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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28화 (28/180)

28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28화

드르륵, 쿵!

번쩍!

잠겨있던 철문을 열자 수십 개 조명이 강릉항 무기고 내부를 환하게 밝혔고,

나는 예상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규모와 무기 가짓수를 보며 경악했다.

“이야.”

과장 조금 보태서 서울 요새에 있는 웬만한 무기고보다 규모가 크고 다양하다.

강릉 유일 무역항답게 전 세계 모든 밀수입 무기가 여기로 흘러들어온 모양이다.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러시아제부터 봅시다.”

강혜지는 이미 여러 번 무기고를 드나들었는지 능숙하게 나를 안내했다.

무기고 뒤쪽 오른편은 러시아제로 보이는 총기들이 사이좋게 모여 있었다.

그 앞에 선 나는 손에 착 들어오는 총기를 한 치 망설임 없이 집어 들었다.

AKM. 중국제나 북한에서 흘러들어온 게 아니라 진짜 러시아 제품이다.

“이거 전부요.”

나는 10정 정도 남아있는 AKM과 탄알집을 끌고 온 카트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러자 한참 무기를 추천해주려던 강혜지는 의외라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더 좋은 것도 많은데······.”

안다. 무기고에는 질리게 본 국산 무기는 물론 독일제와 미제까지 없는 게 없다.

하지만 지금이 영하 20도를 뚫고 내려가는 혹독한 겨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온갖 택티컬한 장비보단 이 녀석처럼 단순한 구조를 가진 총기가 최고였다.

철원 전투 당시 멀쩡히 발사되는 총을 찾으려고 개고생한 기억을 기반으로 한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그렇게 총기 선정을 끝낸 나는 방탄복과 발열팩 전투식량까지 차곡차곡 담았다.

아무런 걱정 없이 장비를 챙기고 있자니 코에선 저절로 콧노래가 새어 나왔다.

그 모습에 강혜지가 웃음을 터트린다.

“사장님, 그렇게 좋으세요?”

“저희 요새 와보시면 알아요.”

맨날 장비 부족에 시달려 살다가 이런 기회가 생기니 아주 정신을 못 차리겠다.

할아버지, 기왕 터를 잡으실 거 강릉항 근처로 잡으시지 왜 아파트로 가셨습니까.

대한민국은 집값이 이런 식으로 안정된 줄 몰랐던 후손은 하염없이 울고만 있습니다.

나는 허락된 카트 안에 최대한 많은 물자를 담은 뒤 뻔뻔하게 무기고를 나왔다.

“여깁니다!”

그러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강수가 시기적절하게 픽업트럭을 끌고 와주었다.

나는 가지고 온 물통을 전부 하역하고 짐칸 가득 총과 무기를 눌러 담았다.

“바로 가세요?”

“그래야죠.”

시간을 살펴보니 벌써 오후 4시, 해가 일찍 지는 걸 생각하면 일정이 무척 빠듯하다.

곧바로 출발 준비를 끝낸 나는 신세를 진 둘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려 했다.

“아, 아저씨······.”

그런데 그 순간 보호 시설로 향한 줄 알았던 어린 남매가 보조석에서 내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오늘이 아니면 다신 못 보실 것 같아서 데려왔습니다.”

지금 당장 전선으로 향해야 하는 나로서는 이 아이들 더 이상 보살필 수 없다.

그래서 강릉항에 맡기기로 한 것인데, 마지막 인사를 모르고 잊었던 모양이네.

내가 손짓하자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어린 남매가 다가와 옷깃을 잡았다.

“·········.”

쪼그려 앉아 눈을 마주친다.

아직도 물기가 남아있는 눈동자는 지독한 슬픔과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남매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 준 뒤 진심을 담아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조금만 더 빨리 왔어도 아이들은 물론 애들의 부모님까지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진심 어린 죄를 청했다.

“·········!”

그러자 어린 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멸망한 세상 속 비정한 어른들에게 치여, 단 한 번도 동심을 찾지 못했을 아이들.

어른에게 생에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녀석들은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옷깃을 쥐고 있던 고사리손은 어느새 나를 떠나보낼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만 믿으세요.”

그렇게 모두와 인사를 끝낸 나는 다시 픽업트럭 위로 올라와 시동을 걸었다.

백미러를 바라보니 어린 남매가 무어라 외치며 양손을 힘껏 흔들고 있었다.

나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픽업트럭은 힘차게 눈보라를 뚫는다.

* * *

강릉항을 바삐 왕복할 동안 다행히 전황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일 뿐, 시간이 없다는 건 여전했다.

“동장! 이거라도 먹고 가!”

희망 요새에 도착한 즉시 짐을 풀고 다시 홍제동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한시도 쉬지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상식 아저씨는 따뜻한 죽을 끓여줬고,

나는 차 보닛에 걸쳐 앉은 채 냉수 마시듯 따뜻한 죽을 후루룩 삼켰다.

“와 씨 이거 진짜 방탄복입니까?”

“이런 건 어디서 구하셨어요?”

옆에선 이번에 함께 할 예정인 경태와 김정구 씨가 방탄복을 보며 감탄 중이었다.

확실히 방탄복이라는 물건이 우리나라에선 조금 접하기 힘든 게 사실이니까.

나도 강하 침투 때 받은 것을 빼면 제대로 된 걸 만져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도 써도 되나 모르겠네.”

“더 가져오면 되니까, 아끼지 말고 쓰세요. 훈련받은 주민들은 조금 어때요?”

“다들 의욕만 가득하지, 뭐.”

“의욕이라도 있는 게 어디에요. 시간 나실 때마다 계속 인원 추가로 편성해주세요.”

작전을 함께 나가는 건 원치 않으나 최소한의 자기방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외벽 경계를 서고 있는 민병대를 보며 안전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형님.”

그러자 벌써 준비를 끝낸 경태와 김정구 씨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대로 폴리텍대랑 합류하는 겁니까?”

“아니, 중앙동으로 갈 거야.”

아무리 잘 무장하고 잘 싸우는 인원이라고 해봤자, 인원은 딸랑 우리 셋이다.

가서 괜히 혼선을 주느니 숙달된 소수 인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이를 한발 먼저 눈치챈 김정구 씨는 작전이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방 교란을 하자 이 말이군요.”

“아!”

정답이다.

KLF 놈들이 터를 잡은 곳은 감염체 토벌이 끝난 시가지 한복판이다.

여기서 작정하고 교란 작전을 펼치면 KLF 놈들로선 정말 골치 아플 것이다.

나는 보닛 위에 쌓인 눈을 치우고 그 위에 강릉항에서 받아온 지도를 펼쳤다.

“한 나흘 동안은 계속 밖에서 활동할 겁니다. 놈들 후방을 쳐도 되고 보급을 끊어도 좋겠지만, 역시 첫 번째 목표는.”

나는 붉은 동그라미가 처져 있는 지역을 하나둘 살피다 이내 손가락을 짚었다.

그곳은 중앙동 한가운데, 놈들이 가장 처음 점거했었던 건물이 하나 있었다.

“상징적인 것부터 날려버리죠.”

강릉 FM이 있는 공영 방송국.

지금도 선전 방송을 틀고 있는 저곳이 우리가 폭발시켜야 할 첫 번째 표적이었다.

* * *

사박, 사박, 사박.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가지를 가로질러 맞은편 부동산 건물 3층으로 올라왔다.

나는 총구를 앞을 겨눈 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고 이내 괜찮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확실히 감염체가 적네요.”

“흐, 이런 건 또 도움이 되네.”

KLF가 대대적으로 벌인 감염체 토벌 덕분에 건물 내부가 대부분 비어있다.

물론 그 점을 이용해 무사히 잠입한 우리는 그제야 짐을 풀고 잠시 목을 축였다.

“저쪽입니다.”

건물 윤곽만이 겨우 보이는 어두운 중앙동 시내, 오직 한 건물만이 불이 켜져 있다.

그곳이 공영 방송 건물이란 것을 확인한 나는 망원경을 들어 주변을 살폈다.

‘경비병 열, 초소 둘, 지원화기 둘.’

방송국 주변을 철조망으로 두르고 모래주머니를 쌓아 방어 시설을 만들었다.

역시 프로파간다를 중요시하는 사상 집단답게 주요 거점으로 지정해둔 모양이다.

‘괜찮네.’

하지만 이미 많은 인원이 강릉대교 전선으로 빠졌는지 생각보다 경비병이 적다.

나는 놈들 위치를 하나하나 머릿속에 기억한 뒤 내려놓았던 총을 다시 들었다.

철컥!

“작전대로 합니다.”

다리가 불편한 정구 씨는 가까운 옥상 근처에서 이 일대를 엄호할 것이다.

그사이 경태랑 나는 건물로 잠입, 방송국 시설을 불태우고 안전지대로 탈출한다.

이야기만 들으면 쉬운 일 같지만, 잘못 걸리면 진짜 뒈지는 건 한순간이다.

우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작전 위치로 이동했다.

사박, 사박, 사박.

경태와 나는 빠르게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서치라이트에 들키지 않도록 골목과 골목 사이를 지나 어둠 속에 몸을 숨긴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짧은 보폭으로 신중을 다하자 방송국 불빛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멈춰.’

저 멀리 입구가 보인다.

또, 경비가 셋 보인다.

눈 위에 납작 엎드린 나는 철조망을 끼고 오른쪽으로 조용히 우회했다.

반짝!

초소에선 부지런히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삼엄한 경계를 취하고 있다.

철조망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저 초소병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처리한다.’

나는 허벅지 가죽 홀더에서 나이프를 꺼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때맞춰 고개를 돌려주는 초소병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푹!

“컥, 커억······.”

날아간 투척용 나이프는 그대로 목에 꽂혀 붉은 피를 쏟게 한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우리는 즉각 철조망으로 달려가 절단기를 꺼냈다.

달칵, 끼기긱.

시간이 없다. 주기적으로 주변을 도는 경비병까지 처리해야 한다.

나는 순식간에 철조망을 끊어 개구멍을 만든 뒤 안으로 들어갔다.

수신호를 보내자 경태는 초소로 올라가 시체를 끌어내렸고 서치라이트를 고정한다.

“야! 저기도 담배 없다는데?”

그러자 저 멀리 죽은 초소병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경비가 다가왔다.

그는 누군가 침입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지 길게 하품하며 동료를 재차 부른다.

“야 이 새끼야! 저기도 없다니······끕!”

자리를 박차고 뛰어간 나는 그대로 입을 막은 뒤 왼쪽 가슴을 찔렀다.

놈은 흔한 단말마조차 지르지 못한 채 피를 주륵 흘리며 즉사했다

‘숨겨.’

경태는 기다렸다는 듯 두 놈의 시체를 끌고 와 풀숲 사이로 시체를 숨겼다.

안심하면 이르다.

이제 진짜 시작이다.

우리는 곧바로 방송국 건물로 다가가 2층 창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갈고리를 던질까? 아니, 창문이 깨지기라도 하면 내부의 누군가가 의심할 수도 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벽을 등진 경태의 어깨를 밟고 위로 길게 점프했다.

탁!

2층 난간에 안간힘을 다해 매달렸다. 동시에 창틀을 가까스로 발로 집었다.

끼이익!

다행히 2층 창문이 열려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온 나는 바깥으로 가방에서 꺼낸 로프를 던졌다.

그러자 경태는 몸집과는 다른 민첩한 움직임으로 창문을 뛰어넘었다.

후우, 후우.

초소병을 죽이고 건물로 뛰어 들어오는 데까지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경태를 툭 쳐준 뒤 안으로 진입하자는 수신호를 보냈다.

“으읍! 읍!”

아니, 보내려고 했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잽싸게 권총을 뽑아 방 한쪽을 겨눴다.

“읍읍! 으읍!”

그곳에는 사지가 결박된 여성 한 명이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고 있었다.

KLF 소속은 아닌데, 설마 방송국 직원?

나는 총구를 겨눈 채 다가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읍.”

그러자 여성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찌익.

입을 틀어막은 테이프를 떼주었다.

약속대로 비명을 지르지 않은 여성은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를 번갈아 바라본다.

“누, 누구세요?”

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강릉 FM?”

“네, 네에?”

맞네, 그 라디오 방송 진행하던 여자.

팬 미팅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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