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27화
이의 있다는 말에 웅성거림이 멈춘다.
모든 시선이 이곳으로 향할 때쯤 번영회 직원은 미간을 찡그리며 내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희망 요새에서 온 박범석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강릉항 주민만 참여 가능한 회의입니다. 외지인은 나가주십시오.”
외지인은 껴들지 말라. 그 말에 주민들 사이로 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외지인 아니다, 이놈아.”
“예?”
어느새 휠체어를 끌고 나타난 총포상 할머니는 번영회 직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억센 힘으로 내 팔을 잡고 버티며 주변이 떠나가도록 언성을 높였다.
“총포상 건물이 떡 하니 있는데 무슨 소리. 이 젊은 양반도 강릉항 주민이야.”
그 외침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주민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그 양반이여?”
“맞네! 그 역주행 하던 미친놈!”
“강수가 저 양반 덕분에 살았다며?”
“선영이네 안사람도 신세 졌지.”
다리 건너 형제 이웃이고 지인인 이 강릉항 사회에서 주민의 목숨을 구해줬다는 평판만큼 훌륭한 것은 흔치 않다.
나를 경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어느새 같이 호응해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회의를 진행하던 번영회 직원도 어쩔 수 없이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뭡니까?”
됐다. 총포상 할머님 덕분에 발언권을 얻은 나는 기다렸다는 듯 내용물을 쏟아냈다.
후두둑.
그 안에는 여태 수집해온 수첩과 검문소에서 노획한 증거품이 가득 들어있었다.
“KLF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증거입니다. 두 눈으로 확인하시고 결정하십시오.”
증거품에는 범행 내용이 낱낱이 적힌 수첩과 생존자들이 피습당 한 증거가 있었다.
증거라는 말에 주민들은 옳다구나 몰려들어 증거품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잠, 잠시만요! 물러나세요!”
그들이 강릉항에 고립되어 있던 사이 벌어진 참상이 여기 고스란히 담겨있다.
주민들을 제지하려다 떠밀려온 번영회 직원은 경악한 얼굴로 내게 따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다들 아셔야 하는 일입니다.”
“그게 지금 말이라고!”
안다. 이들도 절차라는 게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엎질러진 진실을 판단하는 것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주민들이 할 일이다.
나는 멱살을 붙잡는 직원을 가만히 내버려 둔 채 웅성거리는 주민들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요?”
그러자 피 묻은 곰 인형을 우연히 주운 한 주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이 시발점이라는 것을 눈치챈 나는 드디어 언성을 높이며 진실을 고발했다.
“지금 시내 거리로 나가보십시오. KLF는 강릉 전역에서 요새를 불태우고 협조하지 않는 생존자를 붙잡아 처형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말하는 평화를 믿습니까?”
멱살을 잡은 손이 스르륵 풀렸다.
나는 주민들 사이를 가로질러 부두에 놓인 경매장 단상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계획적으로 프락치를 심고, 산 인간을 감염체로 만들어 무고한 이들을 학살합니다. 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이 두 눈으로 직접 봤고, 몸소 겪었습니다.”
웅성거림이 더욱 퍼져나간다.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서쪽을 가리키고 또 평화로운 강릉항 부두를 가리켰다.
“홍제동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과 차량을 거래하는 폴리텍대는 벌써 놈들과 전쟁 중입니다. 그들이 무너지면 KLF 놈들의 다음 목표는 어디겠습니까?”
어린 남매가 울음을 터트린다. 나는 그 울음소리를 배경 삼아 마침표를 찍는다.
“여기, 강릉항이겠지요.”
충격적인 고발에 분노한 주민들은 번영회 직원을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저 말이 진짜여?”
“우, 우리는 몰랐던 일입니다.”
“시방! 그게 말이 돼!”
“에라이, 썩을 놈들아!”
이러다간 맞아 죽게 생겼다. 직원들은 황급히 주민 회의를 종료하며 뒤로 도망쳤고,
불만만을 성토하던 주민들은 어느새 하나로 똘똘 뭉쳐 그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역시 억센 바다 사람들다웠다.
“사장님!”
나는 여유롭게 단상을 빠져나와 어린 남매를 보살피고 있던 강혜지와 합류했다.
“와, 박 대리가 저렇게 꼼짝 못 하는 거 처음 봐요. 이거 다 계획하신 일이에요?”
“아뇨, 언젠가는 터질 일이었습니다.”
만약 KLF가 제대로 된 협상을 해왔다면 주민들은 쉽게 수긍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의 지난 악행은 ‘생존’이라는 가장 중요한 역린을 건들고 말았다.
“주민분들이 저렇게 화난 거 처음 봐요.”
강릉항 주민 대부분이 상가 번영회로 몰려간 것으로 보아, 적어도 오늘이 아니면 내일 아침 일찍 결론이 나올 것 같다.
초조함을 애써 숨긴 나는 일단 추워 보이는 남매와 함께 트럭으로 돌아가려 했다.
“박범석 씨?”
하지만 그 순간 자경단원으로 보이는 남성 둘이 조심스럽게 접근해왔다.
“저희랑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갑자기 같이 가자고? 설마 아까 일 때문에 연행하려는 거야? 깜짝 놀란 강혜지는 황급히 그들 앞을 막아서려고 했다.
“그러시죠.”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도리어 막으며 움찔거리는 자경대를 안심시켰다.
“사장님!”
“애들 부탁해요.”
번영회 직원이면 몰라도 항구 주민인 자경단원과는 절대 충돌을 일으켜선 안 된다.
나는 불안해 보이는 강혜지를 안심시킨 뒤 얌전히 그들을 따라 걸어갔다.
* * *
“들어오십시오.”
약 30분가량은 기다린 끝에 드디어 나를 부른 상대를 접견할 수 있었다.
안내를 따라 들어간 그곳에는 나이 지긋한 노인 한 명과 중년 남성이 앉아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먼. 자네가 가지고 온 증거품을 조금 살펴보느라 말이야.”
벌써 여기까지 전달이 되었는지 탁자 위에는 다양한 증거품들이 놓여있었다.
먼저 입을 연 백발의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상가 번영회 회장 김춘식이라고 하네.”
손을 마주 잡자 어부 특유의 거친 굳은살과 억센 악력이 그대로 전해진다.
“희망 요새 동장 박범석이라고 합니다.”
“커피 한잔하겠나?”
“괜찮습니다.”
내가 반대편에 마주 앉자 김춘식은 방금 읽고 있던 수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폴리텍대가 전쟁이라는 거 사실인가?”
“지연전을 펼치는 중입니다.”
“자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이미 협력단계거나 동맹을 맺은 모양이군.”
이 양반, 상가 번영회를 이끌던 연륜이 있는지 요점만 정확하게 짚을 줄 안다.
나는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에 김춘식의 탁한 눈동자를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습니다.”
“우리와도 같은 제안을 하려고 왔고.”
“그것도 맞습니다.”
물자를 끌어안고 있는 강릉항 요새가 움직여야, 나머지 요새들도 움직인다.
크게는 책이 말한 연합을 위해서, 내 생존을 위해서 꼭 결성해야 하는 동맹이다.
“외지인 말을 믿습니까, 회장님?”
그런데 아까부터 잠자코 있던 오른쪽 뿔테안경 남성이 대뜸 딴지를 걸어왔다.
“결국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온 겁니다. 저희가 잃을 게 더 많은데, 왜 앞장서서 KLF 놈들과 싸워주어야 합니까? 전쟁을 원하면 본인들이 앞장서서 하라 하십시오!”
찾았다. 번영회가 왜 이런 스탠스를 취하는가 했더니 그 중심에 이 남자가 있었다.
나는 가시 돋친 남성의 말에 조용히 팔짱을 끼며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입을 다물고 있던 김춘식이 흥미롭다는 듯 눈동자를 빛냈다.
“왜 가만히 있지? 불리한 말일 텐데.”
“다 맞는 말이니까요.”
틀린 말을 해야 반박을 하지, 하나 같이 맞는 말만 하는 데 뭐라 할 수가 있나.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왔고, 강릉항이 함께 싸워주길 원해서 이 자리에 앉았다.
그 대답에 김춘식은 입 끝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껄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래, 이놈 말도 전부 맞는 말이지. 근데 자네 같은 사람은 잘 알지 않나?”
뿔테안경이 황급히 입을 다문다. 웃음을 싹 멈춘 김춘식은 내가 할 말을 대신했다.
“싸움에도 때가 있다는 거 말이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쉰 나는 그제야 팔짱을 풀고 자세를 바로 했다.
“앞으로 하루 이틀이 고비입니다. 전면전이 시작되기 전에 다른 요새를 설득하고 거점을 연결하는 길목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선을 늘려야죠. 여러 방면에서 지연전을 펼치고 적의 보급을 끊어야 합니다.”
아무리 후하게 잡아줘도 KLF와 강릉 전체 요새의 전력 차이는 1:0.6 정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전장이 홈그라운드라는 것과 추운 겨울이라는 이점이 있었다.
“만약 우리가 가담하지 않는다면 어쩌려고 그랬나?”
“간단합니다. 외교적 평화를 취하겠죠.”
“외교적 평화라, 궁금하군.”
“항복하는 겁니다.”
구라다. 강릉항이 항복하면 그대로 짐 싸서 울산 쪽으로 쭉 내려가 버릴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속내를 숨기며 뒤집은 패 뒤로 초조한 초읽기를 했다.
“으음.”
김춘식은 목이 타는지 차갑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을 홀짝이며 눈을 감았다.
그는 커피믹스의 단맛인지 아니면 회상인지 모를 단맛을 음미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자네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구먼.”
“······할아버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그 시절 박동구를 모르면 강릉 사람이 아니었어. 여기서 나이 먹은 생존자들 다 하나씩 빚이 있지.”
상식 아저씨도 그랬다. 강릉에서 박동구를 할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도지사가 우리 항구 사람들 모두 죽이겠다고 끌고 갔을 때, 절대 안 된다고 막아선 사람은 박동구가 유일했어. 내가 그날 그 양반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하면 믿겠나?”
그 말만큼은 진짜였는지 김춘식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결단을 내렸다.
“그때 빚을 갚을 때도 됐지.”
“삼촌!”
깜짝 놀란 뿔테안경 남성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김춘식은 한 치 망설임 없이 그의 목덜미를 잡고 책상에 꽂아버렸다.
쾅!
“큭!”
“태식아, 너희 아버지가 평소에 뭐라 하드냐. 네가 지금 부리고 있는 고집이 자존심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삼, 삼촌!”
“파도가 몰아친다고 뒤집히면 그게 사람 태우는 배야? 요새도 똑같아! 아무리 큰 파도가 와도 끝까지 버티고 서야지!”
바다에서 인생을 배운 노쇠한 어부는 지금이 물러날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김춘식은 오랜만에 굽어진 허리를 펴며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경 대장.”
“예!”
“아산 병원이랑 산업 단지에 사람 보내. 싸울 수 있는 주민들은 전부 무장시키고, 정박 중인 외국 선박 전부 징발해버려!”
전장에서 벗어난 외곽지대, 물자가 모이는 항구. 딱 후방 기지로 쓰기 좋은 곳이다.
순식간에 반대 의견을 꺾어버린 김춘식은 내게 주름진 손을 내밀며 물었다.
“자네는?”
“곧바로 폴리텍대 요새를 지원하러 갈 겁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연락해 주세요.”
손을 맞잡고 흔든 김춘식은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뒀다.
“항구 창고랑 무기고 열쇠야. 싸우는 데 필요한 게 있으면 전부 꺼내 가.”
이런 건 또 거절하는 타입이 아니라.
나는 열쇠 꾸러미를 날름 챙긴 뒤 소란스러운 상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겨울임에도 느껴지는 열기는 전쟁이 곧 머지않았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사각, 사각, 사각.
[적의 정체를 확인하고 이에 대응하는 일까지, 전부 개인이 했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고된 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이를 해냈고 고립되어 있던 강릉 요새들을 하나로 묶는 연합의 시작을 알렸다.]
[강릉항 요새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이상, 나머지 요새의 합류는 시간문제다. 그전까지 폴리텍대가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아직 본거지 건설이 끝나지 않은 KLF의 급소를 정조준할 필요가 있었다.]
[평생 죽기 위해 전장을 헤맸던 ‘그’는 이제는 살기 위해 전장으로 향하려 한다.]
[다음 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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