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드디어 해산 날짜가 되었다.
이른 새벽 김춘식 회장과 마지막 인사를 끝낸 나는 주둔지 정리를 명령했다.
요새 동맹군은 아쉬움 반, 기쁨 반이 섞인 심정으로 함께했던 동료들과 인사했고,
이내 각자가 속한 요새로 돌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귀갓길에 올랐다.
그렇게 경포호를 떠나 출발한 지 2시간, 우리도 드디어 희망 요새에 도착했다.
“동장님 오셨다!”
혼자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고향 집처럼 언제나 같은 모습인 채 서 있는 희망 요새.
평생을 떠돌며 살던 나는 집에 돌아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이 평화로움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정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왔던 나는 오랜만에 이 고요함을 만끽하고 싶었다.
“동장! 혼자 여기서 뭐혀! 다들 찾잖여!”
하지만 그 바람은 요새로 들어온 지 불과 1시간도 되지 않아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자, 자! 가족은 이쪽, 솔로는 저쪽!”
“짐은 여기에 두시면 됩니다!”
이번에 우리 요새로 합류하게 된 폴리텍대 이주민들이 방금 도착했다.
졸지에 두 배나 많은 이주민을 받게 된 희망 아파트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이주할 거란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많은 줄은 예상 못 했던 모양이다.
숙소 배치와 청소부터 시작해 당장 오늘 먹을 배급까지. 정말 할 일이 태산이구나.
가뜩이나 고생했던 일행들은 이 한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동장님, 침구류가 부족할 것 같습니다.”
“지하 주차장 창고에 예비분이 있습니다.”
“동장! 저녁 배급은 어떡할까!”
“급한 대로 통조림부터 배분하세요.”
거의 10분에 한 번꼴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나 안건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그나마 복무 시절 어깨너머로 배운 행정 짬 덕분에 어떻게든 버티고는 있지만, 정작 본인 몸이 축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집무실에서 링거까지 맞아가며 몰려오는 업무를 모조리 처리했다.
딸랑딸랑.
그리고 시간이 지나 드디어 찾아온 복귀 첫날 밤, 점호 종이 짤랑짤랑 울렸다.
불침번을 제외한 모든 인원은 숙소로 돌아갔고 요새는 금세 조용해졌다.
다들 먼저 올라갔나?
기지개를 길게 켠 나는 오랜만에 102동 아파트로 올라가 옥상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집 앞마당에는 어느새 텐트를 친 자경 단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동장! 여기야, 여기!”
또 씨암탉이라도 잡은 걸까?
음식 냄새에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일행들 사이에 낑겨 앉았다.
냄비에는 닭으로 보이는 뽀얀 국물이 그 바로 옆에는 무려 양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와, 씨입! 이거 양주 맞죠?”
“김춘식 회장님이 주고 가셨어요. 이게 전쟁 전에 만든 양주라는데 믿겨 지세요?”
과장 안 하고 서울 가서 저 양주 한 병만 팔아도 소주를 궤짝을 살 것이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나는 여전히 통이 크신 김춘식을 찬양하며 잔을 들었다.
“동장도 왔겠다, 슬슬 먹자고!”
얼굴이 잔뜩 상기된 상식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 양주를 한 잔씩 따라주었다
그러자 일행들은 술잔을 앞으로 모으며 잠시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음.”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 것으로 보아 내게 한마디 하라고 권유하는 게 뻔하다.
아니, 그냥 먹지 또 뭘 회식이라고.
에라이 모르겠다.
나는 술잔을 들며 말했다.
“고생했습니다!”
고생했다. 모든 걸 담은 그 한마디에 일행들은 환하게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맛있는 음식, 따뜻한 난로, 일행들은 왁자지껄 웃으며 회식을 즐겼다.
빠르게 줄어드는 음식과 양주만큼이나 분위기는 금세 무르익고 있었다.
“흐흐, 기분 좋다.”
젊은 애들은 젊은 애들끼리 놀라고 하고 나는 상식 아저씨와 조용히 대작한다.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술잔을 기울이는 내내 활짝 웃고 있었다.
“옛날 생각나는구먼. 박 동장님하고도 이렇게 모여서 회식하고 그랬는데. 내가 살아생전 이런 날이 다시 올 줄 몰랐어.”
할아버지 다음으로 가장 오래 희망 요새를 지켰던 아저씨는 옛 시절을 떠올린다.
아무리 모자챙을 내려봐도 촉촉하게 젖은 눈가는 가릴 수가 없다.
나는 그냥 아무것도 못 본 척 아저씨 잔에 양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그리우세요?”
“아니, 지금이 더 좋은 거 같어.”
“그럼 됐죠, 뭐.”
지금 생각해보면 흘러가는 인생대로 참 줏대 없이도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그중 그나마 후회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강릉으로 오는 택시를 잡은 것이다.
나는 귀한 양주를 홀짝홀짝 마시며 왁자지껄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안주 삼았다.
이번 겨울은 썩 운치 있었다.
* * *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확장이 가능혀.”
“설계할 때부터 고려하신 거예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면서 다 준비해두고 계셨더라고. 대단하시지?”
보통 인구가 늘어나는 요새는 장벽 확장에 큰 골머리를 앓는 게 보통이다.
아무리 발전이라 이뤄진다고 해도 협소한 공간은 너무나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확장할 땅을 미리 선점해두셨다.
그 위치와 구조가 얼마나 절묘한지 장벽만 하나 세우면 두 배는 늘어나게 될 땅.
나는 벌써 그 견적을 잡기 위해 상식 아저씨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대충 만들면 없느니만 못해. 오래 걸려도 되니까 아주 높고 튼튼하게 만들자고.”
장벽을 세울 기술자야 폴리텍대 생존자들이 합류한 이상 걱정할 것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재료, 막대한 양의 시멘트와 뼈대가 되어줄 철근이었다.
“예전에는 어떻게 구하셨어요?”
“시멘트는 저기 태백 요새 쪽에서 구해왔고, 철근은 강릉항에서 빚져서 사 왔지.”
하긴 석회석이야 가채 연수가 천년은 넘게 남은 한반도이니 어떻게든 구할 수 있다.
다만 철근은 서울 쪽이 아니면 무역항을 통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거 같다.
이번에 전리품을 분배받아서 좋아했는데 장벽을 짓는 데 다 쓰게 생겼구나.
나는 흘러내리는 코를 훌쩍이며 곧 확장될 희망 요새 땅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치익.
[형님, 이제 슬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소형 무전기가 울렸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1시, 마침 점심시간이 끝나고 약속한 시각이 되었다.
우리는 장벽에서 내려와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초소 대기소로 걸어갔다.
“형님! 이쪽이에요!”
대기소 앞에는 일행들 말고도 10명 정도 돼 보이는 인원들이 질서 있게 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렷 자세로 등을 곧게 피고 있었다.
“모두 모였습니다.”
“권총은 모두 지급했습니까?”
“예, 방금 전달했습니다.”
임시로 뽑은 민병대와 자경 단원에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 권총의 유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일행들과 같은 권총과 홀더를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뽑힌 자경 단원 2기다.
기존 민병대들과 폴리텍대 출신 중 자원한 이들을 선정해 총 10명을 뽑았다.
물론 대부분이 전투 능력은 기본. 인성, 성향, 경력에서 모두 합격점을 받았다.
“경례는 됐습니다. 편히 쉬세요.”
나는 경례하려는 그들을 만류한 뒤 미리 마련해둔 간이의자에 편히 앉게 했다.
성비도 정확히 반, 나이도 제각기, 참 다양한 구성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자경단이 되면 고생이야 하겠지만, 그만큼 확실한 대우와 보상을 받게 된다.
이를 알고 지원했던 단원들은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대답을 고민했다.
“어, 어머니가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2기 단원중 가장 앳된 남성 단원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하하, 그래요?”
“예! 열심히 일해서 동생이 원하는 책도 사주고, 어머님 약도 사드리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좋은 대답이다. 나는 대답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홀더를 툭툭 쳤다.
“굳이 그럴싸한 동기가 필요한 건 아닙니다. 보상 때문이어도 좋고, 권총이 부러워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다만,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목적은 같아야 하며 행동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를 지키고 자랑스러운 구성원이 되는 것. 요새를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숨을 크게 내쉬었다. 참 살면서 이런 말은 남들에게 하게 될 줄이야.
낯부끄러워진 나는 임명식을 시작한 지 5분 만에 해산을 명령했다.
“말이 너무 길었죠? 자, 이상 끝!”
짧게 손뼉을 치자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던 2기 단원들이 정신을 차린다.
나는 근무지로 흩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경태와 김가은을 조용히 호출했다.
“예, 형님.”
“부르셨어요?”
“내일부터 두 그룹으로 나눠 요새 근방을 순찰하게 할 겁니다. 가능하시겠어요?”
“네, 문제없습니다.”
“생각보다 단원들 수준이 높아요. 당장 현장에 투입해도 이상 없을 정도입니다.”
회담 내용 중 가장 중요하게 치러졌던 안건은 다름 아닌 요새 밖 지역 치안이었다.
강릉 전역을 안정화하기로 약속한 이상, 우리도 차근차근 진행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나는 자신만만해하는 둘에게 안전을 당부한 뒤 다시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요즘 캐러밴들 사이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오더군. 아마 해체된 산업 단지 생존자들이 곳곳에서 말썽을 부리는 모양이야.]
“예상은 했지만, 너무 빠르네요.”
[뭐, 노조장한테 배운 버릇들이 어디 가겠나? 쯧. 그래서 이래저래 신고가 많이 들어오고 있으니까, 그쪽도 조심들 해.]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 그리고 저번에 시멘트랑 철근 찾는다고 했지? 시멘트는 우리 창고에 여유분이 조금 있으니까, 시간 날 때 가져가고. 철근도 구매처가 금방 나올 거야.]
감사! 압도적 감사! 나는 말만 하면 구해다 주는 김춘식 회장님을 찬양했다.
하지만 모든 호의에는 적절한 대가와 거래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대신 일 하나만 도와줬으면 하는데.]
“말만 하세요. 달도 따다 드리겠습니다.”
[뭐, 다른 건 아니고. 식수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파. 자네들이야 지하수가 있어서 걱정 없다지만, 다른 요새는 아니잖나?]
“아무래도 그렇죠.”
[남대천 상류에 있는 감염체 둥지를 파괴하고 강독을 한 번 뚫어볼 생각이야.]
예전이라면 극구 만류했겠지만, KLF에게 노획한 무기가 있다면 못 할 것도 아니다.
“좋은 생각이네요.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생각보다 쉽게 동의하는군. 혹시 거절이라도 할까 봐 내심 걱정했는데 말이야.]
“왜요?”
[물장사에 차질이 생기니까, 그렇지. 정말 괜찮겠나? 나중에 섭섭하지 않겠어?]
“됐습니다. 백날 물장사만 할 것도 아니고, 이제 슬슬 봄도 생각해야죠.”
[끌끌,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해. 시간 나면 언제 한번 놀러 오라고. 강혜지 직원이 사장님 언제 오냐고 매일 물어보니까.]
“따끔하게 혼 좀 내주세요.”
무전으로 한참 이야기하던 나와 김춘식 회장은 서로 낄낄 웃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어?”
그런데 그 순간 며칠째 잠잠하던 책과 만년필이 갑자기 탭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놓칠뻔한 무전기를 가까스로 들어 올리며 황급히 외쳤다.
“회장님! 제가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으응? 그러지.]
나는 무전기를 다급하게 끊고 책상 위에 놓인 할아버지의 책을 향해 달려갔다.
때마침 탭댄스를 끝낸 만년필이 또르르 굴러떨어져 내 앞에 놓였다.
[강릉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남대천은 생존자들의 유일한 식수원이었다. 하지만 감염체가 거기에 둥치를 튼 이후로 물이 막히고 오염되어 극심한 식수난을 유발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모두가 감염체 둥지라고 생각했던 그곳은 사실 수많은 줄기 중 하나였다. 남대천이 시작되는 대관령에는 현재 감염체 ‘군락’이 태동하고 있었다.]
시발, 책에서 ‘군락’이라는 단어를 본 순간 손과 이마에 식은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끝이야?”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책은 문제만을 던질 뿐 해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야! 야 이, 종이 쪼가리 년아!”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은 없었다.
그저 앞으로 굴러떨어진 만년필이 내게 답을 구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음 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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