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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30화 (30/180)

30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30화

방송 시설을 폭파한 우리는 그대로 픽업트럭을 몰아 중앙동 시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따라오던 추격대를 피해 반나절 동안 강릉 전역을 돌아다녔고,

흔적이 눈보라로 지워지는 오전 무렵 무너진 남산교 아래 차량을 숨길 수 있었다.

그렇게 눈을 떠보니 시간은 또 오후 5시.

교대를 서가며 쪽잠을 청하던 우리는 비몽사몽 의료 키트와 전투식량을 꺼냈다.

“악! 씨입, 아프다니까요!”

빨간약이 상처 부위에 발라질 때마다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좀만 참으쇼.”

하지만 김정구는 엄살 부리지 말라는 단호한 대답과 함께 치료에 열중했다.

그나마 봉합이 필요한 부상은 아니라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판이었다.

우적우적.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치료를 끝낸 이경태가 앉아있었다.

갈비뼈 부분이 시퍼렇게 멍이 든 주제에 전투식량 파운드케이크를 잘도 먹는 녀석.

“맛있냐?”

“네. 형님은 안 드세요?”

“난 질린다, 시팔.”

나는 내 몫으로 주어진 케이크와 초콜릿 볼을 마저 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겨우 전투 한 번 치렀을 뿐인데 온몸에서 삐거덕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

이번에는 뒤로 시선을 돌려보니 방송국에서 구해온 여성이 넋을 놓은 채 앉아있다.

먹으라고 준 전투식량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통성명이 늦었네요.”

“아······.”

“저는 박범석이고 이 덩치 큰 친구는 이경태. 여기 이분은 김정구 씨에요.”

그녀는 우물쭈물하다 이내 손을 잡았다.

“이, 이하나라고 해요. 인사가 조금 늦었지만,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뭐, 같은 처지에 인사는 됐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는 정했습니까?”

앞으로 어쩔 거냐는 말에 가뜩이나 어두웠던 표정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

이하나는 발 옆에 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평생 방송국 일만 해서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잘 없고······.”

“가족이나 친구는요?”

그녀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있었으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었다.

“형님.”

이경태는 또 감성 버튼이 눌렸는지 레트리버 같은 눈망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니, 누가 버리고 간다고 했냐?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녀석을 향해 콧방귀를 뀐 뒤 이하나에게 입주를 권유했다.

“저희 모두 같은 아파트 소속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요새에 정착하세요.”

“그, 그래도 될까요?”

“안될 건 또 뭡니까. 그래도 당분간은 이렇게 같이 다녀야 하니······. 자 받으세요.”

마음 같아선 희망 요새로 직접 데려다주고 싶지만, 그 시간마저 부족한 게 현실이다.

나는 보조석 서랍에서 자경단용 권총을 하나 꺼내 이하나를 향해 내밀었다.

“쏠 줄 아시죠?”

“네에. 조금은.”

“항상 들고 다니세요. 신변이 위험하시다고 판단 되시면 언제든지 쓰셔도 됩니다.”

조심스럽게 권총을 건네받는 이하나의 눈동자에 지독한 슬픔과 오기가 교차한다.

그 어떠한 위로보다 총 한 자루가 더 와 닿는 현실이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나중에 모든 게 해결되고 나면 방송 장비라도 하나 구해서 가져다줄까.

어제 자로 강릉 FM은 끝이 났으니, 희망 FM 이런 이름으로 개편해도 되겠지.

그렇게 한 차례 대화가 끝난 차량 내부는 전투식량 까먹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쿵!

그런데 그 순간 가만히 있던 차량 하부에서 익숙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 - - - -!!”

덜컹!

나는 곧바로 차 문을 열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강릉 시내를 살펴봤다.

쿠웅!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홍제동 쪽에서 박격포탄으로 보이는 폭발이 일어났다.

이경태는 즉각 보조석에 설치된 무전기를 켜 폴리텍대 쪽으로 통신을 보냈다.

[동장님!]

김가은이 기다렸다는 듯 받는다.

나는 무전기를 붙잡고 다급히 외쳤다.

“공격입니까?”

[네! 놈들이 일제히 넘어오기 시작했어! 저희 쪽에서 대응하고 있기는 한데, 역시 KLF 전체가 움직인 것 같아요!]

가로챈 정보가 있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총공격 한 번으로 모든 게 끝날 뻔했다.

나는 이 포화를 홀로 버텨준 폴리텍대 요새를 향해 마지막으로 부탁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요새로 퇴각하세요. 해가 뜨면 강릉항이 움직일 겁니다.”

[나머지 요새는요?]

“마찬가지입니다.”

[드디어!]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가 방송국을 날려버린 걸 안 아산 병원과 강릉 산업 단지가 연합에 합류할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가장 준비가 잘 된 강릉항을 시작으로 지원 병력을 보낸다고 했으니, 앞으로 폴리텍대가 버텨야 할 시간은 12시간 남짓.

나는 초읽기를 넘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전면전의 전운을 초조한 얼굴로 바라봤다.

상황이 어지간히 급한지 김가은은 무전을 끄는 것조차 까먹고 뛰쳐나갔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폭음과 고함은 현장의 급박함을 그대로 전해준다.

뚝.

나는 무전기를 껐다. 그러자 일행들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기울였다.

“선택지는 3개입니다.”

지도를 꺼내 유리창에 붙이자, 강릉 전역 상황이 시뮬레이션처럼 그려진다.

“첫 번째, 이곳에서 빠르게 벗어나, 전투 인력을 이끌고 오는 강릉항과 합류한다.”

가장 안전한 선택이다.

하지만 썩 도움은 되지 않는다.

“두 번째, 이대로 폴리텍대 요새로 합류해 KLF와 치루는 전면전에 힘을 보탠다.”

이건 좀 해볼 만하다.

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마지막 세 번째.”

일행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보통 내가 말하는 3번째가 문제의 정답이었으니까.

“강릉 시청을 친다.”

미친놈인가?

경태와 김정구는 경악했다.

“거긴 놈들 본거지······.”

“본대가 빠졌잖아.”

“아!”

KLF 놈들은 폴리텍대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모든 전력을 홍제동으로 집중시켰다.

그 말인즉슨 본거지인 강릉 시청에는 최소한의 방어 인력만 남아있다는 뜻.

미친놈이란 소리가 절로 나왔던 만큼 놈들은 공격을 전혀 예상치 못할 것이다

경태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물었다.

“가능······할까요?”

“가능하게 해야지.”

나는 기다렸다는 듯 트럭에서 내려 짐칸을 가리고 있던 녹색 방수천을 치웠다.

펄럭!

그곳에는 희망 요새에서 가져온 M2A1 브라우닝 중기관총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 이건 또 언제······.”

마땅히 쏴볼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어디 가서 꿇리지 않는 대대급 지원화기다.

600M 밖에서 화력을 투사하면 시청이고 자시고 아주 개 박살이 날 것이다.

부족한 화력은 이 친구가 커버할 테니, 우리는 방아쇠를 당겨주기만 하면 될 터.

“자, 그럼 해봅시다.”

둘 다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너희가 선택한 동장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 한다.

* * *

총공격을 시작한 KLF는 남대천을 넘어 폴리텍대 요새 앞까지 빠르게 진군했다.

한쪽은 뚫기 위해, 또 다른 한쪽은 막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투사한다.

그 교전이 얼마나 격화되었는지, 여기서도 검은색 연기가 보일 정도였다.

부르릉, 끼익.

하지만 도리어 그 소란을 틈타 적의 목 끝까지 숨어들어온 우리는 차를 멈췄다.

현 위치는 고속버스터미널 역, 강릉 시청이 정면으로 보이는 대로 바로 앞이었다.

끼이이익! 끼기긱!

마침 차 소리를 듣고 온 찐따 감염체가 시끄러운 울부짖음을 내며 달려온다.

나는 자연스럽게 차에서 내려 신경질적으로 뽑아 든 토마호크를 내려찍었다.

콰직!

그리고 뇌수가 터진 시체를 발로 찬 뒤 트럭 위로 올라가 망원경을 꺼내 든다.

반짝!

오직 쓰레기와 폐건물뿐이었던 강릉 시청은 KLF 놈들의 본거지가 되어 있었다.

나는 사방을 비추는 서치라이트와 삼엄한 경계를 보며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온다.’

마침 시청 입구에는 짐을 가득 적재한 트럭 세 대가 천천히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한참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 물자를 계속 남대천 전선으로 보급하는 모양이다.

통통.

내가 조용히 차 보닛을 두드리자 핸들을 꾹 움켜쥔 경태가 살며시 차를 움직인다.

그리고 트럭이 지나갈 거라 예상되는 곳에 정차하고 동시에 차에서 내려 엄폐한다.

저 멀리 엔진 소리가 들린다.

나는 픽업트럭 짐칸에 거치해둔 M2A1 중기관총의 노리쇠를 힘껏 당겼다.

철컹!

묵직한 노크 음이 심장을 때린다. 나는 총구를 옮겨 바로 앞 정면을 조준했다.

투투투투투투투투투투 - - - - -!!!

마침 보급 트럭이 차도를 달려왔다.

힘껏 방아쇠를 당기자, 총구에서 불을 뿜으며 발사된 탄환이 우레처럼 쏟아졌다.

쨍그랑! 파바박!

끼이이익, 쾅!

전면 유리창이 깨졌다. 운전하는 놈, 조수석에 타 있던 놈 구분 없이 피떡이 된다.

동시에 타이어가 터지며 방아쇠를 당긴 지 2초 만에 트럭 한 대가 개 박살이 난다.

투투투투투투투투!!!

하지만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 뒤에, 또 그 뒤에 트럭으로 총구를 옮겼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총구다.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반동이다.

놈들이 죽인 무고한 인간, 우는 아이, 불타는 시체가 눈앞을 빠르게 점멸했다.

나는 그 한을 고스란히 담아 빗발치는 납탄 위에 모두 실어 보내주었다.

콰아아아앙!!

트럭이 폭발한다. 폭발은 연쇄적으로 터져 차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에에에에에에엥 - - - -!!

그러자 강릉 시청에선 서치라이트들이 빗발치며 대대적인 공습 사이렌이 울려왔다.

텅!

“출발해!”

차 보닛을 내리쳤다.

주변에 엄폐하고 있던 일행들은 기다렸다는 듯 올라타 트럭을 다시 출발시켰다.

끼기기기긱!

차도 위에 거친 스키드마크를 남기며 엔진 소리를 우렁차게 뿜어내는 픽업트럭.

우리는 어느새 버스터미널 역을 지나 강릉 시청으로 정면 돌진하고 있었다.

막, 막아!

적이다! 적이 온다!

시청을 지키는 방어 인력이 모래주머니를 쌓아둔 시청 입구 우르르 몰려온다.

투투투투투투투투투!!

하지만 엄폐물도, 바리케이드도, 중기관총에 모두 갈려 펑펑 터져나갔다.

끼이익!

시청 입구를 쑥대밭으로 만든 픽업트럭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잠시 멈춘다.

“퇴각할까요!?”

“잠깐!”

보급 트럭 세 대를 터트린 건 좋은데 놈들 본거지를 보고 있자니 더 욕심이 난다.

빠르게 치고 나오면 되지 않을까.

여기서 아예 치명적인 타격을 주면 기울어진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정구 씨! 위치 바꿔요!”

나는 재빨리 짐칸에서 내렸고 다음 사수가 되어줄 김정구와 자리를 바꿨다.

“계속 주변 돌아!”

“어쩌시려고요!”

“5분 뒤! 5분 뒤 여기로!”

“형님! 형님!!!”

만류하는 경태를 뿌리치고 재빨리 개판이 된 시청 입구를 빠르게 지나쳤다.

그사이 장전을 끝낸 김정구는 이번에는 본건물을 향해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투투투투투투투 - - -!!

폭발, 총성, 소음, 비명! 온갖 혼돈이 빗발치는 전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떠오르는 전쟁의 악몽은 도리어 내게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뭐, 뭐야! 여기 적이다!”

“빨리 본대로 무전······!”

드르륵! 드르륵!

시끄럽다. 도망치려는 KLF 단원 등판을 향해 연사로 열심히 갈겨주었다.

그리고 무전기마저 박살을 내준 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살폈다.

‘수류탄.’

이 새끼들 그래도 전투 인원이라고 수류탄을 두 개씩이나 가지고 있다.

나는 수류탄이 달린 탄띠 멜빵을 통째로 뺏어 들고 시청 주차장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적재를 끝낸 트럭과 함께 KLF의 보급 물자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이건 못 참는다.

나는 총알과 폭발이 빗발치는 전장 한가운데를 눈이 돌아간 사냥개처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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