간 탄알집 두 개를 챙겨 올라오십시오.”
1인당 지급되는 탄약은 겨우 30발? 이에 눈치를 보던 한 아저씨가 손을 들었다.
“너무 적은 거 아닙니까?”
“당연히 적죠. 하지만 오늘 배우신 것만 철저하게 지킨다면 모자랄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정구 씨? 한 정씩 나눠주세요.”
함께 따라온 이정구 씨가 카빈총을 챙겨 주민들에게 한 정씩 보급해주었다.
군필이 아닌 사람들은 의외로 무겁고 둔탁한 총기 무게에 놀라는 눈치였다.
이게 그나마 2.6kg로 가벼운 카빈총인데 다른 걸 들면 아주 기겁하겠다.
“여러분께 많은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이 3가지만큼은 반드시 숙지하셔야 합니다. 첫 번째, 바른 자세. 두 번째, 제대로 된 조준, 세 번째, 침착한 사격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상대하게 될 KLF는 실전 경험을 가진 제대로 된 전투 집단이다.
그런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조준사격 정도는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했다.
“적의 이동을 저지하십시오. 주춤거리게 만들어 엄폐하게 하세요. 여기까지만 할 수 있다면 맡은 바 임무를 다하신 겁니다.”
“그, 그럼 적은 누가 죽이나요?”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죽일 겁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를 다시 한번 되새긴 주민들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나는 곧바로 응원의 손뼉을 짝짝 쳐주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환기해주었다.
“자, 다들 정해진 위치로 가세요.”
어색하게 총을 들고 있던 주민들은 주춤주춤 자리로 다가가 훈련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바람만이 불어오던 뒤편 공터에선 시끄러운 총성이 들려왔고,
다른 주민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슬그머니 상가 옥상에서 이를 구경했다.
걱정과는 달리 임의로 진행된 사격 훈련은 아무런 사고 없이 잘 끝이 났다.
다음 날, 참가 조건을 묻는 민원이 귀신같이 폭증한 건 사소한 여담이었다.
* * *
한동안은 KLF와 관련된 소식도, 감염체 침공도 없는 평화로운 나날만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폭풍 전야라는 것을 증명하듯 무전으로 다급한 연락이 왔다.
[동장님, 어제오늘 탈출해온 생존자들이 급증했어요. 대부분 홍제동 근처에 있는 소형 요새나 생존자 캠프 출신들이에요.]
“KLF가 그쪽에 자리를 잡았군요.”
[강릉 시청 건물이 아닌가 싶어요. 거기 말고는 수용할 수 있는 곳이 없거든요.]
재빨리 지도를 펴본 나는 홍제동과 강릉 시청, 그리고 방송국까지 빨간 선을 그었다.
폴리텍대를 기준으로 11시 방향, 남대천을 건너면 바로 있는 곳이다.
내가 서둘러 손짓하자 주변 지리에 밝은 상식 아저씨가 거리를 가늠해주었다.
“강릉대교만 건너면 바로 도착할 거리야. 차로 타고 오면 10분도 안 걸릴겨.”
10분? 사실상 코앞이나 마찬가지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다시 무전기를 쥐었다.
“근처에 다른 요새는 없습니까?”
[시내와 가까운 요새는 폴리텍대 요새가 유일해요. 수신기로 위치까지 확인됐을 테니 아마 다음 표적은 안 봐도 뻔하겠죠.]
산 넘어 산이라고 하필 감염체 공격으로 취약해진 폴리텍대가 KLF 거점 근처다.
그곳이 무너지면 우리도 가망이 없었기에 나는 미간을 문지르며 대책을 떠올렸다.
“폭약은 얼마나 있습니까?”
[많지는 않아도 쓸 만큼은 충분히 있어요.]
“전부 긁어모으세요. 그리고 지금 당장 강릉대교로 가서 다리를 끊어버리십시오.”
현재 남대천을 넘을 수 있는 멀쩡한 다리는 강릉대교랑 저 멀리 공항 대교가 유일하다.
만약 강릉대교를 끊어놓는다면 놈들은 강을 건너기 위해 9km 가깝게 돌아가야 한다.
[그게 가능할까요?]
“하부 구조를 노리면 충분합니다. 전체는 필요 없어요. 딱 중앙만 끊어놓으면 돼요.”
[일단 전달해볼게요.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큰 건 바라지 않는다. 정말 시간만 끌어주면 지연전 역할은 톡톡히 할 것이다.
나는 통신이 끝난 무전기를 내려놓은 뒤 주변에 모인 일행들을 향해 지시했다.
“픽업트럭 준비해두세요.”
그리고 곧바로 상가를 빠져나와 102동 아파트를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목적지는 옥상에 있는 할아버지의 집, 늘 해답을 알려주던 책이 있는 곳이다.
탁탁탁탁!
숨 가쁘게 계단을 뛰어온 나는 따뜻한 온기가 맴도는 책상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한동안 시답지 않은 이야기만 쓰던 책과 만년필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너 제멋대로 쓰는 거 알고 있는데, 이번 한 번만 어떻게 도와주면 안 되겠냐.
나는 평소답지 않게 공손히 손을 모으며 만년필이 움직이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단숨에 폴리텍대 요새로 진출한 생각이었던 KLF는 강릉대교에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아마 이를 복구하는 데는 2~3일은 족히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시간을 지연시키는 요행일 뿐,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힘만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 저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강릉항 요새는 현재 KLF와 맞서 싸우느냐, 굴복하느냐로 첨예한 대립이 이루고 있다. 강릉항이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나머지 중형 요새인 아산 병원과 강릉 산업 단지도 선택을 고민할 것이다. ‘그’는 눈보라를 뚫고 강릉항으로 향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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