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37화
톡.
톡.
톡.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링거 물방울 소리에 가라앉아있던 무의식이 들어온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가락 끝을 움직여 신경이 멀쩡한지부터 확인했다.
언제 정신을 잃었었지.
마지막 기억이 총을 쏘고 난 이후인 거로 보아 거기 그 자리에서 쓰러졌던 모양이다.
몽롱한 진통제 기운에 가까스로 눈을 뜬 나는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듯 천막 문을 열고 들어오는 차지철이었다.
“어! 일어나셨어요?”
“지철 씨?”
희망 요새에 있어야 할 사람이 뜬금없이 등장하니 무슨 일인가 싶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여러 번 병실을 들락날락했는지 가지고 온 의료품을 내려놨다.
“믿을만한 의사가 필요하다고 해서요. 이틀 전에 합류해서 쭉 체류 중입니다.”
아산 병원이 그 꼴이 나버린지라 외부에서 급히 외과 의사를 데려온 모양이다.
그래, 차지철 씨라면 믿을만하지. 나는 그제야 편안한 얼굴로 자리에 누웠다.
“느낌은 좀 어떠세요?”
“몽롱하네요.”
“아마 약 기운 때문에 그러실 거예요. 이번에는 좀 크게 다쳐서 오셨거든요.”
“이번에도 신세 지네요.”
“저 말고 다른 분들한테 고마워하세요. 그 자리에서 혈액 확보가 돼서 망정이지 긴급 수혈이고 뭐고 진짜 돌아가실뻔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모든 생존자가 천막 앞에 줄 서서 내게 줄 피를 뽑았다고 한다.
긴급 수혈이 아니었으면 진즉에 과다 출혈로 갔을 거라는데, 참 운도 좋았지.
나는 생채기가 남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살아있다는 느낌을 새삼 다시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사한가?
전쟁이 생각보다 치열해서 걱정이었다.
펄럭!
“어어, 동장! 드디어 깨어났구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오다더니 이번에는 상식 아저씨가 천막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날 밤 무장 트럭 운전병으로 가담했었던 아저씨는 오른팔에 부목을 대고 있었다.
“다치셨네요?”
“이정도야, 뭘. 다들 크고 작은 상처 하나씩 훈장처럼 달고 있는 거지.”
뿌듯한 얼굴로 오른팔을 들어 보인 상식 아저씨는 간이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래서, 몸은 좀 괜찮은겨?”
“예, 뭐. 버틸만하네요.”
“버티긴 개뿔! 동장 처음 병원 실려 갈 때 사람들이 다 죽은 줄 알았어! 어제는 회의하는데 온종일 초상집 분위기였다니까?”
“에이, 농담도.”
“진짜야! 가은이 불러서 물어봐!?”
“됐고, 상황이나 설명해줘요.”
그렇게 한참 호들갑을 떨던 상식 아저씨는 헛기침과 함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작전이 생각보다 잘 먹혀서 별 이변 없이 끝났어. 근데 막판에 자폭했던 놈들 알지? 그 새끼들 때문에 사상자가 조금 많아.”
도대체 세뇌를 얼마나 했기에 동료가 있는 바로 옆에서 수류탄을 깐단 말인가.
아마 나도 당했던 그 자폭 공격이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일단 경포호 근처에 주둔지를 새로 차려서 부상자들 치료부터 하고 있어.”
“잘하셨네요. 오영창 신변은요?”
“어어, 당연히 잡았지. 살려서만 데려오랬더니 아주 양다리를 분질러놨더라고.”
요새 지도자가 요새를 팔아먹은 것도 모자라, 강릉 전역을 위험에 빠트릴뻔했다.
양다리? 아마 사지랑 목을 분질러놔도 다들 업보라고 손뼉을 쳤을 것이다.
“동장. 그, 산업 단지 있잖여.”
“예, 피해가 꽤 크죠?”
“피해가 큰 건 당연하고. 노조장 딸 오은혜 알지? 그 여자 죽었어.”
“······어쩌다가요?”
“그 난리 통에 노조장 딸이라고 무사하겠어? 천막 위로 박격포가 떨어졌다나 봐. 노조장 그 양반은 완전히 정신을 놨고, 산업 단지 요새는 뿔뿔이 흩어지는 모양이야.”
참 운명의 신도 얄궂지, 어떻게 모든 걸 안다는 듯이 그녀를 죽게 했을까.
노조장과 오영창 두 사람 모두. 마치 대가라도 치르듯 소중한 이를 잃게 되었다.
그렇게 약 한 시간가량 시끄럽게 떠든 상식 아저씨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하여튼, 잘 쉬고 있으라고.”
“어디 가세요?”
“일해야지! 말년에 조금 쉬나 했더니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더 바빠지는 거 같아.”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상식 아저씨 얼굴에는 환한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한 차례 격전 후 찾아온 강릉의 평화, 때아닌 봄이 조금 일찍 찾아오신 모양이다.
“아, 맞다! 아산 병원은 더 이상 유지가 안 되려는 모양이야. 이주를 원하길래 요새 연합에서 대신 관리해주기로 했어.”
“강릉항이면 믿을만하겠네요.”
“엥? 무슨 소리여. 우리가 하기로 했는디.”
“······농담이죠?”
“동장! 이대로 대통령까지 가야지!”
나는 도망치는 상식 아저씨한테 베개를 던진 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 * *
가뜩이나 없는 물자로 골머리를 앓던 KLF는 이번 패배로 사실상 모든 걸 잃었다.
이를 놓치지 않은 요새 동맹군은 즉각 남대천을 넘어 마지막 본대를 공격했고,
강중식 대령은 불과 한 부대도 되지 않은 패잔병을 수습한 채 왕제산으로 도망쳤다.
강력하고 잔혹하기 짝이 없던 사상 집단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최후였을까.
참전했던 생존자 중 그 누구도 승리의 환호를 외치거나 기뻐하지 않았다.
그저 파괴된 요새와 죽은 이들을 기리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강릉 요새 동맹.’
하지만 우리에게도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면 바로 서로를 고립시키던 콘크리트 장벽을 넘어 진정한 유대를 이뤘다는 것이다.
내 고향, 내 터전. 강릉이라는 지역 이름은 생존자들을 하나로 엮기 충분했고,
우리는 마지막 회담 자리에서 생활권을 강릉 전역으로 넓히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부상자를 치료하고 주둔지를 정리한 동맹군은 해산 하루를 앞두고 있었다.
철컹, 끼이익.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문제없습니다. 가 보세요.”
나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경비병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폐건물 특유 퀴퀴한 냄새와 함께 용접 질로 만든 감옥이 모습을 나타낸다.
달칵.
임의로 설치된 전등을 켰다.
철창 안에는 꼬락서니가 말이 아닌 오영창이 힘없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툭.
나는 가지고 온 음식을 철창 안으로 집어넣고 간이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 - - - - !!”
그동안 음식을 줬을 리가 없다.
놈은 바로 앞에 떨어진 음식에 눈이 돌아갔는지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적우적.
나는 그 광경을 아무런 말 없이 지켜보며 오영창이 식사를 다 하기를 기다렸다.
“박, 박범석 씨?”
“예, 맞습니다.”
그래도 입안에 무언가 들어오자 넋이 나갔던 사람이 제정신을 차린다.
오영창은 마치 자신을 구원해줄 사람이라도 본 듯 철창에 재빨리 매달렸다.
“범석 씨!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제발 딱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왜 그랬습니까?”
“협, 협박받았습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저는 물론이고 전부 죽인다고 했습니다!”
협박받았다고? 나는 놈의 같잖은 변명에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거짓말인 건 둘째치고 정말로 억울해하는 저 모습이 역겨움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감춘 나는 이마를 긁적이며 물었다.
“뭐, 좋습니다. 마침 제가 원하는 정보가 있는데, 협조를 얻을 겸 살려드리죠.”
“예, 예!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KLF 놈들이 계속 회수하겠다고 난리 치는 그 물건,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포로로 잡은 KLF 놈들은 공통으로 그 물건을 회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나는 그것이 바로 본거지에서 우연히 얻은 녹색 보관함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아무리 노력해봐도 열 수가 없어 무엇이 들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뭐, 금괴라도 들었나? 아니면 무기명 채권? 혹시 핵미사일 버튼은 아니겠지?
KLF만 한 거대 단체가 애지중지하고 있었던 물건이라면 분명 뭔가 있을 것이다.
꿀꺽.
“정말······살려주시는 겁니까?”
이야, KLF 단원도 모르는 걸 한낱 변절자가 아는 거야? 역시 박쥐 계 엘리트답다.
나는 기대하지 않았던 소득에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재차 해주었다.
그러자 놈은 한참을 무언가 고민하더니 이내 철창 앞으로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저,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하지만 관련된 이야기는 한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뭡니까?”
“감염체 치료제랑 관련된 거랍니다.”
쾅!
“아아악!”
나는 간이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철창에 매달린 놈의 얼굴을 걷어찼다.
“야 이 십새꺄, 나랑 장난해?”
“들은 그대로입니다! 정말로요!”
감염체 치료제? 백신도 아직 없는 마당에 치료제가 뜬금없이 등장한다고?
아주 누가 들으면 시발, KLF가 인류를 구원할뻔한 엄청난 단체인 줄 알겠다.
나는 코뼈가 박살 난 오영창을 더 때려줄까 하다가 이내 바닥에 침을 뱉었다.
“됐다. 더 말해봐야 뭐하냐.”
“약, 약속은······.”
“어, 지킬 거야.”
모든 볼일을 끝낸 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비병들이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흉흉한 분위기, 그들 손에는 둔기와 밧줄이 들려 있었다.
“잠깐,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박범석! 약속이랑 다르잖아! 야 이 개새끼야!”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오영창은 철장에 매달려 울부짖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목을 밧줄로 휘감고 살벌한 둔기를 들었다.
적어도 오은혜 이야기는 물어볼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그녀가 불쌍해졌다.
* * *
“허억, 헉!”
KLF 지도자 강중식 대령은 눈이 쌓인 왕제산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어째선지 놈의 옆에는 항상 대동하고 다니던 친위대가 보이지 않았고,
훈장이 잔뜩 달려 있던 제복 또한 감염체의 피로 검게 더럽혀져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강중식은 바삐 도망치면서도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연신 뒤를 바라봤다.
이제는 자신을 지킬 군대도, 친위대도 전부 추격자들한테 죽어버린 최악의 상황.
편집증 환자처럼 웅얼거리던 강중식은 그만 돌부리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털썩!
“끄으윽!”
총알이 꿰뚫고 간 어깨에선 시뻘건 피가 줄줄 새어 나왔고,
그 피는 뒤를 쫓고 있는 추격자들에게 손쉬운 흔적을 제공해주었다.
탕!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 강중식의 허벅지로 총알이 날아와 박힌다.
놈은 어억 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쓰러져 눈밭을 뒹굴었다.
총성을 쫓아본다.
그 자리에는 군복을 입은 두 남녀가 차가운 눈으로 강중식을 노려보고 있었다.
“잘도 도망치네, 돼지 새끼가.”
“······타켓부터 확인해.”
남성은 바닥을 기는 강중식을 향해 다가가 곧바로 복부를 걷어찼다.
“끄으윽.”
“강중식 그 새끼 맞습니다, 누님.”
양양에서 놓쳤던 그 강중식 맞다. 고개를 끄덕인 여성은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강중식 대령. 귀관한테는 주어진 선택권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건이 어디 있는지 순순히 불 것인지, 또 하나는.”
그녀는 날카로운 나이프를 뽑아 강중식의 눈동자 바로 앞으로 가져다 댔다.
고문 기술자로 유명한 여성의 이름값만으로 협박은 간단하게 끝이 났다.
“말, 말할게! 말할게, 제발!”
이에 정신이 나간 강중식은 미친 사람처럼 온몸을 떨며 비명을 질렀다.
“박범석! 박범석 그 새끼가 가져갔어!”
남성 군인이 인상을 찌푸린다.
“박범석이 누군데 이 등신 새끼야. 말을 할 거면 어디 있는지 제대로······.”
“잠깐만.”
하지만 그와는 달리 여성 군인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조용히 읊조렸다.
“박범석이 여기 있다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