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33화
이동 시간 짬짬이 정보나 모을 겸 강릉 토박이 상식 아저씨한테 수업을 들었다.
“산업 단지 그 짝은 원래 공장 연구원들이랑 가족들이 살던 곳이었어. 근데 한 5년 전인가부터 요새 주인이 바뀌더니 좀 질 안 좋은 생존자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라고.”
“약탈자 같은?”
“에이, 약탈자까지는 아니고.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냥 좀 껄렁껄렁하고 사고 많이 일으키는? 강릉 요새 중 인구가 제일 많은디, 주변 인식은 제일 안 좋아.”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고참 자경 대원이 피식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조금 무법자들 같은 놈들이죠. 강릉항은 산업 단지 출신이나 캐러밴이라 그러면 요새 출입도 잘 안 시켜주는 편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예. 들어와서 사고 칠 게 뻔하니까요. 아주 강력 범죄만 아니지, 기회만 생기면 다 해 처먹으려 하는 양아치 놈들입니다.”
그러니까 아예 대놓고 쓰레기들인 약탈자들과 무고한 생존자 사이라는 건가.
그런 놈들 주제에 인구수가 가장 많다니 이번 회담이 어떨지 참 기대가 된다.
“아산 병원은요?”
“거긴 반대로 중립 구역 같은 느낌이지. 조금 큰 수술이 필요하다 싶으면 바리바리 싸 들고 다 거기로 가니까 말이여.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네. 그쪽은 뭐 아는 거 없나?”
“글쎄요. 병원장이 2년 전에 돌아가신 거 말고는 별다른 소식이 없습니다. 사실 이번에 응답한 것도 조금 의외였습니다.”
지도상 아산 병원과 산업 단지와의 거리는 불과 2km도 되지 않는다.
그 좁은 구역에 성향이 극과 극인 요새가 공존한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나는 가만히 팔짱을 낀 채 조금 전 들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계속 되새김질했다.
“- - - - - -?”
그런데 등받이에 등을 기댄 그 순간 알 수 없는 찌릿함이 피부를 핥고 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고 이내 희뿌옇던 창밖을 재빨리 살폈다.
마침 트럭 행렬은 양옆이 산이었던 길을 빠져나와 탁 트인 곳에 노출되었다.
잔뜩 몸을 웅크린 감각.
죽음의 순간을 넘고 또 넘었던 생존 본능이 무언가를 강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잠깐······!”
나는 다급히 차를 정지하라 외치려 했다.
타앙-!
삐이이이이이 - - -!
콰직!
쨍그랑!
그 순간 나지막이 울리는 총성과 함께 운전석 유리창이 깨지며 붉은 피가 튀긴다.
한참 같이 수다를 떨던 고참 자경 대원은 피를 흘렸고 이내 핸들이 옆으로 돌아간다.
끼이이익!
나는 곧바로 상식 아저씨의 고개를 숙이게 한 뒤 안전띠를 꽉 움켜잡았다.
쾅!
차는 우로 한 번, 좌로 한 번, 미끄러지다 이내 눈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은 나는 몰려오는 이명을 해치며 황급히 상황을 파악했다.
타앙!
타앙!
쨍그랑!
콰직!
갑작스러운 기습에 급제동한 나머지 트럭도 벌써 같은 각에서 저격당하고 있다.
뭉쳐서 엄폐물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거리를 조금 둔 채 정차한 트럭들.
나는 이를 악물며 사격 각이 나오는 왼쪽을 피해 반대편인 오른쪽 문을 열었다.
“오른쪽으로 내려요!”
먼저 차에서 내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식 아저씨를 끌어내렸다.
마찬가지로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된 김태식 또한 허겁지겁 차에서 내려 엄폐한다.
철컥!
나는 다급히 총을 꺼내 노리쇠를 당기고 엄폐물 밖을 힐끔 살펴보았다.
피융!
그러자 적 저격수는 기다렸다는 듯 총을 쏴 고개를 살짝 내민 나를 맞추려고 했다.
눈보라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안 보이는 상황이다. 근데 여기를 어떻게 보는 거야.
시발!
터져 나오는 욕설을 가까스로 참는다.
“끄르륵, 끅.”
그런데 하필 피격당했던 운전석 쪽에서 피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즉사 한 줄 알았던 고참 자경 대원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질질 새어 나오는 피, 간절한 눈빛.
자경 대원은 피투성이 손을 내게 뻗으며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범석아!’
과거 기억이 오버랩된다.
두 눈을 크게 뜬 나는 엄폐물을 빠져나와 차량 운전석으로 재빨리 손을 뻗었다.
“엄호해! 빨리 엄호하라고!”
깜짝 놀란 김태식이 재촉하자 나머지 자경 대원이 눈보라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기관총과 자동소총들이 불을 뿜는다.
투두두두두두 - - -!
피융! 탕탕! 탕!
나는 그사이 안전띠를 자르고 피를 흘리는 자경 대원을 운전석에서 끌어내렸다.
피융!
총알이 머리 바로 옆을 스친다.
순간 볼이 불로 지진 듯 화끈해졌지만, 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털썩!
엄폐물로 자경 대원을 끌고 왔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상식 아저씨가 허겁지겁 기어와 그의 상처를 살폈다.
“방탄복 벗겨봐!”
아무리 방탄복을 입고 있었다고 해도 고위력 소총탄이 날아와 박힌 상황이다.
우린 황급히 방탄복을 벗겼고 파편이 박혀 들어간 부위를 황급히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마침 김태식이 의료 키트를 가지고 왔고 나는 총상에 붕대를 쑤셔 넣었다.
일단 출혈만 잡자
하지만 계속 오버랩되는 과거 기억 때문인지 미세한 손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비켜봐!”
보다 못한 상식 아저씨가 옆으로 끼어들어 대신 응급치료를 시작했다.
어느새 손이 피범벅이다.
나는 땀인지 눈인지 모를 액체를 핏물로 쓸어내리며 차갑게 마음을 식혔다.
타앙! 탕!
피융!
물론 저격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신나게 방아쇠를 당기며 사상자를 만들고 있었다.
적은 우리가 보이고, 우리는 적의 위치조차 확인할 수 없는 최악의 고립 상황.
나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가방에서 붉은 조명탄을 차량에 긁어 연소시켰다.
푸슉!
화르르르륵!
그리고 조심스럽게 엄폐물 옆으로 던진 뒤 적 저격수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피융!
팍!
아니나 다를까, 붉은 조명탄이 타오르는 곳으로 총탄이 날아와 박혔다.
긴가민가하겠지. 열화상 스코프로 볼 때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빛일 테니까.
“이 새끼 열화상 스코프입니다.”
“예? 정말입니까?”
“빨리 처리하고 후송해야 합니다. 제가 신호하면 총성 방향으로 일제 사격하세요.”
“어, 어쩌시려고······.”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우리다.
지원도, 폭격, 공습도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선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치이익!
거기까지 말한 나는 눈 속에 처박힌 트럭 아래로 조명탄 몇 개를 집어 던졌다.
그리고 포복 자세를 취한 뒤 차량 하부로 기어서 들어가 누워 쏴 자세를 취한다.
차량 자체에도 열이 있고,
흩뿌려둔 조명탄에서 열이 발생 중이다.
나는 도리어 취약점이었던 열 속에 숨어 김태식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쏴!”
투두두두두두두!
드르륵! 드르륵!
엄폐물에 숨어 있던 모든 인원이 한 지점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타앙! 탕!
적 저격수는 콧방귀를 뀌듯 눈보라 속에 몸을 숨겨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아마추어 새끼.’
저격한다고 까불었으면 적어도 300m 이상은 거리를 벌리거나, 총구 화염을 없앨 수 있는 수단이라도 끼고 왔어야지.
반짝.
나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에서 놈의 것으로 보이는 미세한 총구 화염을 발견했다.
끼릭.
기계식 조준기에 이를 담는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겨 침묵을 불러올 노크를 한다.
타앙 - - -!!
총성이 울린다.
눈보라 속 총성이 멎는다.
엄호 사격을 가해주던 자경 대원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8시 방향 언덕입니다.”
“예, 예! 뭐해, 안 가고!”
내가 저격 위치를 알려주자 길가를 빠져나온 트럭이 황급히 언덕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한 5분 정도가 지났을까, 무전을 통해 자경 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망 확인했습니다!]
이에 김태식은 안경이 흘러내렸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얼굴로 내게 물어보았다.
“이게 맨눈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응애응애 울던 신병들도 한 두어 달 구르면 밥 먹듯이 하는 게 이 짓이다.
사람 쏘는 기술이 뭐 대단하다고.
나는 손을 휘적인 뒤 정신을 잃은 고참 자경 대원을 태워 이 지역을 벗어났다.
지금은 사람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
* * *
‘KLF.’
자경 대원들이 확보해온 저격수 시체를 살펴보니 KLF 수첩이 발견되었다.
뭐 이 지랄을 할 사람이야 그놈들 말고는 없다지만, 타이밍이 무척 공교롭다.
하필 그 길, 그 시간, 그 순간에 이 추운 눈보라 속에서 매복하고 있었다니,
이 모든 걸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의심 가는 부분이 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아산 병원이 제공한 병실 천막에 가만히 앉아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펄럭!
“동장님.”
“여기 있었구먼.”
그런데 그 순간 내가 쉬고 있던 천막으로 김태식과 상식 아저씨가 함께 들어왔다.
“어떻습니까?”
“수술 무사히 끝났습니다. 다른 대원들도 가벼운 부상이라 별 이상 없고요.”
다행이다. 출혈을 막은 게 도움이 되었는지 고참 자경 대원은 목숨을 건졌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푹신한 병실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른데 뻣뻣한 자세로 서 있던 김태식이 내 앞으로 다가와 대뜸 고개를 숙였다.
“예?”
“동장님 아니셨으면 그 친구는 물론이고 우리 대원들 전부 거기서 죽었을 겁니다.”
왜 이래, 안 어울리게? 깜짝 놀라 바라보니 상식 아저씨가 눈가를 찡긋거렸다.
보아하니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닌 거 같고 진짜 고마워서 이러는 것 같다.
“······그리고 여태 건방진 게 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제가 그동안 머리가 굳어 사람 보는 눈이 옹졸 맞았습니다.”
의외네.
이래저래 첫인상이 별로였다고 해도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은 진짜였던 모양이다.
“그럼 이제 서로 유감없는 겁니다?”
“예,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에이, 뭐 모시기까지야.
나는 김태식과 손을 마주 잡으며 지난 오해로 쌓인 앙금을 쿨하게 풀었다.
그리고 한층 편해진 얼굴로 둥글게 서로 마주 보고 앉아 목소리를 낮췄다.
“현장 분위기는 살펴보셨습니까?”
현재 위치는 아산 병원과 산업 단지가 함께 주둔 중인 북쪽 경포호 근처다.
나보다 앞서 주둔지 분위기를 살펴봤을 상식 아저씨는 고개를 흔들었다.
“미묘혀. 다들 하나 같이 예민해서 눈깔을 부라리는 게······. 태식이도 느꼈지?”
두 분 언제 말 놓기로 했습니까?
김태식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흔들었다.
“예, 맞습니다. 특히 아산 병원 측은 아예 기가 질려있고 산업 단지 쪽도 계속 잡음이 납니다. 무리가 나뉜 거 같다고 할까.”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일단 가장 믿을 수 있는 상식 아저씨와 김태식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저쪽에서 정보가 샌 거 같습니다.”
“······정, 정보가 말입니까?”
책이 말한 변절자와 검은 속내, 그리고 보란 듯이 습격당한 나와 일행들.
사실 이런 시그널들을 보고도 내막을 짐작할 수 없다면 그건 병신이나 마찬가지다.
“누군가 KLF로 흘린 거겠죠.
그렇다면 배신자?
아저씨와 김태식은 경악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둘을 도리어 안심시키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진정하세요. 두 요새가 배신한 거였으면 저희는 여기 들어오지도 못했습니다.”
책이 나를 사지로 보낼 리가 없다.
적어도 가능한 선에서, 한 명의 ‘변절자’를 밝혀내란 뜻일 확률이 높았다.
“우리가 어쩌면 되는겨?”
“저희 쪽에서 먼저 들쑤시면 눈치챌 겁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시면서 낌새가 보인다 싶은 새끼만 말해주세요.”
괜한 섣부름은 도리어 적을 만들고 늦장 부림은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기민한 움직임이 필요하다.
“시간 됐습니다.”
시계를 보니 마침 요새 지도자 회의가 약속된 시간이 5분 앞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얼음이 낀 천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시궁창 속 쥐새끼를 찾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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