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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26화 (26/180)

26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26화

강릉항의 반응이 늦는다고만 알고 있었지, 설마 내부에서 의견이 갈릴 줄은 몰랐다.

하마터면 요새끼리 연합이라는 걸 해보기도 전에 항복하는 꼴을 볼뻔한 게 아닌가.

즉각 총과 장비를 챙긴 뒤 연료를 가득 채운 픽업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정말 혼자서 되겠어?”

“무전기가 있잖아요. 자주 연락드릴게요.”

만류하는 일행들을 안심시킨 나는 홀로 정문을 빠져나와 외곽 도로를 달렸다.

날씨는 여전히 춥고 눈보라가 몰아쳤지만, 픽업트럭은 힘차게 눈을 뚫고 달렸다.

[······우리는 침략자가 아니다. 우리는 해방자다. 살아있는 시체들이 점령한 도시를 청소하고 콘크리트 장벽 뒤에 숨은 비겁자들을 끌어내려야 한다. 위대한 지도자와······.]

라디오에선 발랄하던 진행자 대신 음침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어디서 좆같은 것만 보고 카피한 사상 집단답게 선전 방송이 기본이구나.

시간 날 때 방송국을 터트려버리든가 해야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껐다.

치지직.

[동장님, 자리에 계십니까?]

그러자 때마침 차량 보조석에 설치된 무전기를 통해 김가은이 통신을 보내왔다.

“운전 중입니다. 말씀하세요.”

[말씀하신 대로 강릉 대교를 끊어놨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놈들과 교전할뻔했어요.]

“잘하셨습니다.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생각보다 놈들 숫자가 많아서 사람들이 놀란 눈치입니다. 아마 전면적으로 확대되면 저희 쪽이 밀릴 게 분명해요.]

“지연전을 펼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 다른 요새와 접촉해보려 하는 중이니까, 그쪽은 최대한 버텨만 주세요.”

[동장님만 믿겠습니다. 통신 끝.]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적어도 2~3일 내로 싸울지 도망칠지 결론을 내려야 한다.

나는 굳은 얼굴로 무전을 끝낸 뒤 눈보라 치는 길을 따라 열심히 동쪽으로 달렸다.

타앙 - - -탕!

그런데 그 순간 현 위치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먹먹한 총성이 들려왔다.

끼익.

나는 즉각 핸들을 꺾어 길을 벗어난 뒤 창문 밖으로 소음의 근원지를 찾았다.

‘검문소다.’

분명 강릉항을 오갈 때만 해도 없던 검문소와 바리케이드가 길 한복판을 막고 있다.

생존자들이 저런 짓을 했을 리는 없고, 역시 KLF 놈들이 여기까지 내려온 걸까.

나는 서둘러 위장막을 꺼내 차량을 숨기고 이내 길 바로 옆 언덕 위로 올라갔다.

달칵.

망원경으로 살핀 적은 총 다섯 명, 전원 개인화기로 무장을 하고 있다.

거기다 모래주머니로 만든 간이 검문소에는 기관총이 정면 거치된 것도 보인다.

모르고 계속 갔다가는 강제로 뚫는 건 고사하고 벌집이 되어 죽었겠는데?

적들의 동태를 확인한 나는 돌아서 갈지 아니면 처리할지를 조용히 고민했다.

탕!

그 순간 또 한 번 총성이 울렸다.

빛이 반짝인 곳으로 황급히 망원경을 돌리니 한 생존자가 총에 맞아 쓰러져 있었다.

아빠!

으아아아앙!

그 옆으로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아 도망치던 피난민이었던 모양이다.

‘처형.’

그래, 산 사람을 감염체로 만들어 요새에 풀어놓는 새끼들인데 처형이 대수인가.

놈들에 대한 내 평가는 이미 바닥을 기다 못해 말하는 돼지로 격하되었다.

‘처리하고 가자.’

움직이는 적이면 몰라도 강릉항으로 향하는 도로를 점거하고 있는 거점이다.

여기서 치우고 가야지, 아니면 길 위에서 또 어떤 귀찮은 짓을 할지 모른다.

철컥.

카빈총을 조용히 장전하고 미리 챙겨온 흰색 위장막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눈이 쌓인 언덕 위에 조용히 엎드려 총을 밖으로 삐죽 내밀었다.

“- - - - - -.”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자 총을 든 단원이 인상을 쓰며 총구를 앞으로 겨눈다.

마찬가지로 놈을 향해 조준선을 옮긴 나는 스으으 숨을 뱉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콰직!

총성과 함께 놈의 머리통이 꿰뚫린다.

깜짝 놀란 나머지 단원들은 재빨리 엄폐물 뒤로 숨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실전 경험이 많은 놈들답다. 나는 작게 감탄하며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타앙! 탕!

총성을 실컷 내준다. 그리고 곧바로 위장막 채로 빠져나와 비탈길을 내려왔다.

투두두두두!

드르륵! 드르륵!

뒤늦게 총구 불빛을 발견한 놈들이 내가 있던 언덕으로 화력을 집중했다.

물론 한 발자국 빨리 그 포인트를 빠져나온 나는 짙은 눈보라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박, 사박, 사박.

바람 소리가 발걸음을 먹는다. 검문소 바로 옆까지 접근했음에도 눈치채지 못한다.

턱.

“끄읍!”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놈을 덮쳐 입을 막고 나이프로 목을 그었다.

그때쯤 나머지 놈들도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황급히 사격을 멈추며 주변을 둘러봤다.

철컥.

하지만 잽싸게 바닥에 엎드린 나는 이미 기관총 사수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탕!

“여, 여기 있다! 근처에 있어!”

아무리 애타게 불러봐도 도와줄 동료들은 이미 피범벅이 된 채 죽어가고 있다.

나는 마치 조롱하듯 피식 웃어준 뒤 다시 짙은 눈보라 속으로 숨어들었다.

타앙! 탕탕탕! 탕!

“시발!”

이미 이성이 날아간 놈은 사방으로 총을 난사하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탕!

마지막 놈까지 깔끔하게 정리한 나는 총을 뒤로 메고 검문소를 향해 다가갔다.

그곳에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어린 남매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살, 살려주세요······.”

둘 다 눈 초점이 안 맞는다.

눈앞에서 부모님이 총살당하는 걸 봤는데 맨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

나는 터져 나오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어린 남매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걸을 수 있겠니?”

“예, 예에······.”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게.”

횡설수설,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남매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직접 픽업트럭까지 데려가 보조석에 앉혀준 뒤 다시 검문소로 걸어갔다.

찌익!

펄럭이는 KLF 깃발을 찢었다.

발가벗긴 놈들의 시체들을 보란 듯이 전시하고 피가 흥건한 검문소를 불태웠다.

화르륵!

어린 남매는 길에서 멀어지는 그 순간까지 타오르는 불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강릉항 요새 정문으로 접근하자마자 모든 서치라이트가 일시에 픽업트럭을 비췄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챈 나는 재빨리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현재 외지인과 캐러밴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접근 말고 돌아가십시오!”

“희망 요새에서 온 박범석이라고 합니다! 강혜지 씨한테 이름만 전달해주세요!”

상황이 급할 때는 역시 아는 공무원 이름 파는 게 최고라고 들었다.

강혜지를 불러달라는 말에 외벽을 경계하던 자경단원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야! 통과시키라는 지시 못 들었어?”

그리고 그중에는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예? 정말 열어도 됩니까?”

“아는 분이니까, 열라고 새끼야!”

저번에 문을 열어주었던 자경단원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움을 주었다.

나는 재빨리 트럭을 몰아 삼엄한 경계가 이뤄지고 있는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사장님!”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번영회 점퍼를 입은 강혜지가 뒤뚱뒤뚱 뛰어와 안겼다.

졸지에 그녀와 포옹하게 된 나는 이번에는 정말 한 대 쥐어 박아주었다.

“힝······.”

“편지는 읽었어요?”

“아! 맞아요, 편지! 그 편지 덕분에 저 이번에 승진했어요! 이제 주임이라고요!”

엥? 무슨 승진? 강혜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자기 출입증을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말단이었던 직위는 어디 가고 어엿한 강혜지 주임이 찍혀 있었다.

“사장님 편지 받자마자 출입 명부부터 싹 훑어봤거든요. 근 한 달간 들어온 이주민들을 싹 조사해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 말처럼 KLF 소속 프락치가 나온 거예요.”

“몇 명이나요?”

“무려 2명이나요! 한 명은 발각되자마자 그 자리에서 자살했고 나머지 한 명은 혼수상태로 병실에 입원해 있는 상태에요.”

“수첩도 확보했습니까.”

“그, 그건······사라졌어요.”

조사하는 거까지는 좋았는데 체포 과정에서 아마추어티를 조금 낸 모양이다.

내가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시자 강혜지가 물끄러미 시선을 내렸다.

“얘들은 누구예요?”

같이 시선을 내려보니 어느새 차에서 내린 남매가 내 다리 곁에 꼭 붙어 있었다.

“KLF에 붙잡혀 있던 생존자들입니다. 어디 맡길 곳이 없어서 데려왔어요.”

“어머, 어떡해······.”

워낙 비극이 흔한 세상이기에 강혜지는 얘들이 고아라는 걸 빠르게 눈치챘다.

다행히 강릉항 요새는 이런 아이들쯤은 받아줄 수 있는 인프라가 있었다.

“언니랑 같이 가자. 가면 좋은 선생님들하고 친구들이 반겨줄 거야. 응?”

강혜지는 상냥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어린 남매는 내 다리를 붙잡으며 뒤로 숨으려고 했다.

덜덜 떨리는 손과 창백해진 얼굴. 강혜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당분간은 데리고 계셔야겠는데요?”

“어쩔 수 없죠.”

보모 역할은 취향이 아니지만, 또 매몰차게 가버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덜덜 떨고 있는 남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강혜지와 함께 걸어갔다.

“상황 설명부터 해주세요.”

“KLF를 상대로 싸우냐 마냐는 상가 번영회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일단 주민 회의부터 소집했어요.”

“결과는 나왔습니까?”

“아직이요. 회의만 벌써 다섯 번째 하고 있는데, 뭐 그렇다 할 진척이 없네요.”

“의견이 갈리나 보군요.”

“일반 주민들 사이에선 당연히 싸워야 한다는 게 주 여론이에요. 근데 문제는 번영회 이사들이 전쟁을 반대한다는 거죠.”

주민들이 찬성하는 일을 고작 번영회 이사들 때문에 진행하지 못한다?

상인들 힘이 절대적인 강릉항을 생각하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어? 시작했겠다! 빨리 가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차라리 직접 눈으로 듣고 보는 게 빠를 것 같다.

마침 6번째 회의가 지금 있다고 하니 나도 강릉항 건물주로서 참가할 생각이다.

우리는 그렇게 부지런히 걸어 주민 회의가 진행 중인 항구 부두로 다가갔다.

“조용조용! 정숙들 하세요!”

“댁이나 공평하게 진행해! 지금 같은 번영회 소속이라고 편들어주는 거 아니야!”

“옳소! 이게 무슨 주민 회의야!”

한눈에 보아도 어디가 강릉항 주민인지, 번영회 이사들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격하게 달아오른 주민들 사이를 해치고 들어가 분위기를 살폈다.

“저희가 도대체 몇 번을 말합니까? 자치권을 인정해준다는 약속을 받았다니까요!”

“웃기지 마! 사람을 죽인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뭘 믿고 우리 요새를 맡기냐고!”

“프락치는 어떻게 설명할 거요!”

“예, 예! 놈들이 진짜 나쁜 놈들이라고 칩시다! 그럼 진짜 전쟁이라도 하자는 말입니까?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수 있어요?”

책임질 수 있냐는 말에 언성을 높이던 주민들은 찔끔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다.

전쟁이냐, 평화냐.

아직 끔찍한 참상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한 이들답게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역시 책이다.’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내 행동, 판단, 발자취가 한 곳에 엮여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찾아왔다.

나는 덜덜 떨고 있는 어린 남매를 혜지에게 맡긴 뒤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검문소 놈들이 가지고 있던 수첩, 작전 지령, 억울한 피해자들의 유품과 가족.

모든 걸 두 눈으로 직접 본 나는 강릉항 생존자들 앞에 목소리를 내었다.

“이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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