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34화
산업 단지와 아산 병원.
두 요새가 세운 주둔지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시궁창 오므라이스 같다.
나름대로 구색을 갖춘 아산 병원은 자기 영역에 콕 박혀 나오지 않고 있고,
개판 오 분 전인 산업 단지는 주둔지 전체를 아예 쓰레기촌으로 만들어 버렸다.
“······저거 마약 아녀?”
“눈 마주치지 마세요.”
곳곳에 널려있는 토사물과 분비물부터 시작해 술, 마약, 도박, 매춘과 폭력.
아주 하면 안 되는 짓들만 골라 주둔지 내부에서 보란 듯이 자행되고 있구나.
나는 이를 애써 못 본 척 지나치며 회담 주최자가 보낸 안내원을 뒤따라갔다.
“이쪽입니다.”
그곳에는 주둔지 중 유일하게 콘크리트 건물인 버려진 펜션이 한 채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모인 건물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터벅, 터벅, 터벅.
계단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 봤다.
적당히 거리를 둔 테이블에는 열댓 명쯤 사람들이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
그 누구 하나 환영하는 이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로 다가가 미리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뻐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본 한 남성이 담배 연기를 훅 내뱉으며 눈을 마주친다.
포동포동하다 못해 풍만한 몸집, 생선 내장을 칠해놓은 것 같은 썩은 이빨.
그래도 그 와중에 빛나는 금니와 금반지는 남성의 탐욕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안 물어봐도 알겠다.
이 새끼가 그 노조장이란 놈이다.
“자네가 희망 요새 동장인가?”
“뭐, 그렇지.”
대뜸 반말로 묻길래 마찬가지로 반말로 답해주었다.
그러자 노조장은 후덕한 숨을 훅 내뱉으며 미간을 찡그린다.
“······젊은 친구는 예의를 안 배웠나 보군.”
“늙은 친구가 할 말은 아닌데.”
까드득. 오른손으로 호두알을 굴리고 있던 노조장이 주먹을 꽉 움켜쥔다.
주도권을 가져가려고 했던 모양인데 안타깝게도 상대는 예의 상실자다.
나는 조용히 팔짱을 낀 채 노조장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을 살펴보았다.
‘이쪽이 아산 병원.’
병원장이 죽었다던 아산 병원 자리에는 한 젊은 남성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그는 초장부터 박살이 난 분위기를 우려하는지 무척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쪽은 산업 단지.’
그리고 산업 단지 자리에는 노조장 외에도 한 젊은 여성이 동석하고 있었다.
설마 딸인가? 놈의 파묻힌 살 속 그나마 비슷한 이목구비가 눈에 띈다.
“싸우려고 모인 겁니까?”
“크흠!”
김태식이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자 인상을 쓰고 있던 노조장이 짧게 기침한다.
그래도 산업 단지를 이끄는 지도자라고 금세 여유를 되찾는 모습이 의외였다.
“모두 어려운 시기 아닌가? 앞으로 힘 합쳐 싸워야 할 사이인데 차라도 한 잔 나눠야 하지 않나 싶어 이렇게 불렀지.”
“전쟁 중이잖습니까.”
“아암, 전쟁 중이지. 하지만 전쟁 중이라고 해서 할 일을 안 해서야 되겠나. 원래 정치라는 게 전쟁 전에 꼭 딸려오는 거니까.”
노골적이다. 김춘식을 대신해 참석한 김태식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피차 바쁜 건 마찬가지니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성급하긴.”
카악, 퉤. 담배를 비벼끈 노조장은 재떨이 위에 노란색 가래침을 뱉었다.
“싸울 무기를 공여해줬으면 좋겠군.”
“······지금 장난합니까?”
“흐으, 왜.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부탁 아닌가? 말마따나 우리가 싸우지 않아서 손해 보는 건 그쪽일 텐데 말이야.”
말 그대로다.
만약 여기서 산업 단지와 아산 병원이 후퇴하면 KLF를 향한 포위가 풀린다.
가뜩이나 보급이 끊겨 독기를 품고 있을 놈들인데 혹여나 남진하기라도 한다면,
말 그대로 강릉항과 희망 요새는 모든 걸 잃을 각오를 하고 싸워야 한다.
“내 약속하지. 무기만 넘겨받으면 최선을 다해서 KLF를 공격하겠다고 말이야.”
“2년 전에도 그리 말하고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셨죠. 혹시 잊으셨습니까?”
“과거는 과거에 묻자고.”
그렇다고 무기를 넘기기에는 노조장의 비열한 의도가 뻔히 보이는 상황.
지난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김태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표정을 굳혔다.
하, 이 돼지 새끼 봐라.
아주 칼자루를 쥐었다고 춤을 추려고 한다.
탁.
“야.”
야?
대뜸 내뱉은 호칭이 모든 시선을 모은다.
나는 그냥 시원하게 욕을 뱉었다.
“야 이 시발아.”
예의, 상식, 이딴 건 모두 집어치운 상스러운 욕 앞에 노조장이 멍해졌다.
“자네 미쳤나?”
“맨정신이면 너랑 이야기 안 했지.”
그것도 잠시 모욕만큼은 참지 못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총을 꺼내려 했다.
철컥.
하지만 나는 이미 한 발자국 앞서 놈을 향해 권총을 뽑아 겨눴다.
찰칵.
설마 총을 뽑을 줄은 몰랐다는 듯 경악하는 사람들과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놈.
나는 콜트 파이슨의 해머를 뒤로 당기며 노조장의 개수작을 조용히 경고했다.
“이 좆같은 고향 한 번 지켜보겠다고 죽어 나간 사람만 수백이야. 그런데 시발 뭐? 정치? 니들 대가리에 총알이 박혀도 그런 소리 나올까? 아니면 지금 박아줄까?”
힘겹게 적과 싸워왔던 폴리텍대 요새도, 과감한 결단을 내린 강릉항 요새도.
모두 자신이 태어난 고향, 터전을 지키기 위해 힘을 합치고 무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 대가리부터 썩어빠진 새끼들은 이 와중에도 처먹을 궁리만 하고 있다.
“감, 감히······.”
“아가리 닥쳐 이 새끼야! 다음 표적은 우리 아니었으면 어차피 너희야. 아닐 거 같지? 이대로 짐 싸 들고 강릉항에 한 번 처박혀 볼까? 그러면 KLF가 누굴 노릴 거 같아?”
이판사판이다. 놈들이 철수를 빌미로 목줄을 쥐려 한다면 우리도 봐줄 필요는 없다.
졸지에 당한 급발진이 아팠던 걸까.
노조장이 볼살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러고도 무사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장담하는데, 너 포함해서 20명은 내가 데리고 간다. 궁금하면 한 번 해보든지.”
나는 파탄이라는 서슬 퍼런 협박을 던지며 노조장과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방아쇠? 못 당길 것 같나? 나는 지랄 발광을 하는 놈을 그대로 정조준했다.
“잠시만요! 두 분 다 진정 좀 하세요!”
그 순간 잠자코 있던 노조장의 딸이 황급히 뛰쳐나와 총구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예? 아버지! 아버지도 좀 정도껏 하세요! 동장님도 제발 총 좀 내리시고요!”
“맞, 맞습니다. 진정들 하세요.”
마찬가지로 아산 병원 병원장인 남성까지 나서 필사적으로 우리를 중재한다.
동조하는 편은 아니었나 보지?
겉으로 흥분한 척 막말을 쏟아내던 나는 그 둘의 얼굴을 빠르게 관찰했다.
“동장님, 일단 진정하시죠.”
“맞아, 총 좀 집어넣어.”
그리고 성화에 못 이겨 겨누었던 총을 내리고 다시 홀더 속에 집어넣었다.
“저놈이 먼저 총을 겨눴어!”
“아버지도 처음부터 날을 세우셨잖아요! 이게 어딜 봐서 회담하는 자리에요!”
노조장과 딸이 한참 말다툼을 벌인다.
그것은 단순히 부녀지간 벌이는 싸움이라기보단 공적인 성향이 짙어 보였다.
쾅!
“빌어먹은 놈들!”
그래도 어떻게 설득이 통했는지 테이블을 박차며 나가버리는 노조장.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어깨를 으쓱하며 미간을 짚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일 여기 다시 모이시는 걸로 하시죠. 아버지. 아니, 노조장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하아, 실례가 많았습니다.”
얼굴이 수척해진 그녀는 한 차례 사과와 함께 비틀비틀 건물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아산 병원 남성도 어떻게 잡아볼 틈도 없이 그 뒤를 따라갔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펜션 내부.
나는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창문을 통해 걸어가는 두 사람을 살펴보았다.
“- - - - - - -.”
아니나 다를까, 그 둘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서더니 대화를 나누었다.
여자는 이미 울음을 터트린 것을 보아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포옹은 단순히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에 엿보고 있던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작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사귀는 겁니까? 둘이?”
“그런 모양인디?”
상상도 못 했다. 노조장 딸과 아산 병원 병원장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니.
남 연애사만큼 재밌는 게 없다지만, 지금은 조금 난감한 걸 본 기분이다.
먼저 찔러볼 쪽이 정해졌다.
나는 병원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쪽하고 한 번 접촉해보죠.”
* * *
1차 회담이 결렬됐다는 소문이 쫙 퍼지자마자 입원해 있던 대원들이 모두 복귀했다.
그리고 주둔지와 조금 멀리 떨어진 3층짜리 건물에 베이스캠프를 새로 세웠고,
1시간마다 교대로 돌아가며 혹여나 침입과 공격은 없는지 삼엄하게 경계했다.
거치한 기관총만 4대, 숙련된 전투 인원이 자동소총까지 들고 있는 거점이다.
정말 웬만한 미친놈들이 아닌 이상 섣불리 접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박, 사박, 사박.
하지만 나는 모두가 휴식 취할 시간, 거점을 벗어나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아산 병원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조그마한 주둔지였다.
탁.
구성원 대부분이 의료진이거나 비전투 인원인 아산 병원답게 경계가 허술하다.
나는 능숙하게 담을 넘어 천막과 천막 사이를 그림자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원들이 말해준 한 하얀색 천막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르륵.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훈훈한 등유 난로 냄새와 함께 시야가 환해진다.
아산 병원 병원장, 그는 늦은 시간까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움찔!
그는 천막 틈으로 들어온 찬 바람을 읽었는지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 깜짝 놀란다.
“박, 박범석 씨?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아니,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늦은 밤에 실례합니다. 중요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습니다.”
이런 야심한 밤, 남몰래 찾아온 손님을 고운 눈으로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남성은 의외로 횡설수설하다가도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가리켰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런 야심한 밤에······. 일, 일단 여기 앉으시죠.”
수척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두고 앉았다.
“약속을 잡으셨으면 되셨을 텐데요.”
“보는 눈이 많아서요.”
회담 때 그 난리가 났는데 단둘이 만난 걸 보이면 괜히 오해만 생긴다.
나는 그가 타준 커피로 얼어붙은 손을 녹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혹시 성함이?”
“아. 오영창이라고 합니다.”
서로 가볍게 악수하자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오영창이 조용히 되물었다.
“그래서 할 이야기라는 게?”
“노조장 따님 분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푸우!
커피를 마시던 오영창이 커피를 뿜는다.
그리고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보더니 이내 조용히 언성을 낮추었다.
“어떻게······아셨습니까?”
“우연히 봤습니다.”
조심 좀 하지, 아무리 회담장이어도 공개된 장소에서 그러면 누구나 다 안다.
“두 분 사이 노조장은 알고 있습니까?”
“예.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럼 사돈지간이시겠군요.”
순간 오영창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아니요. 결혼은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왜요? 이렇게 능력이 좋으신데.”
“······따님을 무척 아끼십니다.”
하긴 회담장에서도 독불 돼지 장군인 노조장 놈을 진정시킨 건 딸이 유일하다.
딸을 끔찍하게 아낀 나머지, 다른 남자한테 보내기 싫어하는 상황인 건가?
나는 참 복잡한 가정사라는 생각에 표정이 좋지 않은 오영창을 살짝 떠보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사실 다른 용건 때문에 이렇게 찾아뵙습니다.”
“후우, 말씀하세요.”
“저희가 두 요새에 도움이 필요해서 온 건 맞지만, 적과 내통하고 있는 아군까지 전부 끌어안을 생각은 없습니다.”
적과 내통, 배신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영창이 두 눈을 크게 뜬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오면서 당했던 습격 말입니다. 사실 약탈자가 아니라 KLF였습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예. 저희가 지도자 회담에 참여한다는 정보가 어딘가에서 센 모양입니다.”
정보가 샜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 여기까지 추론해 낸 그는 표정을 굳혔다.
“그럼 혹시······.”
“저는 노조장을 의심 중입니다.”
욕심 가득하고 제 이득만 챙기는 이기적인 제안 성격.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전부 노조장을 의심하는 게 당연하다.
오영창도 마찬가지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잔뜩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 확실히 조금 이상한 구석이 많습니다. 이번 일에 유난히 욕심을 부리는 것도 그렇고, 평소 노조장 같지 않았습니다.”
“짐작 가시는 게 있습니까?”
“가끔 혼자 자리를 비울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때 정보를 흘린 것 같습니다. 혹시 저격수 몸에 무전기 같은 건 없었습니까?”
“예, 아쉽게도 없었습니다.”
그래, 그렇다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는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간신히 막았다.
이 새끼 봐라.
나는 저격수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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