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29화
언제 한 번 후원이나 해줘야지 싶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오랜 시간 묶여 피딱지가 앉은 속박 밧줄을 나이프로 하나하나 끊어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까?”
“······아뇨.”
하긴 처형 애호가 새끼들이 쓸모없다고 여긴 사람을 멀쩡하게 내버려 둘 리가 없지.
나는 수통을 내밀어 수분을 섭취하게 한 뒤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방송국 시설을 전부 폭파할 예정입니다. 정확한 위치를 아시면 알려주세요.”
“여,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셔서 3층으로 올라가시면 돼요. 근데 방송국을 폭파하면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사람을 구해 놓고 알아서 가라고 하기도 조금 난감한 상황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경태를 향해 손짓하며 그녀와 함께 있게 했다.
“10분 내로 끝낼 거야. 여기서 퇴로 지키고 있다가 신호하면 왔던 길로 같이 도망쳐.”
“형님은요?”
“내 걱정 할 때냐? 망이나 잘 봐.”
이경태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행자 여성과 함께 방 한쪽에 몸을 숨겼다.
나는 반대로 방을 빠져나와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 - - - -.”
지방 방송국치고는 생각보다 크다.
아마 여성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지하부터 3층까지 모조리 돌아다녔을 것이다.
의외로 바깥보다 조용한 2층 복도를 지나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아래, 아무도 없다.
위, 아무도 없다.
소음기 낀 권총을 앞으로 겨눈 나는 슬그머니 계단을 밟아 3층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어두운 복도와 함께 말소리로 들리는 옅은 소음이 들려왔다.
사람이 있다.
더욱 발소리를 줄인 나는 빛이 새어 나오는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방 안에는 제복을 입은 한 단원이 심각한 얼굴로 누군가와 통신하고 있었다.
“예, 예. 아산병원으로 향하는 인원은 저희 쪽에서 확인했습니다. 네, 분명합니다.”
아산병원 요새가 언급되었다. 거기로 향하는 인원이라면 역시 강릉항이다.
이 새끼들 남쪽으로 내려오는 틈틈이 수색대를 꾸려 정세를 살피고 있었구나.
생각보다 활동 반경이 넓다는 생각에 다음 방으로 가려던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끽.
놈이 무전을 주고받는 사이 조심스럽게 문틈 사이로 들어와 나이프를 뽑는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그리고 무전기를 내려놓을 때를 노려 입을 틀어막고 목으로 칼날을 들이밀었다.
“읍!”
방심하고 있던 놈은 무언가를 해볼 틈도 없이 제압되어 몸을 딱딱하게 굳힌다.
조금만 움직여도 죽는다.
금방이라도 쑤셔 넣을 듯 칼날을 위협적으로 세운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누구지? 어떻게 들어왔지? 순간 혼란스러움을 느낀 놈은 눈동자를 파르르 떤다.
하지만 사태 파악은 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괜한 헛짓거리를 벌이지 않았다.
“방금 통신한 곳, 본대지?”
“그, 그렇다.”
“강릉 시청? 아니면 홍제동?”
“그걸 어떻게······?”
쿵!
잔말이 많다. 나는 놈의 머리채를 잡고 무전기가 놓인 책상 위에 처박았다.
“대답이나 해.”
“끄윽, 큭! 홍, 홍제동!”
예상이 맞았다. 강릉 시청을 점거한 본대가 남대천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살, 살려줘!”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나는 살려고 버둥거리는 놈의 숨통을 깔끔하게 끊어주었다.
“끄륵······!”
그리고 매고 있던 가방에서 컴포지션인 싸구려 폭발물과 시한장치를 꺼냈다.
마음 같아선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싶지만, 이거라도 구한 게 어디인가.
방송국 시설에 폭발물을 설치한 뒤 정확히 5분 뒤에 터지도록 시간을 설정해두었다.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나는 곧바로 방을 빠져나와 이경태와 합류하려고 했다.
타앙!
하지만 그 순간 바로 아래층에서 총성이 울리며 어두운 밤 속 적막함을 깼다.
“- - - - - -!!”
탕탕탕! 타앙!
침입자다!
시발, 기가 막힌 타이밍에 발각됐다.
나는 곧바로 발코니로 뛰쳐나와 창문을 연 뒤 등에 메고 있던 AKM을 뽑아 들었다.
2층! 2층으로 올라가!
오른쪽 창문이다!
그러자 마침 총성을 듣고 몰려온 놈들이 허둥지둥 뛰어오고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발코니 난간에 총을 거치한 뒤 움직이는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타타타타 - - -!!
기껏 자동소총을 들고 왔는데 연발로 당겨주지 않으면 무언가 섭섭하다.
건물로 달려오던 세 놈을 가볍게 처리한 나는 입구로 총구를 옮기려고 했다.
번쩍!
드르르륵! 드르륵!
그런데 그 순간 서치라이트가 3층을 비추더니 곧 우레와 같은 기관총탄이 날아왔다.
나는 빗발치는 총탄에 욕설로 응수하며 넘어지듯 바닥에 엎드렸다.
쨍그랑! 쨍그랑!
투두두두두두두두- - - !!
화력이 한순간 집중된다. 유리창과 콘크리트 벽이 퍽퍽 터져나가며 사방으로 튄다.
이러면 진짜 나가리인데!
나는 2층으로 내려갈까, 아니면 뒤쪽으로 뛰어내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타앙-! 탕!
하지만 이번에는 진입로가 아닌 저 멀리 다른 건물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서치라이트와 거치 기관총을 노린 총격. 엄호를 약속한 김정구 씨가 분명했다.
탁!
지금이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계단을 통해 2층으로 내려갔다.
마침 복도에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진행자 여성이 이경태를 부축하고 있었다.
“형, 형님!”
“치워봐!”
웬 총성인가 했더니 이경태가 쏜 게 아니라 적한테 피격당했던 모양이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녀석의 옷을 풀어 헤쳐 총알이 맞은 부위를 빠르게 살폈다.
“윽······!”
다행히 총알은 방탄복 중 가장 튼튼한 부위에 막혀 데구루루 떨어져 나왔다.
“방탄복 맞았구만, 새끼야!”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몸을 매만지는 이경태를 걷어찬 뒤 둘을 한꺼번에 부축했다.
타앙! 탕!
탁, 탁, 탁, 탁!
총성이 가까워졌다. 계단에서 위로 올라오는 군홧발 소리가 둥둥 울린다.
“내려가!”
나는 그 둘을 2층 창문으로 떠민 다음 계단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타앙! 탕! 탕탕탕!
끄아아악!
섣불리 2층으로 올라온 놈 하나를 골로 보내주자 나머지 놈들이 바로 응사한다.
파바박! 팍!
삐이이이이 - - -!!
사방으로 튀는 탄피, 문틀에서 터져나가는 나무 조각과 이명이 한 대 어우러진다.
나는 번쩍이는 총구 화염만을 노려 기계처럼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달칵, 달칵.
순식간에 탄알집 하나를 전부 비웠다. 곧바로 다른 탄알집을 뽑아 끼워 넣는다.
타앙!
그런데 그 순간 귀를 스치는 파공음과 함께 오른쪽 가슴으로 무언가 날아와 꽂혔다.
“큭!”
숨이 턱 막힌다.
졸지에 중심을 잃고 넘어진 나는 방금 총을 맞았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방탄복 없었으면 진짜 죽었겠구나.
철컥.
앉아쏴 자세 그대로 텅 빈 탄알집을 뽑아 새로 꼽고 빠르게 재장전을 끝냈다.
잠깐,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여기서 끝장을 볼 생각이었던 나는 아차 싶어 황급히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발!”
그리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올 때 사용했던 2층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쨍그랑!
콰아아아앙 - - - - -!!!
그 순간 폭음이 세상을 집어삼킨다.
폭발물은 설치해둔 3층은 통째로 날아갔고 2층 천장 또한 오르르 무너져 내린다.
이 광경을 전부 슬로우 모션으로 목격한 나는 꼴사나운 비명과 함께 떨어지려 했다.
“형님!”
하지만 어느새 나타난 이경태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려 나를 받아주었다.
“끄악! 씨입!”
받아준 건 고마운데!
하필 잡아도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잡냐!
나는 터져 나오는 욕설을 애써 삼키며 개구멍 쪽으로 비틀비틀 뛰어갔다.
“빠져나가자.”
“네!”
우리는 그렇게 쑥대밭이 된 방송국을 뒤로한 채 그 일대를 빠르게 벗어났다.
처음으로 거점을 공격당한 KLF 놈들은 한동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 * *
“고작 3명?”
방송국을 날려버린 범인이 고작 3명이냐는 물음에 대답하는 간부는 없었다.
지금은 그저 고개를 처박고 있는 것만이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쾅!
하지만 본인이 이룬 업적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지도자’는 그럴 수 없었다.
“고작 3명이라고?”
“지, 지도자님 그것이······.”
“고작 3명한테 이 수모를 당해!”
별이 달린 녹색 베레모와 화상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는 오른쪽 얼굴.
그 사이로 보이는 흉흉한 눈동자 앞에 KLF 간부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후욱, 후욱.
거칠게 숨을 몰아쉰 지도자. 아니, 강중식 대령은 의자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래서 누구야.”
“저희 쪽에서 흔적을 계속 추격 중입니다. 근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뭐?”
“한 놈이 프로입니다. 나름 군 출신 애들 모아다 맡긴 곳인데, 정확히 5분 만에 초소를 뚫고 들어간 것도 모자라 진입하려는 5명까지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 정도야 우리 애들도 하지 않나?”
강중식 대령 옆을 가장 오랜 시간 보좌한 부대장이 표정을 굳히며 묻는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봐.”
“서울 애들도 이렇게는 못 합니다.”
강중식이 미간을 찡그린다. 첨언인 걸 알면서도 짜증이 욱하고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위엄이 깎인다는 걸 알기에 분노를 조용히 가라앉혔다.
“그 새끼 머리에 현상금을 달아. 잡아 오는 단원한테 뭐든지 다 준다고 그래.”
“알겠습니다.”
유일한 방송 시설을 날려버린 것은 물론 KLF의 자존심까지 건드린 상대다.
절대 살려둘 수도, 자신의 대업을 방해하는 꼬라지를 두고만 볼 수도 없다.
이를 으드득 간 강중식은 한자리에 모인 모든 간부를 향해 소리 질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폴리텍대를 점령한다. 이에 항명하거나 반항하려 드는 자는 한 놈도 남김없이 처형시켜 버려!”
척!
KLF에는 항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간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경례를 붙인다.
홍제동으로 모인 KLF 전 병력. 그 누구도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지도자님.”
그렇게 모든 간부가 떠난 자리 옆을 보좌하던 부대장이 나지막이 그를 부른다.
이에 강중식은 언제 언성을 높였냐는 듯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서울 놈들이 눈치챈 모양입니다.”
“벌써?”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잖습니까.”
강릉과 서울, 멸망한 세상을 기준으로 따지면 거의 다른 지역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를 전해 들은 강중식의 표정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쪼그라들었다.
그 물건.
존재 이유만으로도 서울은 물론 전 세계 요새들이 탐을 낼 귀중할 물건.
고작 강원도 변두리나 차지하고 있는 KLF가 가지고 있기엔 너무나 큰 것이었다.
“최대한 숨겨.”
“하지만.”
“먹기 버거운 물건이라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이건 양양을 버릴 가치가 있었어.”
모두가 영토 확장인 줄 알았던 KLF의 남진은 사실 대대적인 퇴각이나 마찬가지였다.
겨우 그 물건 하나 때문에 속초를 뺏기고 양양까지 점령당해 내려온 것이니 말이다.
그래도 이 강릉만 무사히 점령할 수 있다면 그간 겪어온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가봐.”
“······알겠습니다.”
과거, 눈부신 이상 하나만으로 KLF를 창설했던 유능한 군인은 어디로 갔는가.
부대장은 강중식의 눈에서 늙은 아집과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읽고 말았다.
“준비는 얼마나 남았지?”
“내일이면 끝납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진격한다.”
“KLF와 영광을!”
하지만 아무리 가라앉는 배라도 선장과 항해사는 자리를 지켜야 하는 법이다.
부대장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강릉 시가지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째,
들어오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온 기분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