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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의 상속자-39화 (39/180)

39화

아포칼립스의 요새 상속자 39화

보통 감염체 웨이브를 계속 이동하는 감염체 무리 집단을 일컫는 말이라면,

둥지는 감염체 무리가 알 수 없는 수 없는 이유로 한자리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그중에는 모든 생존자가 치를 떠는 상위호환의 개념이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감염체 ‘군락’이다.

어떤 원리로 생겨나는지는 내가 과학자나 전문가가 아니라 알 수 없지만,

군락은 유일하게 집단 변이를 일으키고 그 일대를 오염시키는 종양과도 같은 존재다.

오죽하면 내가 복무했던 시절에도 절대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었겠는가.

그나마 국토가 좁고 군사력을 최대한 보존했던 한국이기에 화력으로 찍어눌렀지,

이를 방어할 능력이 없었던 나라는 아예 멸망해버리는 예도 허다했었다.

그런데 그런 군락이 대관령에 있다? 차라리 만우절 농담이었으면 좋겠네, 시발.

혼자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던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식 아저씨를 불렀다.

“아저씨.”

“으응?”

“혹시 30km도 안 되는 거리에 감염체 군락이 생겼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짐 싸서 동해로 튀어야지.”

“······역시 그렇죠?”

“말해 뭐혀! 살려면 도망쳐야지. 근데 왜? 설마 어디에서 이상한 말이라도 들은겨?”

“아뇨, 그냥 심심해서요.”

살면서 온갖 것을 겪어봤을 상식 아저씨도 이렇게 반응하는데 다른 사람은 어떨까.

아마 아비규환이 되어 당장 요새를 버리고 저 남쪽으로 도망칠지도 모른다.

혼자 안다는 것도 이렇게 힘든 거였나.

나는 심각한 문제만 던져주고 입을 다문 책을 원망하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오늘 따라 간다고?”

“김 회장님이 만나자고 하셨거든요. 아마 강릉항에서 하루 묵고 올 것 같아요.”

원래라면 경태와 가은 씨에게 한 팀씩 배정한 뒤 지역을 순찰하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정이 급히 변경되는 겸사겸사 나도 남쪽으로 가는 순찰팀에 끼게 되었다.

“동장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다만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혀. 알겠지? 누가 뭐래도 우리 요새는 동장 편이니까.”

늘 그렇듯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아저씨의 당부를 마지막으로 요새 정문이 열렸다.

나는 요새로 돌아온 지 불과 이틀 만에 다시 옷을 동여매고 밖을 나섰다.

* * *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강릉 FM에서 희망 FM으로 다시 찾아뵙게 된 진행자 이하나입니다! 영영 이별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기분이 너무 좋네요!]

[이 자리를 빌려 방송을 허락해주신 박 동장님과 희망 아파트 주민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희 희망 FM은 앞으로 24시간 강릉 전역으로 송출되는 음악 방송입니다.]

[오늘 온도 영하 15도, 비교적 따듯하네요. 그나저나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죠? 이 방송을 듣고 있는 모두 분들 안전한 연말 보내시라고 곡 하나 띄어드립니다.]

강릉항 창고 구석에 박혀 있는 송출 기구 몇 개를 가져다줬더니, 기어코 101동 아파트 옥상에서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나는 지난번보다 훨씬 밝아진 이하나의 목소리를 들으며 볼륨을 올렸다.

그러게 곧 크리스마스구나.

이젠 의미조차 기억나지 않는 빨간 날은 지나간 시간만을 실감 나게 해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흥얼거린 나는 잠시 내려두었던 소총을 다시 챙겨 들었다.

“준비되면 모두 하차합니다.”

때마침 가장 가까운 시내로 진입한 픽업트럭이 미리 지정해둔 은신처에 정차했다.

그러자 2조 조장인 가은 씨를 필두로 5명의 자경 단원이 차에서 내렸다.

달칵!

착, 착, 착!

지원자 중 고르고 고른 단원들답게 포지션을 잡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주변 확보, 안전거리 확보, 이를 눈대중으로 확인한 가은 씨는 내 눈치를 살폈다.

‘편히 하세요.’

나는 어디까지나 참관인 역할로 동행한 거지, 2조 지휘는 가은 씨한테 일임했다.

이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능숙하게 이번 순찰 임무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도보로 이동합니다. 주변 경계 확실하게 하시고, 항상 거리 유지하세요.”

처음으로 진행하는 외부 순찰인 만큼 가볍게 주변 반경 3km만 살펴볼 예정이다.

우리는 그렇게 은신처를 빠져나와 눈이 쌓인 시내 도로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사박.

KLF 놈들이 대청소해준 덕분에 낮에는 돌아다니는 감염체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두운 건물 안이 안전한 건 아니기에 긴장을 풀 수는 없다.

제한된 시야, 유리가 깨진 창문, 저 멀리서 들려오는 감염체 울음소리와 거친 바람.

2조는 오늘따라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살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잘하네.’

역시 한 집단을 이끌었던 사람답게 가은 씨는 예상보다 훨씬 잘해주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경태를 따라갔어야 했나.

1조 조장이라는 직함에 어깨가 여기까지 올라왔던 녀석을 생각하면 좀 걱정이 된다.

“쉿!”

한참 상념에 빠져 있던 그 순간 선두로 걸어가던 가은 씨가 갑자기 손을 든다.

철컥!

이에 단원들은 훈련받은 대로 자리를 잡고 정면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 - - - - - -.”

앞에 누군가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발견한 그들은 주춤주춤하다 이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쏘, 쏘지 마세요!”

그들은 그냥 도망치려다 총을 발견했는지 잔뜩 겁에 질린 채 양손을 들었다.

숫자는 총 다섯, 전형적인 생존자 무리다.

이를 눈치챈 김가은은 총구를 내리며 공격 의사가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디 요새 소속이십니까?”

“요새 출신은 아닙니다. 저쪽 삼거리 마트에서 캠프를 운영하고 있어요.”

생존자라고 모두가 요새에 사는 건 아니다.

가끔 이렇게 뜻 맞는 생존자들이 모여 소규모 캠프를 만들어 운영하고는 했다.

김가은은 강릉항이 제공한 캠프 리스트를 꼼꼼하게 확인한 뒤 다시 물었다.

“한길 마트요?”

“맞습니다!”

“네, 맞네요.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분 확인이 끝이 났다. 단원들은 그제야 방아쇠에서 손을 떼며 경계를 풀었다.

“혹시 뭘 하시는 분들이신지······.”

“아, 실례했습니다. 저희는 희망 요새 소속 자경 단원들입니다. 이 근방 치안을 안정화하라는 지시가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희, 희망 요새! 네, 네! 들어봤습니다!”

희망 요새라는 말에 잔뜩 주눅 들어있던 생존자 남성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는 함께 있던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인지 상기된 얼굴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 말이 진짜였나 봐.”

“나는 그냥 뜬 소문인 줄 알았어.”

강릉 전역을 들쑤셨던 전쟁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 소문이 퍼졌던 모양.

쑥덕거리는 일행들을 주의시킨 남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그, 치안 안정화라는 게 혹시 저희 같은 외지인들도 도와주시는 건가요?”

“예, 당연하죠. 말씀해보세요.”

도움을 주겠다는 말에 남성은 곧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성토했다.

“한 사흘 전부터 마트 근처 카센터에 한 생존자 무리가 정착했습니다. 그냥 흔한 이주민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잘 대해줬는데,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꾸기 시작하더니······.”

남성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말하려다 목이 멨는지 기침과 함께 눈가를 비볐다.

사흘이라, 타이밍이 얼추 비슷하다.

아마 산업단지 애들이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이 근처 카센터에 정착한 모양이다.

‘우리가 처리하죠.’

‘네, 동장님.’

눈을 마주치며 동의를 구한 가은 씨는 흔쾌히 수락하며 남자와 악수했다.

“저희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는 놈들이 정착한 카센터 위치를 전해 들은 뒤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 뒤를 따라가며 고개를 숙이는 남성을 향해 찡긋 윙크했다.

“생수 필요하시면 오세요. 싸게 해드릴게.”

“예? 당신은 누구······?”

* * *

척, 척!

김가은이 수신호를 보내자 다섯 명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카센터를 포위했다.

어중이떠중이 양아치 새끼들답게 경계병 하나 세워두지 않은 산업단지 출신들.

덕분에 우리는 순식간에 담 안으로 진입해 카센터 문 앞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창문이 깨졌다.

쨍그랑!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부를 확인한 자경 단원 그 누구도 총을 발사하지 않았다.

적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미 피를 흘리며 죽어간 시체뿐이었으니까.

“모두 뒤로.”

혹시 감염체 짓일지도 모른다.

잠자코 있던 나는 빠르게 나서서 단원들을 물러나게 한 뒤 창문을 넘었다.

달칵.

손전등을 꺼내 카센터 내부를 살핀다.

곳곳에는 8~9구 정도 되어 보이는 시체들이 널려 있었고 감염 흔적은 없었다.

선객이 있었나? 아니면 내부 분열?

내가 안전하다는 수신호를 보내자, 경계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단원이 들어왔다.

“세상에······.”

장난 아니다. 현장 그 어디를 살펴봐도 떨어진 탄피를 찾을 수가 없다.

그 말인즉슨 날붙이 하나로 8~9명이나 되는 성인 장정들을 썰어 먹었다는 것인데,

그 손속이 얼마나 잔인한지 전쟁 경험이 있는 단원들조차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시체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목을 찌른 시점에서 죽었어.’

‘계속 가지고 놀았군.’

형태가 자른 자상 두 개, 카센터를 습격한 범인은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이다.

한 명은 백정 질이 어울릴 것 같고 나머지 한 명은 어디 군 출신이 분명한데······.

“응?”

한참 즉사한 시체를 살펴보던 나는 익숙한 자상 하나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날카로운 나이프를 찔러 넣은 다음, 위로 힘껏 찢어 올리는 특이한 자상.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그 손버릇이 내 눈길을 끌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나는 카센터를 둘러보고 있는 가은 씨를 불러 말했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으세요.”

“예? 지금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곧바로 카센터 뒷문을 열고 나와 흔적은 지우려고 한 흔적을 따라갔다.

역설적인 말이겠지.

흔적을 지우려는 흔적이라니.

하지만 같은 부대에서 이 방법을 배웠던 사람에게는 이 솜씨가 너무나 눈에 띄었다.

나는 묵묵히 눈보라를 뚫고 걸어가 흔적이 사라진 종착지에 걸음을 멈췄다.

끼익,

끼익,

그곳에는 낡은 간판이 떨어지기 직전인 허름한 가게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 - - - - - - ]

안으로 들어갔다.

희망 FM이 송출하는 라디오 소리가 은은한 클래식 음악을 타고 울려 퍼진다.

주인이 있을 리는 없고, 테이블 위에서 혼자 반짝이고 있는 작은 기름 전등.

나는 구석으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나와. 알고 있으니까.”

그러자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군복을 입은 한 여성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박 중위님.”

익숙한 얼굴, 그보다 익숙한 부대 마크. 나는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송 소위.”

“이제 중위입니다.”

하긴 전쟁 중 임관했던 나랑은 다르게 엘리트 코스를 착착 밟아온 송지영이다.

실력도 좋고 뒷배도 든든했으니 어쩌면 빠른 진급은 정해진 수순이었겠지.

나는 이전보다 훨씬 듬직해지고 동시에 많이 유해진 송지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많이 변했네.”

“중위님도요.”

막 임관했을 시절 졸졸 따라다니던 병아리 모습이 아직도 선명한데 말이야.

그래도 이제는 중위라고 노련해 보이는 건 물론 군인티가 좀 나는 기분이다.

“그래서, 강릉까지 왜 왔지?”

“그게······.”

덜컹!

“어? 벌써 왔네요.”

그런데 이번에는 가게 뒷문에서 처음 보는 한 남성 군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에 미간을 찡그린 송지영은 대놓고 이를 드러내며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나?”

“에이, 누님. 이제 군인도 아닌 사람을 왜 계속 감싸고 도세요. 하달된 명령 못 들으셨어요? 위에서 다 죽이라잖아요.”

“아직 정보가 필요해.”

“그거야 저희가 알아보면 되는 거고요.”

이제 막 임관한 듯 소위 직위를 달고 있는 남성은 실눈 사이로 눈을 빛냈다.

송지영 후임인가 보구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인 것으로 보아 내가 제대 후 조원을 늘린 모양이다.

“형씨, 형씨 솜씨가 그렇게 좋다면서?”

선배를 향한 예의는 깔끔하게 밥 말아 먹은 녀석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병신 돼서 나간 퇴물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호들갑들인지 모르겠네.”

그리고 처음부터 지시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는 듯 공격 반경으로 다가왔다.

스윽, 보폭이 앞으로 쏠린다.

놈은 특임대 소속답게 주머니에서 손을 빼듯 가뿐하게 나이프를 뽑았다.

깜짝 놀란 송지영이 다급히 외쳤다.

“미친 새끼야, 멈춰!”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일반인이라면 인지하지도 못할 속도로 휘둘러진 칼날이 내 목을 노렸다.

탁!

“?”

하지만 칼날은 목에 채 닿기도 전 저지당했고 놈은 그대로 목이 잡혔다.

우두둑!

쾅!

팔을 반대편으로 돌려 어깨뼈를 분지르고 상판을 테이블에 처박아 버렸다.

“끅, 끄르륵.”

재수 없는 상판으로 웃고 있던 놈은 코뼈가 분질러진 채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는 어이가 없어 물었다.

“낙하산이냐?”

“······저래 보여도 수석이에요.”

“폐급 아니고?”

그건 선배님 기준이겠죠. 송지영 중위는 이마를 짚으며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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