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35화
박범석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오영창은 그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불안한 심정을 대변한 듯 한쪽 다리를 떨며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댄다.
“병원장님 찾으셨습니까?”
호출받고 온 경비 조장이 황급히 천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퍽!
그러자 오영창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경비 조장의 쪼인트를 까버린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듯 고통을 호소하며 몸을 뒤로 물러나는 조장.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던진 오영창의 얼굴은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천막 하나 지키는 게 그렇게 힘듭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신지······.”
“무슨 일? 외부인이 제집 드나들 듯 천막을 들락거리는데, 무슨 일이냐고요?”
만약 몰래 찾아온 박범석이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범이었으면 어쩔뻔했는가.
오영창은 한 번 더 조장의 무릎을 걷어차며 그동안 숨겨 왔던 분노를 대신 분출했다.
“경, 경비 인원이 너무 부족합니다. 고작 3명으로 교대 근무를 어떻게 합니까.”
경비 조장은 억울했다.
전대 병원장이 키워온 경비대를 감축시킨 건 오영창 본인 스스로가 아닌가?
양심이 있다면 수년째 고생만 하는 자신을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이미 망나니 그 이상으로 막 나가는 오영창에게는 하소연이 들리지 않았다.
“그럼 그만두시면 되겠네요. 댁이 앉아있는 자리, 대신할 수 있는 사람 많습니다.”
조장 자리에서 잘리고 싶냐는 협박에 아내와 어린 아들을 떠올린 경비 조장.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이 자리에서마저 해고당하면 먹고 살길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는 결국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병원장을 향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모자란 새끼.”
그렇게 경비 조장이 나가고 오영창은 그제야 안경을 고쳐 쓰며 천막 밖을 살핀다.
천막 주변 경비를 강화하라고 했으니 한동안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천막 문을 잠그고 개인 침대 아래 공간으로 손을 뻗었다.
달칵.
그 아래에는 KLF 프락치로부터 건네받은 무전기가 한 대 숨겨져 있었다.
치익.
오영창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입을 열었다.
“들리십니까?”
[연락이 늦었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박범석 그 사람, 지금 여기 주둔지에 있습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그 남자 맞습니다.”
폴리텍대와 강릉항을 연합으로 끌어들이고 한참 우세하던 전황을 뒤집은 외지인.
현재 KLF가 1순위로 찾고 있는 수배자이니 얼굴을 모르는 게 이상했다.
[들키진 않았겠지.]
“정보가 샜다는 건 눈치챈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조장 쪽을 의심 중입니다.”
[그럼 물건은? 물건은 확인했나?]
“그것까지는······.”
[젠장! 빌어먹을 쥐새끼들! 내일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붙잡고 있어! 알겠나!?]
서슬 퍼런 분노가 쏟아진다. 이에 마른침을 삼킨 오영창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정보를 팔아넘기는 대가로 아산병원과 사랑하는 약혼녀의 목숨을 보장받았다.
타인이야 어떻게 되든,
강릉이 어떻게 되든 자신이 무슨 상관인가.
이제 지긋지긋한 노조장의 간섭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다.
[그녀가 원망하지 않겠나?]
전형적인 소인배다. 여물지 않은 비열함이 마음에 들었던 강중식은 웃으며 물었다.
“······이 일은 아무도 몰라야 합니다.”
[약속하지.]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이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은 노조장의 잘못이니까.
오영창은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며 위치 수신기를 조심스럽게 켰다.
* *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산병원에서 치료받았던 모든 대원에게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저격수’라는 단어 자체를 꺼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영창은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뻔하다. 놈이 책이 말한 변절자니까.
“좀 알아보니 예전 병원장이랑은 아예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고.”
“그럼 어떻게 승계받은 겁니까?”
“노조장 딸이 애인이라서가 아닐까. 영향력이 아예 없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여.”
하긴,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운 두 요새 특성상 영향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이런 식의 승계라니 내가 만약 요새 소속이었다면 그리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 평도 그리 좋지만은 않습니다. 예산을 절감한다는 핑계로 경비대도 줄이고 복지 시설도 여럿 없앴다고 하더군요.”
“허, 절약한 예산은 어디로 갔길래.”
“개인이 착복한 걸로 추정됩니다. 세세한 것까지 비리가 안 얽혀있는 게 없네요.”
죽은 병원장만 불쌍하게 됐네. 애지중지 아껴둔 요새가 저 꼴이 되었다니.
강릉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 의료 중립 지대였던 아산병원은 점차 썩어가고 있었다.
“노조장도 한 패일까?”
“아마 아닐 겁니다. 둘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도 아니고, 노조장 입장에선 KLF에 붙는 게 오히려 손해니까 말이죠.”
“쯧, 하여튼 인간들이 아주 개성적으로 지랄들이여. 그럼 동장, 우린 어쩌지?”
“방법을 찾아봐야죠.”
한쪽은 KLF랑 붙어먹은 변절자, 한쪽은 동맹보단 이득이 먼저인 기회주의자.
졸지에 그 한가운데 놓이게 된 우리는 그 누구 하나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어떡해야 할까.
어떤 판단이 최선일까.
저울을 놓고 양쪽으로 쉼 없이 움직여보지만, 그럴싸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응?’
잠깐, 내가 왜 저울질을 하고 있지?
이거 그냥 흔들면 되는 판이잖아.
한참을 가만히 담배만 태우던 나는 순간 방법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회담은 일단 결렬시킵시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무기 줘봤자, 싸우는 시늉만 할 놈들입니다. 차라리 다른 곳에 써 먹어보죠.”
“다른 곳이라면······.”
“미끼요.”
불리한 판을 흔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패를 던질 필요가 있었다.
“회장님한테 연락해주십시오.”
* * *
날이 밝고 2차 회담이 진행되었다.
장소는 버려진 펜션 그대로, 구성원 또한 어제 모였던 인원 그대로다.
하지만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분위기가 더욱 심각하다 못해 살벌하다는 것이다.
달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한 우리는 담배 연기 속에서 서로를 노려봤다.
그러자 노조장의 딸.
아니, 오은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희가 계속 이럴수록 KLF만 이득을 보신다는 거 모르세요? 적어도 양쪽이 수긍할 수 있는 타협점은 찾아와야죠.”
“그게 어디 우리 잘못인가? 저 건방진 놈이 협조했으면 금방 끝났을 일이야.”
웃기고 있네, 저 돼지 새끼가. 나는 욕 대신 오른손을 들어 중지를 추켜 올렸다.
“이놈이!”
“아버지, 제발!”
또 한 번 터지는 극대노에 오은혜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싸움을 말렸다.
그래도 지난 밤 무슨 약속을 하기라도 했는지 노조장은 가까스로 화를 참았다.
결국, 오은혜가 대신 나섰다.
“아버지가 말을 험하게 하셔서 그렇지, 무기가 부족한 건 사실이에요. 두 요새가 참전하려면 무기 지원이 꼭 필요해요.”
우리 쪽에선 실질적 물주 김태식이 답했다.
“얼마나 말입니까?”
“연사가 가능한 총으로 100정, 그 외 탄약이나 폭발물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당신들은 양심도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
자동화기 100정이라고?
칼만 안 들었지 아주 강도다.
본인도 그걸 아는지 오은혜는 귀를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서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콧방귀를 뀌고 있는 노조장이 유일했다.
“자, 우리가 제안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기왕이면 좋게 끝내는 게 서로를 위해서도, 이 강릉을 위해서도 좋지 않겠나?”
하지만 협상의 여지가 없다. 자신들이 유리한 걸 아는 상대측에서 우리를 압박한다.
한곳으로 모이는 시선, 이죽거리는 웃음, 마치 타결을 예상하기라도 한 모습이다.
“안 해.”
하지만 나는 조용히 담배를 비벼 끄며 자신만만한 놈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뭐?”
“동맹 안 한다고, 등신아.”
노조장이 두 눈을 크게 뜬다. 오은혜도 이럴 줄 몰랐다는 듯 눈에 띄게 당황했다.
“네? 잠, 잠시만요!”
“잠시고 나발이고, 회담은 여기서 끝내. 요새 연합?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이미 말을 맞춰둔 상식 아저씨와 김태식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은혜가 직접 나서 나가려는 일행들을 말려보지만, 이미 뜻은 확고하게 섰다.
“하.”
빠드득.
이 행동이 한낱 충동이 아니라는 걸 안 노조장은 결국 쥐고 있던 호두알을 깨트렸다.
“후회할 선택을 하는군.”
“목소리 깔지 마, 씹쌔야.”
나는 그렇게 난장판이었던 회담을 끝낸 뒤 일행들과 함께 펜션을 빠져나왔다.
“이봐요!”
회담 내내 잠자코 있던 오영창이 뛰쳐나와 우리를 붙잡았다.
그는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놀랐는지 어버버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정, 정말 이대로 정말 가실 겁니까? 전쟁은 어쩌시려고요? 아니, 일단은······.”
“됐습니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나는 그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더 이상 못 해 먹겠습니다. 동맹이고 자시고 저게 인간들입니까? 저희는 새벽에 떠날 테니까, 그쪽도 잘 생각해보세요.”
뼈 있는 말로 살살 긁어주고 떠났다.
펜션 마당에 홀로 서 있는 오영창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놈의 머릿속에는 아마 우리는 떠나는 새벽, 새벽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뱀은 못 되는 녀석이구먼.”
이에 웃으며 동의를 표한 나는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명령만 하시면 됩니다.”
아마 오늘 새벽은 무척 추울 것 같았다.
* * *
주둔지 경계를 돌던 산업 단지 소속 경비병 두 명이 꿍쳐놓은 담배를 물었다.
“어휴, 이 짓도 이제 지겹다.”
“조금만 참아. 이번 회담도 결국 결렬이라는데, 곧 요새로 돌아갈 수 있겠지.”
“시발! 그러든가 말든가.”
전쟁이고 나발이고 빨리 산업 단지로 돌아가서 따뜻한 물에 몸이나 지지고 싶다.
담배를 문 경비병 하나가 주섬주섬 바지 지퍼를 열고 눈 위로 오줌을 싼다.
쪼르륵.
“흐으으.”
뭘 먹은 게 있어야 나오지 맨날 싸구려 술이나 처먹으니 오줌 빛이 누렇다.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온몸을 부르르 떤 경비병은 동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야, 불.”
“·········.”
“야 불달라고!”
새끼가 드디어 귀가 먹었나. 짜증이 몰려온 경비병은 언성을 높이며 뒤돌아봤다.
“응?”
하지만 분명 동료가 있어야 할 그 자리에는 차가운 한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끄읍!”
푹!
어둠 속에서 손이 튀어나와 입을 틀어막고 급소로 나이프를 찔러넣는다.
불과 1초 만에 숨이 끊긴 경비병은 아직 피지도 못한 담배를 툭 떨궜다.
사박, 사박, 사박.
여느 때와 같은 어두운 새벽, 한 인물이 경비병 시체를 넘어트리며 언덕을 올라왔다.
KLF 제복을 차려입은 그는 언덕 아래로 보이는 주둔지를 조용히 살피며 신호했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사박, 사박.
그러자 마찬가지로 눈 속을 헤치고 나온 수많은 KLF 단원이 능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치익.
“도착했습니다, 대령님.”
[나머지 쓰레기들은 죽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박범석 그 새끼만큼은 살려서 데려와.]
“명심하겠습니다, 충성.”
[믿고 있겠네, 부대장.]
강중식을 수년 동안 보필해온 KLF 부대장이 직접 지휘봉을 잡았다.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KLF 단원들은 지시를 따라 재빨리 주둔지를 포위한다.
척 척 설치되는 60mm 박격포. 유리한 고지마다 자리를 잡고 거치하는 기관총.
독이 바짝 오른 그들은 지시만을 기다린 채 방아쇠 위로 손가락을 올렸다.
‘빠르게 끝내야 해.’
가뜩이나 보급이 끊긴 상황에서 있는 것 없는 것 모조리 모아 여기까지 왔다.
만약 여기서 소모한 만큼 물자를 확보하지 못하면 KLF는 진짜 끝이다.
얼굴을 비장하게 굳힌 부대장이 명령했다.
“시작해.”
“쏴!”
치익, 퐁!
박격포들이 토해낸 포탄이 주둔지 바로 앞 경비 초소를 향해 날아간다.
콰아아앙 - -!!
그나마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경비 초소가 일시에 터져 폭발을 일으킨다.
고지에 거치된 기관총들은 기다렸다는 듯 주둔지를 향해 화력을 투사했다.
드르르르륵! 드르륵!
투타타타타타타 - - -!!
예광탄이 섞인 기관총 포화가 주둔지 곳곳에 천막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충 경계만 서던 인원들은 한순간에 갈려 나갔고 박격포 탄이 연이어 떨어진다.
콰아앙! 쾅!
화르륵, 펑!
“뭐, 뭐야! 적! 적이다!”
“끄아아아악!”
폭발음 듣고 잠에서 깬 산업 단지 생존자들이 하나둘 천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평화가 너무 길었던 탓일까.
그들 대부분은 금세 기관총의 표적이 되어 온몸이 벌집이 된 채 쓰러졌다.
콰아앙!
쾅!
박격포가 쉴 틈 없이 탄을 뿜는다.
KLF는 그동안 한을 청산하듯 악독하고, 또 집요하게 산업 단지 생존자를 쏴 죽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것은 피가 흥건한 시체, 주둔지가 타오르는 화마뿐.
살, 살려줘! 살려줘어어!
아아아악! 내, 내 다리!
이것은 단순히 전쟁이 아닌 인간을 일렬로 세워놓고 쏴죽이는 처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KLF의 진짜 목표는 이런 쓰레기들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A팀은 준비하고 따라와.”
“직접 가십니까?”
“내 손으로 직접 잡아야겠어.”
부대장은 대답 대신 야간 투시경을 내렸다.
마찬가지로 A팀이라 불린 KLF 정예들은 야간 투시경을 쓴 채 뒤를 밟는다.
곳곳에서 끔찍한 비명과 총성이 울리는 가운데 그들은 한 폐건물로 뛰어갔다.
탁 탁 탁 탁!
오영창이 말하길 박범석과 그 호위팀은 새벽 일찍 이곳 주둔지를 뜬다고 했었지.
그 전에 놈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던 부대장은 살벌한 눈으로 지시를 내린다.
‘진입해.’
그러자 A팀은 순식간에 건물을 포위한 뒤 1층 초소를 향해 유탄을 쐈다.
퐁!
콰아앙!
경쾌한 유탄 발사음과 함께 건물 초소가 통째로 날아가 버린다.
쨍그랑!
A팀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1층 창문을 깨트리며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취익.
하지만 그들이 마주한 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적군이 아닌 텅텅 빈 건물 내부였다.
경악, 인지부조화!
누군가 크게 외쳤다.
“내, 내부가 비었다!”
그 순간 허공에 무언가가 날아올랐다.
삐이이이이이- - -!
펑!
조명탄이다.
수많은 조명탄이 주둔지를 공격 중인 KLF 부대 위로 떠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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