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31화
늘 그래왔다.
실전 상황에만 돌입하면 모든 감각이 잘 깎인 연필처럼 뾰족해진다.
중대장 말로는 그것이 본디 인간의 두려움이라 하여 쓰면 쓸수록 닳는다고 하는데,
나는 매해, 매달, 매번 치루는 전쟁에서 단 한 번도 이 감각을 놓친 적이 없다.
제대 후 생각해보니.
타고난 겁쟁이가 아닌가 싶다.
피잉!
머리 바로 옆으로 총알이 지나간다.
몸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추고 가장 가까운 엄폐물을 향해 미끄러진다.
파바박!
적이 발사한 총알이 콘크리트 엄폐물에 박히며 먼지를 일으킨다.
총성, 방향, 궤적.
순식간에 적의 위치를 가늠한 나는 반대쪽 엄폐물로 총구를 내밀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황급히 트럭으로 달려가던 KLF 단원 하나가 등판이 뚫려 그대로 쓰러진다.
푸우,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거칠게 내뱉고 다시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찰칵, 핑!
수류탄 안전핀을 뽑고 클립을 날렸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트럭 밑으로 굴리듯이 던진 뒤 잽싸게 반대편으로 뛰었다.
콰아앙!
이크, 하부만 날려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더 큰 폭발이 일어났다.
졸지에 함께 날아갈 뻔한 나는 주섬주섬 또 다른 수류탄을 꺼내려고 했다.
아니, 잠깐. 얘들 탄약 적재 중이었지?
굳이 하나하나 날릴 필요가 있을까. 이번에는 아예 수류탄을 꾸러미 채로 꺼냈다.
핑!
그리고 핀을 하나만 뽑은 뒤 저 멀리 트럭이 밀집된 장소로 힘껏 던졌다.
이제 슬슬 돌아갈 타이밍인데 아까만큼만 폭발이 일어나줬으면 좋겠다.
수류탄이 날아간 자리를 짧게 지켜본 나는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 - - - !!!
“우와아악!”
그런데 그 순간 엄청난 폭발과 함께 몸이 부웅 떠서 앞으로 날아갔다.
나는 잽싸게 머리를 팔로 감았고 한 바퀴, 두 바퀴를 굴러 무사히 착지한다.
깜짝 놀라 폭발이 일어난 쪽을 보니 트럭은 물론 그 일대가 날아가 있었다.
어어? 왜! 왜 그래!?
콰아앙!
쾅! 콰아아앙!
연쇄 폭발이 시작되었다.
트럭과 트럭, 강릉 시청까지 이어지는 물자들이 도미노처럼 터져나갔다.
“시발!”
깜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줬으면 하는 바람과는 달리 폭발은 기어코 시청까지 집어삼켰다.
쿠르르르릉!!
건물 콘크리트가 무너진다.
밖으로 뛰쳐나오던 KLF 단원들은 폭발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마지막 피날레는 적재 중인 박격포탄이 터지며 일대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콰아아앙!
삐이이이이이이 - -!
“큭!”
폭음이 어찌나 큰지 황급히 귀를 막고 엎드렸음에도 거센 이명이 머리를 울린다.
나는 몸을 웅크려 날아오는 콘크리트 조각과 흙먼지를 힘겹게 버텨냈다.
“쿨럭!”
그렇게 한 10초가량이 지났을까. 살며시 실눈을 떠보니 세상이 완전히 붉다.
시청 건물은 아예 폐허로 변했고 폭발로 생겨난 화재가 일대를 뒤엎은 탓이다.
이게 다 얼마야.
지금 날려 먹은 물자와 탄약만 해도 희망 아파트 다섯 개는 더 사겠다.
훌륭한 작전 성과에도 웃지 못한 나는 입으로 들어온 먼지를 뱉으며 일어났다.
어쨌거나 성공적으로 본거지를 날렸으니 일행들과 합류해 돌아가면 끝이다.
나는 아까 넘어지다가 다친 오른 다리를 비틀거리며 정문으로 나아가려 했다.
“- - - - - - -!!”
그런데 그 순간 다급한 구둣발 소리와 함께 정문으로 도망치려는 적을 발견했다.
KLF 간부로 보이는 한 명과 단원 셋.
그들은 사라진 본거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녹색 ‘보관함’을 낑낑 옮기고 있었다.
중요한 물건인 것이 뻔히 보이지 않는가. 나는 뛰어가던 와중 잽싸게 총을 쐈다.
타앙! 탕탕탕!
“끄아아악!”
좌우로 한 번 긁어주니 보관함을 옮기던 KLF 단원 둘이 힘없이 쓰러진다.
그러자 얼굴이 하얗게 질린 간부는 마지막으로 남은 부하를 떠밀며 다급히 외쳤다.
“막아! 뭐, 뭐해! 막으라고!”
타앙!
안타깝게도 얼떨결에 떠밀린 부하 또한 총알 한 발에 허무히 쓰러지고 말았다.
혼자 남았다.
히익! 기겁한 간부는 허겁지겁 권총을 뽑아 되는대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탕! 탕탕탕! 탕!
하지만 권총은 평소 장식으로만 들고 다녔는지 탄은 근처로 날아오지도 않는다.
병신, 뭐 하는 놈이야. 작게 혀를 찬 나는 허벅지에 총알 한 발을 놔주었다.
탕! 탕!
끄아아악!
놈이 비명과 함께 쓰러진다.
나는 떨어진 권총을 저 멀리 걷어찬 뒤 심문하기 위해 이마로 총구를 겨눴다.
“어? 야! 야 시발!”
까득!
하지만 무언가를 물어보기도 전 표정을 기괴하게 일그러트린 놈이 이를 씹었다.
까득?
어금니 안쪽? 설마 청산가리?
기겁한 나는 강제로 입을 벌리려고 했지만, 놈은 곧 입에 거품을 물며 죽고 만다.
끄르르륵.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질렸다. 도대체 저 물건이 뭐라고 스스로 멸구까지 하나.
나는 시체들 사이에 놓인 초록색 보관함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외형을 살폈다.
‘뭐지?“
비밀번호와 키 카드까지 필요한 1급 보안 장치에 반영구 동결 기능이 달려있다.
다만 중요도를 높이는 외형과는 달리 자세한 명칭은 그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았다.
빠아앙! 빵!
“형님!”
마침 맹활약을 한 픽업트럭이 나를 데려오기 위해 입구 앞까지 달려왔다.
에라이, 모르겠다.
일단 중요한 거 같으니 챙기자.
나는 놈들이 가지고 있던 보관함을 챙긴 뒤 일행들이 기다리는 정문으로 달려갔다.
덜컹!
“형님! 진짜 미치셨어요!?”
그러자 갑자기 얼굴 살이 쪽 빠진 이경태가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하긴 살면서 트럭 수십 대를 전복시키고 건물을 폭파해볼 경험이 얼마나 있겠니.
“허허, 난 신경 쓰지 마쇼.”
첫 임무부터 개고생한 김정구 씨는 이미 짐칸에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래도 일행들 도움 덕분에 KLF 놈들 본거지를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었다.
나는 고생한 경태와 김정구를 향해 감사를 표한 뒤 차량에 탑승하려 했다.
“으읍, 읍.”
그런데 차량 옆 길바닥에는 웬 KLF 단원 한 명이 포박된 채 쓰러져 있었다.
“얘는 뭐냐?”
“아, 그게······.”
“항복한 놈입니다. KLF에 억지로 붙잡혀왔다길래 일단 죽이지 않고 잡아뒀어요.”
보아하니 나이도 어리고 키도 작은 게 확실히 죽이기 난감한 구석이 있다.
이를 증명하듯 경태와 김정구 씨는 복잡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긁적인다.
아직 말랑말랑하시네들. 한숨을 쉰 나는 그냥 직접 처리하기 위해 총을 뽑았다.
탕탕탕! 탕탕!
“- - - - - -!!”
그런데 그 순간 놈이 묶여 있던 차량 옆에서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다 함께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다름 아닌 이하나가 권총을 들고 있었다.
그녀가 포로를 쏴 죽인 것이다.
“허억, 허억.”
거친 숨, 흔들리는 동공. 하지만 일그러진 표정에서 처참한 증오가 묻어있다.
나는 살며시 다가가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그녀의 권총을 뺏었다.
“진정하시고.”
“아!”
이하나는 깜짝 놀란다.
이성이 돌아오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뒤늦게 인지한 것이다.
“아, 아아! 죄송······.”
“잘 보세요.”
하지만 나는 그녀를 질책하는 대신 뺏은 권총을 보여주며 안전장치를 걸었다.
“쏘고 난 다음에는 항상 안전장치를 걸어두셔야 합니다. 총구는 절대 아군 쪽으로 돌리지 마시고요. 제 말 이해되시죠?”
“네, 네에.”
“그리고 방금 같은 상황은 급소를 노려서 딱 한 발만 쏘세요. 그게 탄약도 아끼고, 소음도 덜 유발해서 좋아요.”
그녀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안전장치를 건 권총을 홀더 속에 손수 넣어준 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하나하나 배우는 겁니다.”
누구나 말하지 못할 아픔 하나쯤은 달고 사는 게 바로 이 세상이다.
하지만 아무리 좆같더라도 본인이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매몰될 필요는 없다.
인생에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갑시다.”
우리는 그렇게 불타오르는 강릉 시청을 지나쳐 희망 아파트로 향했다.
라디오를 대신해 튼 차량 오디오에선 크리스마스 캐럴이 조용히 울렸다.
* * *
희망 요새에 들러 이하나를 내려주고 필요한 물자와 탄약을 재보급받았다.
그리고 해가 뜨는 대로 다시 출발해 격전지로 예상되는 교차로에 도착했다.
적은 어디 있지?
강릉항은 도착했나?
우리는 언제든지 싸울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 총에 탄알집을 끼워 넣었다.
“조용하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난날 들려왔던 폭음이 무색하게 일대는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폴리텍대 요새로 무전을 보내보았다.
[어? 동장님? 동장님이세요? 어젯밤부터 연락이 안 돼서 놀랐잖아요······!]
“저희 여기 근처입니다. 근데 무슨 일 있습니까? 주변에 아무것도 안 보이네요.”
[앗, 모르셨어요? 어제 새벽에 KLF 본대 모두 후방으로 퇴각했어요!]
아니, 미친놈들처럼 몰려오던 KLF 놈들이 갑자기 퇴각이라니 무슨 일이야.
나는 자세한 건 만나서 알려주겠다는 말에 즉각 폴리텍대 요새로 향했다.
부르르릉.
바리케이드와 잔해와 시체들이 널려있는 차도를 지나 요새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반쯤 부서진 정문과 함께 그을린 콘크리트 장벽이 시야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동장님!”
반가운 얼굴이다.
바깥에서 사람들을 지휘하던 가은 씨가 환한 얼굴로 다가와 우리를 반겨주었다.
“드디어 왔구먼!”
그 옆에는 잔뜩 흥분한 강릉항 회장 김춘식과 그의 조카 김태식이 함께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KLF는 또 어디 갔고요.”
“그건 우리가 물어봐야지! 자네들 어젯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닌 건가!”
무슨 짓이라니. 그냥 빈집 털려고 갔다가 뭣 모르고 빈집을 터트린 게 다다.
아니, 잠깐만. 설마 이것들 후방이 공격당했다고 우르르 퇴각한 거야?
“어젯밤 시청 날려버린 거 동장님이 하실 일 맞죠? 그쵸? 여기서도 폭발이 보일 정도였다니까요!”
“예에. 뭐.”
가은 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환하게 웃었고 김춘식 또한 호탕하게 웃는다.
“설마 겁대가리 없이 본거지를 칠 줄이야! 젊은 게 이래서 좋다는 거야!”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거 보셨어야 하는데. 하아, 속이 얼마나 시원하던지.”
일시적으로 보급이나 끊으려고 했던 일이 설마 이런 파급을 불러올 줄이야.
물론 놈들의 퇴각이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일단 근엄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다 계획에 있었습니다.”
“역시······!!”
경태와 정구 씨가 나를 조용히 노려본다.
뭐, 어쩔 건데. 진짜 내가 했다는데.
그렇게 두 요새와 합류하게 된 우리는 본격적으로 전장 상황을 이야기했다.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입니까?”
“일단 무장 버스는 전부 날아갔고 전투 인력도 반절 이상 이탈했어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네요.”
“으음, 아냐. 이 정도면 처자는 할 만큼 했지. 다른 나머지는 우리한테 맡겨.”
우리가 벌인 작전 공작으로 한쪽으로 기울었던 무게추가 조금은 맞춰진 기분이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고 여겼는지 김춘식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그게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문제가 있는지 가만히 있던 김태식이 조용히 껴들었다.
“뭐야, 또.”
“아산 병원은 그래도 협력하려는 눈치인데 산업 단지 쪽에선 계속 이상한 딴지를 걸어옵니다. 이놈들 낌새가 아무래도······.”
“떨어질 떡고물이 탐나는 모양이군.”
김춘식은 안 봐도 뻔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내게 말해주었다.
“그쪽에 노조장이라고 욕심 많은 새끼가 하나 있어. KLF가 조금 만만해 보인다 싶으니까, 주도권을 가지고 오려는 모양이야.”
“이 상황에서요?”
“쯧, 드디어 뇌까지 지방이 낀 거지. 그래서 그쪽에서 요구하는 게 뭔데?”
“예. 요새 대표끼리 모이자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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