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32화
따지고 보면 급조된 동맹이 맞긴 하다.
외부의 적을 막아야 한다는 이해관계 덕분에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이지,
공식적인 서한이 오간 것도, 우리 이제 동맹이요,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설마 한시가 급한 상황에 지도자 회의를 열자고 요구할 줄은 몰랐다.
김춘식은 침을 뱉으며 으르렁거렸다.
“명목상 연합 결성이지, 속내는 이권 다툼이나 다름없어. 퉤! 돼지 같은 새끼들.”
“상황을 주도하고 싶은 거죠. 그래야 본인들이 얻을 수 있는 게 많으니까요.”
“뭘 그리 탐내는 겁니까?”
“산업 단지 요새가 원래 고질적인 화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거든요. 아마 KLF가 가지고 있던 무기들이 탐이 난 모양이에요.”
아니, 전쟁은 지금 한참 진행 중인데 아직 떨어지지도 않은 떡이나 바라보고 있다?
하여튼 서울이나 강릉이나 판을 망치는 새끼들은 질량보존처럼 유지되는구나.
나는 마치 더러운 것을 봤다는 듯 김춘식을 따라 가래침을 퉤 뱉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하지만 문제는 내세운 명분이 꽤 그럴싸해 우리 쪽에서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함께 하자고. 이왕 연합을 결성할 거 제대로 해보겠다는데 또 뭐라 하겠는가.
속내가 뻔히 보이긴 해도 산업 단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일단 만나보기라도 하죠. 적어도 아산병원만큼은 저희 쪽으로 끌어와야 하니까요.”
“동의하네. 워낙 눈치를 보는 곳이라 확신이 필요할 거야. 가은 양은 함께 갈 텐가?”
“아뇨, 저는 위임할게요.”
“으음, 그럼 나도 자리를 지켜야겠구먼. 우리 쪽에선 김태식이 대신 할 거야.”
아무래도 일을 벌인 것이 희망 요새이다 보니 권한을 자연스럽게 일임하는 분위기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악수까지 한 김춘식과 김태식은 작전 막사를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째 쉴 틈이 없다. 순간 피곤이 몰려온 나는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나가려 했다.
“동장님.”
그런데 김가은이 나를 불러세웠다.
“예?”
“잠깐 걸으실래요?”
딱 봐도 할 말이 있는 분위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막 밖을 나왔다.
그리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김가은과 함께 폴리텍대 요새 주변을 산책했다.
“좀 어수선하죠?”
활력이 넘치던 대학 건물은 어디 가고 오직 교전의 흔적만이 가득한 내부.
요새 곳곳에는 밤새 놈들과 싸우느라 지친 생존자들이 천막 안에 누워있었다.
그 모습을 슬픈 얼굴로 바라보던 김가은은 코를 훌쩍이며 내게 말했다.
“아마 요새는 해체될 거 같아요.”
“예?”
“어제 주민 회의를 통해 결정됐어요. 다들 가망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나 봐요.”
저번 테러로 인구수도 많이 줄었고 그동안 저장해두었던 물자도 상당수 소진했다.
물론 강릉항이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했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어쩔 수 없다.
여기 있는 것만으로 감염체가 된 가족이 생각날 텐데 남은 삶을 버틸 수 있을까.
어쩌면 폴리텍대 요새 해체는 처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면목이 없네요.”
“에이, 그런 소리 마세요. 동장님 아니었으면 저도, 사람들도 여기 없었어요.”
거기까지 말한 김가은은 걸음을 멈췄다.
나와 그녀는 어느새 지난 격전의 흔적이 남은 대학 본부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동장님.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부탁 말입니까?”
“네.”
김가은은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아보니 요새 정문을 열 때 쓰는 그 열쇠였다.
“이걸 왜······.”
“다들 요새를 해체하는 건 찬성인데 어디로 이주해야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괜찮은 곳을 하나 추천해드렸더니 다들 따라오시기로 했어요.”
잠깐! 김가은을 따라온다고?
그녀가 어떤 부탁을 하려는지 눈치챈 나는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설, 설마 희망 요새로 이주하시는 겁니까? 아니, 강릉항 같은 곳도 있는데······.”
“거긴 동장님이 안 계시잖아요.”
그러면 안 되지! 평생을 살게 될 요새를 사람 하나 때문에 결정한다니.
아무리 내가 양심이 없이 살았어도 그렇지 이건 차마 허락하지 못하겠다.
꾹.
하지만 김가은은 열쇠를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 민폐에요?”
“그건 아닌데.”
가뜩이나 인구가 부족한 희망 요새에 실전 경험과 기술력을 갖춘 이주민이 온다.
이건 민폐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쪽에서 무릎 꿇고 부탁해야 할 일이다.
나는 얼떨떨하다 못해 기뻐해야 하는지, 방방 뛰어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자 가슴이 벅차오르는 웃음을 작게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만약 이걸 보시면 기뻐하실지 아니면 의외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왜 요새 이름을 희망 아파트로 지었는지는 알겠네요.
나는 조금씩 변해가는 스스로가 어색하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부정해도,
책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 * *
“올려보세요.”
“끄응.”
“이제 내려보세요.”
“푸우우.”
한참 어깨 관절과 팔꿈치를 살피던 차지철은 안경을 추켜 올리며 물었다.
“복무하실 때 다치신 곳이죠?”
“네. 수술도 2번 했습니다.”
당시 총알이 어깨뼈를 관통하고 폭탄 파편에 팔꿈치가 너덜너덜해졌었다.
그걸 또 계속 굴려 먹겠다고 서울 요새 최고 의사를 가져다가 고쳐놓았는데,
어째 무리한 날만 되면 경련이 올만큼 아파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 뭡니까?”
“치료받으시면서 푹 쉬셔야 합니다.”
쓰읍, 그렇게 원론적인 결론을 내리면 환자는 담당 의사를 신뢰할 수 없겠는걸?
뜀박질 그만해라, 총 그만 쏴라. 하도 잔소리를 들어 이제는 와닿지도 않는다.
“진통제나 처방해주십시오.”
“동장님······.”
차지철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반 포기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주고 싶었는지 일일이 압박 붕대를 감아주었다.
“진통제 내성이 강하셔서 더 강한 걸로 처방해드렸어요. 너무 드시진 마시고요.”
한밤중에 쫓아와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어째 찡그림 한번 없이 환자를 대한다.
나는 그를 구해주기 참 잘했다고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일행들 상태를 물어보았다.
“두 사람은 어떻습니까?”
“경태는 오른쪽 갈비뼈에 금이 갔고 정구 씨 허벅지에 1도 화상을 입으셨어요. 하하 그보다 두 분 엄살이 너무 심하셔서.”
“감히 엄살? 주사 존나 아프게 놔주세요.”
나름 사리면서 싸운다고 한 나도 골골거리고 있는데 그 둘은 오죽하겠는가.
조금 무리한 감이 있는 그 둘은 당분간 요양하면서 쉬게 할 생각이었다.
“그럼 쉬십시오, 동장님.”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치료를 끝낸 차지철이 왕진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런 그를 밖까지 배웅해준 뒤 다시 할아버지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후우.”
드디어 혼자다.
아파트 옥상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살며시 안방 불을 껐다.
그리고 작은 전등만을 챙긴 채 책상 위에 놓인 책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저번에는 신세 좀 졌다!
근데 이왕 도와줄 거 앞으로 있을 위험이라도 화끈하게 알려줬으면 좋겠구나!
나는 열심히 탭댄스를 췄을 만년필을 쓰다듬은 뒤 책이 기록한 내용을 읽었다.
[예술적인 폭발이었다. 전장을 사냥개처럼 날뛴 ‘그’는 KLF 본거지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놈들은 가지고 있던 물자 대부분을 잃었고 추가적인 보급 없이 강릉 시내에 고립되고 말았다.]
내용이 조금 이상하다. 내가 알기론 KLF는 속초와 양양에서 내려온 단체다.
하지만 책은 놈들이 꼭 보급받을 최후방이 없다는 뉘앙스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작게 입맛을 다시며 내용에 집중했다.
[아무리 막강한 화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군대는 보급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남대천을 끼고 버티는 강릉항 군대와 북쪽에서 전진해오는 두 연합 요새. KLF는 혹독한 겨울 눈보라 속에서 이를 갈고 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상황과 일치한다.
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다음 편까지 집필을 끝내 둔 책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급하게 결성한 동맹은 언제나 삐거덕 소리가 나는 법. 모두가 한 마음 한뜻으로 힘을 합쳐야 하는 지금 한 ‘변절자’가 검은 속내를 숨기고 있다. ‘그’는 이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지도자 회의에 참여했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아찔해진 미간을 꾹 누른 나는 다시 한번 책 내용을 읽었다.
변절자, 검은 속내, 예상치 못한 존재가 전지적 시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대체 누구지.
정체를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
하지만 책은 가야 할 길을 알려주기만 할 뿐, 그 어떠한 힌트도 없이 집필을 끝냈다.
[다음 화 계속.]
책을 덮고 전등을 껐다.
밖에선 거친 바람 소리가 울린다.
나는 오랜만에 취하는 휴식임에도 불구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 * *
“물통은 거기다 적재하시면 됩니다.”
“야 이 개새끼야! 차 빼!”
늘 외로운 눈사람만이 서 있던 희망 요새 앞에는 웬일로 차량이 줄 서 있었다.
다름 아니라 강릉항에서 온 김태식과 자경단원이 나를 데리러 직접 온 것이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무장 차량을 무려 다섯 대나 보낸 통큰 김춘식 회장님.
덕분에 나는 히터가 뜨끈하게 켜진 좌석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물론 커피는 한 잔이 아니었다.
“이게 얼마 만에 외출이여.”
방한복으로 풀 무장한 상식 아저씨가 흐흐 웃음을 터트리며 입맛을 다셨다.
요양이 필요한 경태와 정구 씨 대신 나와 함께 지도자 회담에 가기로 한 것이다.
“좋으세요?”
“동장이 반년 내내 저 요새에만 틀어박혀 있어 봐. 가끔은 밖이 그립다니까?”
“앞으로 자주 나와야겠네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우리는 낄낄 웃으며 자경 단원한테 받은 담배를 사이좋게 나눠 피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사실 상식 아저씨를 데려온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수상해 보이는 놈만 찾아내라 이거지?”
“네. 느낌이 좀 싸하다 싶은 놈.”
경비원으로 살아온 삶의 연륜인지 아니면 정말 타고난 육감인지는 몰라도
상식 아저씨의 사람 보는 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오죽하면 이런 걸 잘 믿지 않는 나조차 어느새 감탄하고 있지 않은가.
이번만큼은 추리와 확신의 영역을 넘어 상식 아저씨의 감각이 조금 필요했다.
덜컹!
그렇게 둘이 쑥덕거리고 있는데 운전석과 보조석이 동시에 열리면 사람이 탔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오! 또 뵙네요.”
운전자는 안면이 있는 고참 자경 대원이고 동승자는 다름 아닌 김태식이다.
뿔테 안경을 고쳐 쓴 그는 여전히 사무적인 얼굴로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예에.”
“약속 장소까지는 30분 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호되게 당한 이후 태도가 바뀌기는 했는데 내 눈에는 거기서 거기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김태식의 뒤통수를 노려보다 이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저 사람 어때요?’
‘저 안경잡이?’
상식 아저씨는 덥수룩한 턱수염을 문질문질 긁으며 백미러 속 그를 관찰했다.
그리고 잠시 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뻐끔뻐끔 입 모양으로 답했다.
‘깐깐하고, 의심 많고, 재수가 없는디?’
어떻게 알았지?
역시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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